인생은 불공평하고 신은 잔인하다는 말은 사실일까?
서른일곱이 넘어가면서 나의 신체나이가 걱정되었다. 임신하기엔 서른일곱도 늦었는데, 언제 임신을 해야 할까? 한편으로는 나는 아기를 갖고 싶은 걸까? 내 마음을 나도 몰랐다. 갖고 싶은 것 가기도 하면서 아닌 것 같기도 하면서 내 나이를 걱정하고 있는 나.
누군가 갑작스레 물었다.
-너희도 아기 가질 거야?
난 본능적으로 ‘갖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나는 아기를 갖고 싶었나 보다. 나의 마음을 알았으니 이제 아기 만들기에 도전해야 하는데, 그 당시의 남편과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고, 결혼에 대해서 깊이 있게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연애의 끝은 결혼이라고 믿는 한국여자
우리의 사랑과 결혼이라는 제도는 상관없다는 프랑스 남자.
남편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주는 의미가 동서양은 너무도 달랐다. 내가 맞다 네가 틀리다는 논리로 우리는 평행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 무렵 만나는 친구마다 서로의 임신 소식을 전했다. 2월, 3월, 4월, 5월, 6월에는 두 명의 임신소식. 상대적인 박탈감이 느껴졌다. 나도 갖고 싶은데, 나는 왜 안 되는 것일까?
결혼에 대한 명확한 결론 없이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다 9월에 임신이 되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임신이었다. 물론 우리는 너무 기뻤다.
내가 결혼에 포기했을 무렵, ’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저렇게 원하는데, 결혼을 못 할 것도 없지 ‘라고 생각을 바꾼 남편.
홍콩 출장도 다녀오고, 10월 국경절에 한국에 가서 임신등록을 하려고 했다. 한국에서 출산을 할 생각이었으므로.
한국에서 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 아기의 숨소리를 초음파로 들을 수 있을 거라고 했지만 초음파로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유산이 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혹시 발달이 늦은 아기는 아닐까요? 며칠만 더 기다려 보면 안 될까요?
화요일과 목요일에 피검사를 하기로 했다. 임신 수치가 올라가면 임신이 유지되는 거고, 수치가 내려간다면 임신이 중지된 거라고 했다.
그 이틀을 나는 무슨 생각으로 버텨냈을까?
계류유산이라고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차가운 수술침대에 누웠을 때, 옆방에서 새로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너무나 듣고 싶던 소리.
덤덤하게 소파수술을 받고 나왔다. 안부를 묻는 친구의 문자에 문어 졌다.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걱정할까 봐 나는 한국에서 울지 않았다. 상하이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사가 50%의 직원을 정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해 10월, 나는 아기도 잃고 직장도 잃었다.
남들을 한 번에 척척되는 임신을 나는 겨우 했는데, 8주라는 짧은 시간의 임신. 그것도 모자라서 정리해고라니. 신은 너무 잔인하지 않는가.
그다음 해 1월, 우리는 프랑스에서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다. 1월에 프랑스로 갔다. 그리고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중국 우한에서 무서운 속도로 퍼지고 있었다.
2020년 간절함과 허무, 그리고 신종역병과 싸워야 하는 현실과 마주했다. 그 당시 나는 임신과 출산, 육아는 내 인생에서 쓸 수 없는 단어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불친절했던 신이 나에게 친절해지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에 나는 상하이에서 출산했다.
이제 그 여정을 글로 써보려고 합니다. 늘 나의 감정의 도구가 되어준 ‘선’으로 그 여정을 그려나가려고 합니다.
아주 오래전 임신한 친구를 위해 그렸던 드로잉. ‘엄마’가 될 친구의 마음을 그려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