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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현 Feb 23. 2024

첫 문장의 몇 가지 유형

제3장 첫 문장, 그 지독한 불면

첫 문장의 몇 가지 유형




미리 말하지만, 완벽한 첫 문장은 없다. 단지 작품을 여는, 일종의 문고리와 같은 문장이 앞머리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러니 첫 문장에 큰 의미를 둘 필요가 없다. 굴드는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 무게에 짓눌려 버렸다. 그렇다고 아무 문장이나 쓰라는 말은 아니다.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아우라, 톤과 색채에 따라서 필요한 문장을 배치하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유형은 있다.      



(1) 인용구 활용      


인용구는 제목과 본문 사이에, 철학적 아포리즘이나 다른 문인의 작품 중 한 문장을 인용하는 것인데, 작품의 전반적인 내용을 압축적으로 제시하고, 자칫 난해할 수 있는 내용을 독자 스스로 풀 수 있게 만드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인용구는 등산객을 안내하는 ‘셰르파’와 같다. 잘 쓰면 작품의 정상에 도달하는데 큰 도움을 받을수 있으나, 반대로 현학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춘자12)


                                        너희들은 서로 훌륭하게 연기했다     


배우들이 춘자를 연기하기 전,

모자를 쓴 토끼가 무대 중앙으로 뛰어간다     

─ 거긴 지금 몇 시니?     

무대에서 춘자들은:      

메마른 분수대에 앉아 미지근한 맥주 캔을 마시거나 격렬하게 날아가는 비둘기를 쫓는다 일회용품처럼 반짝이는 햇볕에는 아직 피지 않은 춘자가 있다

(하략)      



위 시에서 첫 문장 대신 사용된 인용구는 제목과 본문 사이에 놓인 “너희들은 서로 훌륭하게 연기했다”다. 피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에서 빌려왔다. 작품이 춘자를 연기하는 ‘춘자’에 집중되었는데, 나는 연극무대와 같은 세계의 환영을 적실하게 드러내고자 위 문구를 삽입했다. 성공 여부는 얘기할 자리가 아니니 생략하도록 하고,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한다.


우선 인용구는 간단명료하고, 의미가 분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작품은 주어를 잃은 채 모호성만 더욱 확장될 수 있다. 안 쓰느니만 못하다. 다음으로 작품의 나침반 역할을 할 문장을 선별해야 한다. 내용과 전혀 상관없지만 잘 알려진 문장은 절대 안 된다. 작품의 격만 떨어뜨린다. 마지막으로 종교적이고 정치적 색채가 강한 문장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안 쓰는 게 좋다. 불필요한 오해를 낳을 수 있다.                          

Q.08



(2) 자기 고백의 문장     


이 ‘자기 고백’의 문장은 시적 대상에 대한 창작자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을 비롯해 사소한 일상을 일기 쓰듯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것까지 포괄한다. 이 고백-체의 형식은 반드시 ‘나’라는 주어로서 진행되어야 한다. 다만 주의할 것은 주체와 ‘나’(화자)와의 ‘객관적 거리두기’를 통해 차근차근 완성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시적 화자가 아무리 창작자 자신일지라도 ‘나’(화자)에 대한 창작자의 과도한 몰입과 감정이입은 문체(文體, style) 전반에 안 좋은 영향─대상에 대한 지나친 자의적 해석 등─을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백-체는 기억에 숨겨진 시간과 장소를 되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성복 시인의 수줍은, 그러나 거침없는 첫 문장들을 읽어보자. 시인은,



바람의 어떤 딸들은

밤의 숯불 위에서 춤추고

오늘 밤 나의 숙제는

바람이 온 길을 돌아가는 것

─「來如哀反多羅 2」의 첫 문장13)



이라고 노래하면서, 밤의 황량하고 쓸쓸한 마음을 조용히 풀어내고 있다. 이러한 정서는 과거를 돌아보는 시인의 시선에도 농축되어 있는데, 그는 결코 속도를 내지 않으며 그 자리에 있는 듯 없는 듯 어떠한 과장이나 몰입, 감정이입 없이 자신과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면서 첫 문장을 풀어낸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갈 때 아버지가 우겨서 / 딴 이름의 학교로 옮기게 되었습니다.”(「사진」)14)라든가, “한 번은 뷔히너가 그렇게 읽고 싶었다”(「뷔히너 문학전집」)15)는 문장은 오래되었어도 전혀 편집되거나 가공되지 않은 흑백의 풍경 한 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시인은 일상 속의 자신을 첫 문장으로 옮겨적는데, 이러한 태도는 그의 문학이 어떤 경로를 통해, 지금-여기에서 꽃을 피우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결혼한 지 한참 뒤에도, 아니 쉰 넘어서도 / 비누를 쓰다가 얇아지면 버릴 수도 없어, / 부서진 것들 뭉쳐 비누질 하다가, 그것들 / 바스라져 세면대 배수구가 막히기도 하고, / 그러면 손가락 쑤셔 퍼내기도 했지만, 이제 / 닳아빠진 비누를 새 비누에 부쳐 쓰게 되었다”(「소멸에 대하여 2」)16)


이 아무렇지도 않은 첫 문장에서부터 시인의 소박함은 극대화되고 있다. 생활의 지혜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시인의 태도는 결코 비범하지도 왜소하지도 않다. 읽다 보면 어느새 독자 자신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시인과 독자(나)의 경계는 이 허물어져 있다. 또한 평범한 사람들의 사는 이야기일 뿐이지만 이것은 무시해도 괜찮을 ‘형이하학’이 아니다. 여기에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성찰이 담겨 있다: 예술가로서의 이성복을 없애자, 시인과 독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드나든다는 것.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말이다.     



막막한 잿빛 하늘 아래, 길도 없고, 잔디도 없고, 엉겅퀴 한 포기, 쐐기풀 한 포기도 없는 먼지투성이의 황량한 벌판에서 나는 등을 구부리고 걷고 있는 여러 인간들을 만났다.

─ 보들레르, 「각자 자신의 키마이라를」의 첫 문장17) 



이 인상적인 첫 문장은 『파리의 우울』을 관통하는 주요 키워드인, ‘산책’을 압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보들레르는 ‘파리’라는 근대 문물의 첨단을 걷는 대도시를 거닐면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났다고 고백하는데, 그들 대부분은 삶에 찌든 인물이며, 배경으로 등장하는 ‘막막한 잿빛 하늘’, 길도, 잔디도, 엉겅퀴나 쐐기풀 한 포기도 없는 ‘황량한 벌판’ 같다.


그들은 묵묵히 긴 행렬을 이루며 묵묵히 걷고 있는데, 곁에서 보니 그들은 이마를 덮은 어두운 색채와 사방에서 풍겨오는 불쾌한 냄새, 산발하는 눈동자,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 구부정한 자세를 짊어지고 있다. 그것은 ‘키마이라’와 같은 짐승의 형상을 띠고 있으며, 그 짐승들 각자는 육체에 올라카 어깨를 움켜쥐고 뭔가를 속삭이고 있다.


보들레르는 그들에게 당신이 짊어지고 있는 짐승의 정체를 묻지만, 누구도 답을 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 짐승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로를 나부끼는 자동차들의 휘황찬란한 불빛과 미각을 자극하는 화려한 음식, 유행을 갖춰 입은 세련된 연인들의 옷차림은 그 시끄러운 소움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고요하다. 그 한 가운데를 보들레르라는 이방인이 걷고 있다: 시인이 쓴 고백체의 담담한 문장은 인간의 본질적인 ‘불안’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근대문명의 부조리와 이물감을 극대화한다.


                     

    

(3) 상징적 선언아포리즘질문의 형식     


이것은 창작자가 확신하는 진리를, 선언의 형식으로 일갈하는 방법이다.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안도현, 「사랑」)18)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정호승, 「사랑하다 죽어버려라」) 등과 같은 첫 문장은 시인이 삶에서 깨달은 강렬한 성찰을 풀어낸다. 이러한 문장에는 우회로가 없다. 비유나 수사는 최소한으로 축소되며, 직관에 가장 가까워진다. 시인은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고, 차라리 거두절미하고 직설한다는 말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 황지우, 「에프킬라를 뿌리며」의 첫 문장19)     



여기서 ‘초토’의 사전적 의미는,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땅’20)이다. 하지만 이 단어는 1980년대의 엄혹한 현실, 전체주의를 방불케 하는 군사독재의 서슬을 겨냥하고 있다. 내용은 단순하다. 시인은 파리를 향해 살충제를 뿌리고 있으며, 파리는 곧 죽게 된다. 마지막 가는 길인데도 울음조차 없다. 글자 그대로, 파리는 파리목숨이다. 조직하고 저항하며 제대로 삶을 영위하기에 한반도가 처한 상황은 ‘초토’일 뿐이다. 이미 입과 귀와 눈이 막혀버린 상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조심하라고 경고다.

 

선언의 첫 문장은 강렬하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이 방법은 독자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기는 확실한 효과가 있지만, 그만큼 용두사미가 될 수도 있다. 어느 한 문장으로 매몰되지 않는, 균등한 힘의 분배가 필요하다. 아울러 그 문장이 웅변에 가까워 창작자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전달할지라도, 그 내용이 평범하거나 우리가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있을 만큼 가볍다면 독자에게 외면당할 수 있다. 그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간 낭비가 되기 때문이다.


한편, 아포리즘을 다룰 때는 조심해야 한다. 변함없는 사실은, 아무리 내가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깨달음을 얻었더라고, 이미 누군가가 지나온 길이며, 당연히 나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포리즘에 기반한 시는 철학적 사색의 결과로서, 생활과 실존에 대한 통찰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 정현종, 「섬」의 첫 문장     



너무나도 잘 알려진 대로 이어지는 두 번째 문장은 “그 섬에 가고 싶다”다. 2행으로 이뤄진 짧은 시, 그러나 이 시에는 실로 어마어마한 사랑과 울음과 희망과 긍정의 힘이 담겨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 작품처럼 절실하게, 명백하게, 매혹적으로 그려낸 시는 찾아보기 어렵다. 만일 아포리즘 형식의 시로 첫 문장을 쓰려면 이 문장의 그림자 정도는 밟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도조차 하지 말자.


마지막으로 질문으로 시작하는 첫 문장 쓰기도 이와 유사하다. 대부분의 질문은 독자를 직접 겨냥하기 때문에 대답을 비껴가기는 쉽지 않다. 어떤 식으로든 독자는 시인에게 화답하게 된다.      



바람이 불고 있습니까

─ 박성현, 「14」의 첫 문장     



이 시는 총 14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제목도 ‘14’다. 그 질문의 첫째 칸은 인용된 문장인데, 이후 조금씩 두꺼워지며 삶의 구체적 모습으로 확장된다. 이를테면, “구석구석 스며든 연기들의 생존방식은 / 어느 채널이 독점했습니까 / (중략) / 공장의 시계는 / 어느 시간에서 멈춰 있습니까 / 피로에 찌든 회전목마는 / 누구를 태우고 돌고 있습니까 / 카메라에 잡힌 압도적인 가난은 / 누구의 구경거리입니까”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주의할 점은, 질문도 작품의 맥락과 필요성에서 선별되고 추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문이라고 모두 용인되지 않는다.                          

Q.10


(4) 고양된 감정의 객관화     


여기에 대표적인 감정은 사랑이다. 요컨대, 사랑이란 정서적으로 극대화된 감정이다. 가장 애틋하고, 무거우며, 날카롭고 무방비하다. 사랑은 빈틈투성이며, 그 균열을 통해 열화(烈)의 맹렬한 바람이 불어온다. 사랑이란 주체의 모든 것을 장악하고, 연인에게 집중하도록 하며 이로써 죽음에 맞닿게 된다. 따라서 연인에게 부치는 편지란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부분의 정서가 포함된다. 우선 슬픔이다.      



당신의 눈에 빙하만 한 얼음장이 박혀 있었습니다

─ 박성현, 「얼음 눈물」의 첫 문장     



이 시에서 얼음장은 눈물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크기가 빙하만 하다니, 아마도 평생 울 수 있는 울음이 덩어리진 것이다. 다음으로, 안타까움 혹은 연민이다.      



내 사랑은 오늘 밤 소녀 같다

─ D. H. 로렌스, 「신부」의 첫 문장21)    


 

이 사랑스러운 첫 문장이 연민으로 충만한 이유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나 그녀는 늙었다. / 베개에 놓인 머리칼은 / 금빛이 아니고, / 섬세한 은빛과 무서운 냉기로 / 꼬여 있다”로 시인은 쓰고 있다. 비록 연인은 은빛으로 물들었으나, 그의 사랑만큼은 금발의 젊고 생기 있는 머릿결처럼 부드럽고 충만하다.


분노와 비웃음, 우울이 죽음으로 버무려진 첫 문장도 있다.   


   

지쳐빠진 네 맵시가, 그림자들과 자기 포기,

아낌없는 사랑 가지고 만드는,

귀여운 무덤, 감각 없는 묘비 위에서 나는,

겸손하게, 다정스레, 죽는다,

─ 폴 발레리, 「건성으로 죽은 여인」의 첫 문장22)     



발레리는 한 여인을 주시한다. 그녀의 맵시는 다른 때와는 달리 몹시 지쳐보인다. 그녀의 그림자조차 자포자기한 채, 시든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귀여운 무덤인 듯, 감각 없는 묘비인 듯 낯선 죽음의 얼굴들도 떠오른다. 여인을 볼수록 우울감이 치솟는다. 마음껏 화를 내고, 비웃고 싶지만 그러나 그녀를 향한 마음은 여전히 억세고 질기다. 이 아낌없는 사랑은, 시인으로 하여금 겸손하고 다정하게 죽음을 준비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랑의 첫 문장을 읽어보자.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

─ 김남주, 「사랑 1」의 첫 문장23)   


김남주 시인은 사랑을, 봄을 기다리는 용기라고 말한다. 이 용기로, 우리는 겨울을 견뎌내고 마침내는 이겨내서 봄을 맞이한다는 것이다. 다음 문장에서 그는, 사랑만이 불모의 땅을 갈아엎으며, 자기 뼈를 갈아 재로 뿌릴 수 있다고 노래한다. 사랑은 그렇다. 사랑은 죽음을 이겨내는 용기이고, 그 너머의 희망이다.


다만, 이와 관련해 금기를 말하자면, 작품에서는 ‘사랑’을 직접 노출시키는 것은 삼가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랑을 주제로 한 시는 무한에 가까울 만큼 많다. 때문에 웬만해서 내가 노래하는 ‘사랑’은 이미 다른 사람이 쓴 문장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못한 경우가 많다. 사랑이라는 말 대신, 그것을 환기하는 다른 ‘말’로써 사랑을 노래해 보자. 훨씬 더 많은 사랑의 감정들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가령, “당신의 눈에 불처럼 뜨거운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와 “불타오르는 엉겅퀴 숲이 당신의 눈에 펼쳐지고 나는 그 황무지를 맨발로 걸어갑니다”는 다르다. 어떤 문장을 선택할 지는 창작자의 몫이겠지만.                         

Q.11


(5) 간결한 묘사대화서간체     


묘사는 문학적 글쓰기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문체(文體)다. 특히 시에서는 간결하고 압축적인 묘사만으로도 작품이 완성되는 만큼 평생을 집중해서 연마해도 좋다. 과장한다면, 이미지즘이나 하이쿠는 묘사 그 자체다. 때문에 나는 묘사만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시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묘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오래, 자세히 봐야 한다. 대상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말이다.


여기에는 대상과의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응시’(凝視)와 대상과의 거리를 점차 없애면서 그 속으로 들어가는 ‘주시’(注視)의 두 방식이 있을 것인데 그 어느 것도 버려서는 안 된다. 이 두 ‘바라봄’은 대상 스스로가 자신을 열도록 만든다. 그제야 우리는 대상의 적확한 묘사에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다.


그러면 묘사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그림을 그리듯 쓰는 방법으로, 반드시 대상 전체를 드러내는 핵심 이미지만을 사용해야 한다. 주저리주저리 묘사를 이어나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지루하게 만들며, 아무리 정교하고 섬세하다고 해서 시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에서 묘사는 순간에서 전체를 파악하게 만드는, 일종의 ‘스냅사진’이자 ‘캐리커쳐’이다.     



당신 두 눈에 서려 있는 얼음이, 먼 하늘로 스며들다 지쳐 우두커니 서 있는 노을 같았습니다

─ 박성현, 「빙하기」의 첫 문장      



이 작품의 첫 문장은 우선 당신의 두 눈에 얼음이 박혔다는 문장과, 그 얼음은 “먼 하늘로 스며들다 지쳐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인 ‘노을’이라는 문장이 합쳐진 것이다. 나는 ‘눈’과 ‘얼음’, ‘노을’의 세 키워드로 누군가와의 이별로 숨이 끊어질 정도로 밤새도록 울다가 순간 멈춘 사람의 표정을 묘사했다. 진이 다 빠져버린 여자의, 소박한 무덤처럼 부풀어 오른 두 눈두덩이 보이지 않는가.      



암막 커튼 사이로

햇살이 방안을 엿본다

─ 이해존, 「꼼치」의 첫 문장24)     



시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누군가 엿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느낌을 이처럼 생동감 있고 섬뜩하게 표현한 문장은 드물다. 암막 커튼을 쳐야 할 정도로 빛에 민감한 사람이지만, 몰래 잠입한 햇살은 커튼을 은근슬쩍 밀어내고 아무렇지도 않게, 마치 제 집인 양 방안을 엿본다. 이미 시인은 햇살의 의뭉스러움에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비유의 회절을 크게 해서 모호하게 읽히도록 한 시도 있다. 첫 문장을 보자.      



우울한 재봉틀이야

─ 박성현, 「서핑보드」의 첫 문장     



이 시는 아케이드를 산책하는 연인의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위의 문장은 애인이 백화점 쇼윈도에 전시된 ‘야곱의 사다리’를 보면서 상대방에게 건내는 말이다. 사실 그것은 “흰 바탕에 파란색 격자무늬가 덧칠된 서핑보드였”고, “머리가 잘린 검정 마네킹의 오른손에 살짝 걸려 있었다.” 이 말을 들은 애인은 이윽고 “우울한 오렌지야”라고 되받는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무미건조한 대화일 뿐이지만, 이 덧없음은 우리 일상의 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한편, 서간체로 구성된 시도 있다. 서간체는 편지글의 형식으로, 적재적소에 활용하면 뜻밖의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 임화, 「우리 오빠와 화로」의 첫 문장25)      



우리 시문학에서 대표적인 서간체 시를 꼽으라면, 단연 임화의 「우리 오빠와 화로(火爐)」다. 그만큼 문학사적으로 비중이 크다는 말인데, 이 시는 1928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당시 새로운 형식과 프로시(경향시)의 모범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내용은 노동운동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간 오빠에게 남동생과 자신의 생활, 오빠의 동지들이 어떻게 삶을 실천하고 있는지를 전한다. 오빠의 거북무늬 질화로가 깨졌다는 위기감이 첫 문장부터 노출되고 있으며, 이를 의식하듯 시는 망설임 없이 곧바로 절정으로 치닫는다. 미지근하게 주제를 풀어놓지 않고, 처음부터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도록 시인은 의도적으로 문장을 배치한 것인데, 물론, 이러한 긴장을 마지막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표현하고자 하는 바와 전달하는 내용이 일치해야 한다는 사실주의의 본질 때문이다.                          

12


첫 문장은 대체로 위와 같은 유형으로 전개된다. 요약하면, 인용구, 자기 고백, 상징적인 선언과 아포리즘・질문의 형식, 연인을 향한 편지, 간결한 묘사와 대화 등이 첫 문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유형이 전부는 아니며 얼마든지 다른 형식이 존재한다. 게다가 이 분류는 사후적(事後的)이므로 결코 절대화할 수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               




(12) 박성현, 「춘자들」, 『유쾌한 회전목마의 서랍』, 문예중앙, 2018, 62쪽.

(13) 이성복, 『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사, 2013, 131쪽.

(14) 이성복, 위의 책, 65쪽

(15) 이성복, 위의 책, 67쪽

(16) 이성복, 위의 책, 113쪽

(17) 보들레르, 윤영애 옮김, 『파리의 우울』, 민음사, 2008, 45쪽. ‘키마이라’는 사자의 머리, 양의 몸, 용의 꼬리를 가진, 그리스 신화의 상상적 짐승이다.

(18) 안도현, 『그리운 여우』, 창작과비평사, 1997, 30쪽.

(19)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문학과지성사, 1983, 28쪽.

(20) 네이버 국어사전 ‘초토’ 참고

(21) D. H. 로렌스, 정종화 옮김, 『피아노』, 민음사, 1995, 18쪽.

(22) 폴 발레리, 박은수 옮김, 『발레리 시전집』, 민음사, 1987, 114쪽

(23) 김남주, 『나의 칼 나의 피』, 인동, 1987, 22쪽.

(24) 이해존, 『이물감』, 시인수첩시인선, 2023, 36쪽.

(25) 임화, 『임화전집 1』, 박이정, 2000, 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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