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성현 Feb 16. 2024

나르시소스의 첫 문장

제3장 첫 문장, 그 지독한 불면

나르시소스의 첫 문장




거듭 강조하거니와 무엇을 쓸지, 그 대상이 정해졌다면 망설임 없이 첫 문장을 쓰는 게 좋다. 왜냐하면, 첫 문장에 대해 너무 많은 고민을 하면 그 무게와 날카로움에 상처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첫 문장이란 괄호를 쳤던 그 대상이 나에게 거는 말을 옮겨 적는 일이다. 요컨대, 나는 나르시소스처럼 ‘나’를 그리워하고 자세히,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집요하게 들어왔던 ‘나’의 말이라는 것. 그(혹은 ‘나’)의 속삭임, 한숨, 비명이 ‘말’로서 변환되는 순간은 에포케의 시작이다. 


이제 당신은 어느 정도 대상의 괄호 치기에 익숙해졌으리라. 이것의 핵심은 세계를 낯설게 보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자동화된 것, 가령 심장박동처럼 너무나도 익숙한 현상에 대해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인지하지 않는다. 일상에서 박동을 듣고 안도하거나 기뻐하는 사람은 심장에 문제가 있는 사람이다. 예술이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것은 이 ‘자동화된’ 사태─한없이 지루하고 무기력한─다. 예술은 이를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혹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는 황무지로 간주하는데, 바꿔 말하면 예술은 낯설게 하기로서 세계를 생동감 넘치게 만드는 작업이다. 

시도 정확히 여기에 포함된다. 다만, 다른 예술 장르들과의 차이는 그 질료에 있다. 문제는 낯설게 하기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독이 될 때가 많다는 것. 특히 시는 간결한 언어로 세계를 압축적으로 그려내야 하기 때문에 첫 문장부터 강렬한 충격주기를 시도하는 창작자들이 많다. 


게다가 사람들은 첫 문장이 작품 전체를 이끄는 동력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기에 할 수 있으면 연료를 가득 채우려 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첫 문장이 강렬하면 그만큼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을 수 있고, 작품의 주제와 디테일도 충분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작품에 대한 자기-확신을 높일 수 있다. 시는 언어로서 열린다. 따라서 시인이 작품에 닿는 길은 오로지 ‘언어’다.      


                                                                *     


하지만 강렬한 첫 문장이 성공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다─“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 라일락꽃을 피우며, 추억과 / 욕망을 섞으며, 봄비로 / 생기 없는 뿌리를 깨운다.”는 T.S. 엘리엇의 「황무지」를 보라. 반대로 잘못 사용되면 작품을 더 지루하고 무기력하게 만들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시는 첫 문장뿐만 아니라 모든 문장이 (행과 연 하나하나가) 중요해서 그 강도(强度)가 균질해야 하기 때문이다. 첫 문장부터 강렬한 충격 주기가 시도되면 이후의 문장들은 그 존재가 희미해져서 첫 문장을 배반할 우려가 있다. 난파된 작품을 손에 쥐기 싫다면, 첫 문장만큼은 가볍게 시작하는 것도 좋으리라. 


첫 문장에 관해 매우 설득력 있게 묘사한 소설이 있다. 주인공은 수년 전부터 책을 쓰기로 결심했는데 막상 시작하려다 보니 뜻밖의 난관에 부딪히고 만다. 첫 문장이 문제였다. 길지만 인용해본다.      



첫 문장, 그것이 문제였다. 수년 전부터 구상해왔던 책을 쓰기로 결심한 날, 굴드가 고민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백지를 앞에 놓고 완벽한 첫 문장을 찾느라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금방이라도 글을 써내려갈 듯이 끊임없이 만년필촉을 종이 위에 갖다대고 손목을 부드럽게 풀면서 척 글자의 획을 그어보려 했지만, 글을 시작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이 있을 거라는 확신 때문에 신경이 쓰여 매번 멈추고 말았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것은 바로 그 첫 문장에서 비롯될 것이고, 따라서 첫 문장을 잘못 시작했다가는 책 전체가 망가져버릴 게 틀림없었다. 첫 문장은 든든한 바위여야 했고, 모든 것을 그 위에 안전하게 구축해나갈 수 있는 견고한 화강암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완벽에 도달할 때까지 첫 문장을 갈고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베르나르 키리니,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중에서 11)    



주인공은 근심에 싸인다. 첫 문장은 완벽해야 한다는 지론 때문이다. 그가 앞으로 써나가게 될 모든 문장들이 거기서 비롯될 것이고, 잘못 썼다가는 책 전체가 망가질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지나치다. 때문에 “첫 문장은 든든한 바위여야” 한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서 다른 문장들은 견고하게 구축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집착은 책을 미완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굴드는 선배 문인들의 취한 첫 문장 쓰기의 다양한 방법을 연구한 끝에 첫 문장을 생략한 채 두 번째 문장으로 대신하는 묘책을 쓴다. 이 경우 독자의 입장에서는 <일러두기>가 첫 문장이 되므로 소용없는 짓이다. 


그런데 굴드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시의 첫 문장을 쓸 때 긴장하며 망설이는 내 모습이 보이고, 내 의식 어딘가를 장악하고 있는 첫 문장에 대한 집요한 고집덩어리도 보인다. 확실히 첫 문장의 흡입력은 막중하다. 그러니 창작자들이 첫 문장 쓰기에 집중하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완벽한 첫 문장,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






(11) 베르나르 키리니, 윤미연 옮김, 『첫 문장 못 쓰는 남자』, 문학동네, 2012, 9-10쪽.



    

이전 12화 제3장 첫 문장, 그 지독한 불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