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그 달빛 황홀경 앞에서

제1장 시 창작 단상

by 박성현



소설의 정신은 연속의 정신이다. 모든 소설은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소설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정신은 현재에만 고정되었다. 이 현재는 너무 넓고 방대해서 우리의 지평에서 과거를 몰아내고 시간을 현재의 순간만으로 축소해 버린다. 이 같은 체계에 휩쓸린 소설은 더 이상 작품(영속하게 하는 것, 과거를 미래에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시사적인 사건이며, 내일 없는 몸짓일 뿐이다.3)


위 글은 밀란 쿤데라가 쓴 『소설의 기술』 일부분이다. 여기서 그는 당대 서구의 소설을 통찰하는데, 지금의 소설이 과거를 미래에 결합하지 않고,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는 (구조와 사건, 소재가 엇비슷한 일종의 장르 문학과 같은) ‘내일 없는 몸짓’에 불과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요컨대, 소설이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의 장엄한 연속을 반영하지 않고 오로지 현재의 순간으로 축소해 버렸으므로, 과거의 권위와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고, 또한 거의 모든 산문이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되면서 소설의 정체성에도 심각한 훼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소설이 ‘소설’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당대’라는 한정된 시간에 집중하면서도 그것의 역사적 추이와 방향, 시대적 분위기와 인물들의 전형적인 행위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파생하는 주제의 엄밀성을 잃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설은 소설에 앞선 인간의 모든 체험을 전형의 형식으로 담고 있어야 하는데 지금의 소설은 덧없는 가십, 신변잡기적 이야기 더미에 불과하다고도 꼬집는다.

확실히 소설에 대한 밀란 쿤데라의 진단은 소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시로 바꿔 읽어도 의미는 퇴색되지 않는다. 시의 정신이 ‘연속의 정신’이고, 모든 시는 그에 앞선 작품들에 대한 ‘대답’이며, 시에 앞선 모든 체험을 담고 있다는 것. 물론 시는 소설보다 언어 자체에 더 기울어져 있고, 훨씬 더 민감하지만(그렇지 않은 문학 장르가 있을까, 단지 밀도의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언어’에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시는 언어가 세계와 맞닿은 지점이자 경계이며 울타리다. 다만 두 장르간 차이가 있다면, 소설은 세계의 관점에서 언어를 바라보고, 시는 언어의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이다. 전자는 언어가 묘사한 세계가 얼마나 질서정연하고 투명한가에, 후자는 세계에 개진된 언어가 얼마나 급진적이고 파괴적인가에 그 방점이 찍힌다.

따라서 지향으로서의 시작법은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시작법은 시가 존재해 왔던 개별 사건의 총합이고 시를 썼던 시인의 수보다 더 많지만, 그래서 세련된 문장으로 개념화하고, 정교하게 정의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확실히 시 창작이란 시인에게 허락된 고유하고 유일무이한 작업(prosess)으로서, 자기 자신 외에는 누구의 방문도 허락하지 않고 때로는 시인 자신도 그 미로에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 시는 목각인형 같은 ‘달빛의 황홀경’으로서 시인의 내면에서 자생한다. 우리는 그 빛의 무리들을 따라 읽어가면서 세계에 대한 자기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만들어 나간다. 이 ‘사유’와 ‘감각’은 시인 자신만의 것인 동시에 공통 감각으로 확장되면서 공동체 속으로 깃든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를 읽어보자.


왜냐하면 사물들의 유일한 숨은 의미는

그것들에 아무런 숨은 의미도 없다는 것이니까.

그 어떤 이상함들보다,

그러니까 모든 시인들의 꿈들과

모든 철학자들의 생각보다 이상한 것은,

사물들이 정말로 보이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

그리고 이해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래. 이것들이 내 감각들이 혼자서 배운 것들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존재를 지닌다.

사물들의 유일한 숨은 의미는 사물들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양 떼를 지키는 사람」 부분4)


위 문장은 사물이 이데아의 그림자라고 말했던 플라톤과는 정반대다. 눈에 보이는 것이 사물의 전부이며 내부를 아무리 뒤적여도 본질에 해당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고 시인은 노래한다. “사물의 유일한 숨은 의미는 / 그것들에 아무런 숨은 의미도 없다는 것”이므로, 또한 “사물들이 정말로 보이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므로, “사물의 유일한 숨은 의미는 사물들이”라는 것이므로!

이러한 깨달음 혹은 직관은 페소아 시인의 모든 문장에 스며들어 시 쓰기의 막강한 힘으로 작용하면서, 작품 생산의 내적 동력으로 고양된다. 그는 이것들이 “내 감각들이 혼자서 배운 것들이다”고 고백한다. 다른 사람들의 감각을 통해 배운 것이 아닌,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세계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와 관련해, 안토니오 타부키는 페소아와 그의 또 다른 자아 카에이루의 대화를 기록한다(물론 상상속이다).


난 당신의 가장 깊은 부분입니다. 카에이루가 말했다. 당신의 어두운 부분이지요. 이것 때문에 난 당신의 선생입니다.

근처 마을에서 종이 몇 번 울렸다.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페소아가 물었다.

내 목소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카에이루가 말했다. 밤을 세우거나 잠을 잘 때 내 목소리를 들을 텐데, 때로는 흐트러져 들릴 것이고, 때로는 듣고 싶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들어야만 하고, 이 목소리를 들을 용기를 가져야만 할 겁니다. 위대한 시인이기를 원한다면 말이요.5)


자신의 내면에서 울리는 목소리를 따라가는 것─이는 신적이거나 불가해한 일은 아니다. 조금만 귀 기울인다면, 심장 가까운 곳에서 ‘나’에게 말을 거는 어떤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지금 눈을 감고, 그 목소리가 울리는 방향과 무게를 가늠해보자. 당연하지만 이것이 20세기 시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던 페소아 시인의 놀라운 작법의 요체다. 바로 여기에 페소아 시작법의 비밀이 숨어 있다. 거듭 말하거니와, 시작법이란 시인이 혼자 겪었던, 혹은 고통스럽게 감내해야야 했던 모든 시간들의 압축이며, 그 경험 가운데 가장 매혹적이고 현기증 나는 사건의 집합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인의 개인적 경험이 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경험은 작품과 그의 말, 행위에 기록되며 모국어에 깃들고 공동체에 각인된다. 우리가 시작법의 보편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시인의 생산한 시가 무수히 많은 개인과 세대를 거치면서 거대한 연쇄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시은 다른 사람들의 언어(혹은 언어-활동)에 실로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시는 독자를 통해 확장되고 방사되며 다시 언어-속-으로 들어간다.


*


밀란 쿤데라나 페르난두 페소아 모두 자기 자신만의 독특한 작법을 갖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는 그들의 작품들은 그 작법의 결과라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물론 우리가 작가의 내면에 들어가 작법의 실체와 현상들을 정확히 이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작가 자신도 자신의 작법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작법은 있다. 시인의 언어가 독자라는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며, 공동체의 정신에 각인될 때 ‘언어’와 ‘작법’은 교감하기 시작한다.여기서 우리는 두 번째 고찰을 이끌어낼 수 있다.


[고찰②] 시작법은 있다. 그것은 작가가 공동체의 감각과 사유로 확장되는 지점에 존재한다.



3) 밀란 쿤데라, 권오룡 옮김, 『소설의 기술』, 밀란 쿤데라 전집 11, 민음사, 2013, 34쪽.

4)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민음사, 2018, 81쪽.

5) 안토니오 타부키, 박상진 옮김, 『꿈의 꿈』(선집1), 문학동네, 2013, 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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