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공과 시 쓰기의 시차(視差)

제1장 시 창작 단상

by 박성현

오래전부터 드는 생각: 과연 시의 언어란 무엇일까. 그것은 개별 실체로서 존재할까. 시 쓰기가 시인의 편차로서 존재한다면, 당연히 시의 언어도 그러할 것이다. 시 쓰기는 이 편차의 완성을 향한 끊임없는 도정이다. 대목장이 나무를 바라보는 시선과 이제 막 목수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넘기 힘든 벽이 있는 것처럼, 언어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한 사람과 시인들의 시선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숙련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목공과 언어를 다루는 창작에는 건너기 힘든 시차(視差)가 있기 때문이다.

시 쓰기는 언어에 대한 응시에서 출발하며, 이 ‘응시’는 목공에서 요구되는 숙련과는 다르다. 혜능 선사가 금강경 독송을 듣고 단번에 깨달음에 이른 것 같은, 그런 선불교적 요소가 시에 존재한다. 시에는 규칙과 정답이 없으므로 시인의 감각과 사유, 직관이 전부다. 그래서인지 시인이나 평론가나 할 것 없이 규범화된 ‘시작법은 없다’고 말을 한다. 작가가 작품을 생산하고 발표하기까지 겪어야 했던 숱한 경험들은 결코 보편적이지도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문장은 작가라는 존재와 관련된, 창작의 유일무이성을 겨냥한다.

때문에 ‘시작법은 없다’는 문장은, 작법이란 마치 수학이나 물리학의 공식처럼 인간에게 공통으로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하며, 만일 작법이 있다면 그것은 ‘작가의 개별 경험이다’라는 부가 개념이 뒤따라야 한다. 어쩌면 우리는 위 문장에 이런 조건을 달아야 할지 모른다: 시작법은 없다. 다만, 시인 개인의 경험만 있다.

무슨 말일까? 글쓰기에는 창작 주체가 있고, 그/그녀가 생산한 작품이 있는 법이며, 시작법이란 주체가 작품을 내놓기까지 경험했던 숱한 과정들을 보편화(혹은 ‘일반화’)한 것인데, ‘시작법은 없다’는 문장은 성립될 수 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도서관에 가면 가지런히 진열된 시 창작 관련 작법 책들은 허울이나 농담에 불과한 것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당대에 막중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수많은 작법─이를테면, 이태준 소설가의 『문장강화』나 오규원 시인의 『현대시작법』은 물론이고,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 리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의 기술』, 실비 제르맹의 『페르소나주』 등은 한낱 작가 개인의 넋두리나 헛소리에 불과한 것일까?

시 쓰기를 시작하는 예비 시인들은 반드시 이 이율배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작법을 믿으면 안 되며, 또한 그것이 ‘나’의 시 쓰기를 한층 고양시킬 것이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작법은, 간단히 말해 일종의 회고록이다. 나의 시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식으로 ‘시’라는 장르에 속할 수 있는지, 또한 (자신이 생각하기에) 독자들이 ‘내’ 시의 어떤 측면에 감동하는 것인지를 가볍게 서술하는, 그러나 무척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사진첩 혹은 비디오테이프다.


[고찰①] 시작법은 없다. 다만, 작가 개인의 경험만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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