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시 창작 단상
시 쓰기란 무엇보다 견디는 일이다. 나에게 찾아오는 그 모든 비애를, 그것이 온전한 내 것으로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일이다. 누룩을 넣어 빗어 발효시킨 빵이 그 맛을 찾을 수 있듯, 숙성의 시간을 거친 문장은 시인의 피와 살과 뼈를 제대로 우린 진한 사골 같다. 시는 견딤의 미학이다. 순간적으로 튀어나온 문장이라도, 그 ‘문장’이 나오기까지 시인의 기다림은 우주의 시간과 맞먹는다.
시인은 길을 걸으면서도, 극장이나 카페에 앉아 있을 때도 행려병자처럼 중얼거리면서 뭔가를 쓴다. 그의 메모지는 반듯하지만 군데군데 흘려 쓴 문장들로 가득하다. 방금 떠오른, 혹은 머릿속에 저장해둔 글귀를 메모하면서 그는 순간 그때의 기억 속에 들어간다. ‘이동’의 완성이라는, 철새의 불가사의한 목적처럼, 그는 오랫동안 자세하고 생생한 지도를 그리면서 그 ‘경로’를 가늠한다. 그러므로 ‘견딤’은 시인의 구상을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시간이다. 기억이라는 진창에서 잃어버렸던 반지를 발견하듯,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유년의 ‘다락방’을 발견하듯 한없이 즐거운 일이다.
그가 맡았던 냄새, 불편한 소리, 소름 끼치는 촉각이 그 ‘견딤’의 언저리를 서성인다. 그는 가로등처럼 우두커니 지켜보다가 참았던 숨을 내쉰다. 회반죽처럼 희멀건한 한밤중의 빛과 어둠을 가로지르는 회색의 모호한 시선은 책상에 놓인 메모지다. 그는 한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홀린듯 뭔가를 쓰기 시작한다. 시 쓰기란 그런 것이다. 아무리 다가가려 해도 닿을 수 없는 ‘신기루’일지 모르겠지만 사막을 건너는 일 자체가 이동의 완성이 아닐까.
나의 생명은
한 권의 노트
가격을 정할 수 없는 한 권의 노트
(무기물에서의 연속과
대우주의 공백과)
─ 다니카와 슌타로, 「나는」 부분2)
나는 내 글의 이름을 ‘시 창작 노트’로 명명한다. 나의 생명이 향한, 나의 우주와 수줍은 일상과 언어가 향한. 나의 시간에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나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구원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니카와 슌타로의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그러나 멋지고 밝은 장정이 새겨진 노트처럼 나의 수줍은 일상은 속박된 모든 것들에서 멀어질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융해된 유일한 장소는 바로 언어다. 녹아 있으므로 그것은 제3의 형태로 존재한다. 언어는 사물이 아니므로 사물에 닿지 못한다. 언어는 사물의 부재다. 다만 언어와 사물은 꿈을 통해 서로를 공유한다. 언어는 사물의 꿈을 부유하며, 사물은 언어의 꿈을 산다. 이처럼 시 쓰기란 언어 속에 융해된 사물의 부재와 꿈을 그려내는 일이다.
2) 다니카와 슌타로, 김응교 옮김, 『이십억광년의 고독』(시선집), 문학과지성사,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