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시 창작 단상
한밤중에 눈을 뜨고, 습관대로 컴퓨터를 켰다. 간신히 온몸의 폐허를 버틴 사람에게 숲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바람에 묻은 냄새만으로도 또 한 생(生)을 열 힘을 얻는다. 물은 중력에 이끌리며 아래로 흐르고, 빛이란 어둠이 남아 있는 한 다시 타오른다. 전류가 감돌기 시작한 회로의, 다소 날카롭고 신경질적인 기계음이 들린다. 회로를 닫았지만 ‘오늘’이라는 새로운 문이 열렸으므로 저 기계 소리에도 ‘깨어 있다’는 안도와 환희가 묻어 있을 것이다.
나는 창을 연다. 방 안을 가득 메웠던 빛의 더미가 창밖으로 빠져나가면서 주위를 묽게 만든다. 어둠의 그 텅 빈 검정은 몰려드는 빛에 본능적으로 한발 물러선다. 아직은 겨울이 다가오지 않아서─지금은 9월이다, 차고 무거운 바람은 없다. 연일 폭염에 시달리는 대기라 회반죽처럼 미지근하다. 어둠 저편에서 기묘하리만큼 밝은 어둠을 그으며 새가 날아갔다.
그러나 빛이 약해질수록 지상의 사물들이 이런 검정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어둠은 모든 색을 닫고 있다. 그 어둠을 부유하면서 나는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이제 막 눈을 뜨는 사물들의 순한 표정일까. 빛에 의해 꺼져가는 어둠의 가녀린 심장일까. 아니면 누군가 마침표를 찍어주길 바라는, 박명의 언어일까. 어쨌든 바람은 불어오고 구름은 흩어지며 사람들은 길을 따라 부지런히 움직인다.
갑자기 드는 생각: 언어는 세계를 완성하지 않으므로, 시는 새로운 맥락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나는 어둠처럼 사물에 덧씌워진 언어들을 한 겹 한 겹 벗겨낸다. 검정 외투를 벗겨내면 그 속에 새로운 생명이 박혀 있다는 듯 시 쓰기는 어쩌면 죽음에 대한 인간의 가장 오래된 복수가 아닐까.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도 시 쓰기를 죽음에 대한 저항으로 말했다: “쓰는 즐거움. / 지속의 가능성. /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소멸해가는 손의 또 다른 보복.”
그때 맞은편 아파트 옥상 위로 태양이 떠올랐다. 마치 깊은 바다 중간층에 자리잡은 거대한 기포처럼 검은색 한 가운데 박힌 태양. 그러나 그것은, 어둠을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오랜 연인처럼 껴안다. 빛 속에 자라는 어둠 혹은 어둠이 펼치는 빛이다. 시의 언어는 사물에 내재한 모순을 대칭한다. 빛과 어둠의 놀라운 대칭을 통해 야누스의 두 방향을, 그 철저한 이중성을 시는 직관한다. 사람들은 모두 원초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믿음 때문인지, 밤과 태양의 동시성이 무척 친근하게 보였다. 어쩌면 시를 쓴다는 것은 ‘나’를 방사하는 원형을 끄집어내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벚나무 아래 나무의자에는 녹지 않은 눈이 가득했다
─ 박성현, 「우체국」부분
는 문장의 ‘녹지 않는 눈’과 같은 그 방사형의 원형 말이다. 비로소 나는 금요일이다. 한밤중이고 오늘은 군더더기가 없는 맑고 투명한 하루가 펼쳐질 것인지 호흡과 손가락이 가볍다.
1)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최성은 옮김, 『끝과 시작』, 문학과지성사, 2007, 1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