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기억에 저항하는 시

제3장 시와 기억

by 박성현

기억을 소환하는 주체는 과연 누구일까. ‘나’의 의지와 힘으로 기억은 소환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기억은 다름 아닌 ‘나’에 의해서만 펼쳐지기 때문이다(누구든 타자의 기억에 접근할 수 없다). 하지만 뭔가 불편하다. 기억은 누군가 강제로 불러와서 분류하고 편집하면서 계열별로 정렬하는 것이 아니다. 기억은 무작위로 돌출한다. 언어의 외투를 걸친 우연의 더미다. 끊임없이 가지를 치며, 샛길을 만들고 어떻게 해서든 주류에서 빠져나간다. 마치 주먹 속의 모래처럼 정처 없다.

‘나’는 기억을 소환한다고 믿는다. 의식이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므로, 기억 또한 그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기억은 의식과는 달리 출구 없는 미로다. 대놓고 폐쇄적이다. 그것의 없음, 혹은 ‘상실’에 대한 절대적인 표시이다. 기억은 현실과 분리된 언어로, 어떤 사물이나 존재의 오염된 이미지다. 투명한 물컵에 담긴 티스푼처럼 기억-속-에서 선과 모양은 굴절된다. 기억은 결코 순수하게 이끌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억을 소환하는 주체는 ‘언어’다. ‘나’는 언어가 소환 작업을 하는 공장이며, 그 ‘공장’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기계다.

‘내 것’이라 믿었던 기억은 애초부터 ‘언어의 것’이다. 언어가 기억을 불러오고 나는 그것을 스크린에 상영한다. 만일 그렇다면 기억이 편집되고 왜곡되는 일은 특이한 것이 아니다. 언어의 자장에서, 그 문자들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나’와는 상관없이 기억을 공유한다. 그 언어들은 물을 찾는 뿌리처럼 숱한 길을 낸다. 스스로 움직이고 알아보며 스며든다. 그것은 ‘나’에게 깃들어 있는 의지나 책임, 판단과 연대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거기에 있으면서 ‘나’를 고요히 바라본다. 마치 살아 있는 인형처럼. 카프카는 이렇게 썼다.


이제부터 대략 새벽 5시까지, 밤새도록, 비록 잠이 든다 해도 너무나 강력한 꿈에 사로잡힌 나머지 동시에 의식이 깨어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가 계속된다. (중략) 5시 무렵, 최후의 잠 한 조각까지도 모두 소진되어 버리고 나면, 그때부터는 오직 꿈을 꿀 뿐이다. 그것은 깨어 있는 것보다 더욱 힘들다. (중략) 잠에서 깨어나면 모든 꿈들이 내 주변에 모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꿈들을 기억해내지 않으려 애쓴다.24)


카프카는 일기에 기록한 것처럼, 며칠이고 잠에 들지 못하고 혼몽한 상태에서 이미지들이 폭발하는, 기억의 소용돌이를 경험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오히려 자동인형이 된 듯, 그는 기억의 무질서한 파편을 지켜볼 뿐이다. 하지만 카프카는 ‘그 꿈들을 기억하지 않으려고 한다’고 고백한다. 잠의 기억이 꿈이라면, 그는 어떤 의미로는 그 기억에 저항하는 것이다. 기억에 내장된 달콤하면서도 쓰디쓴 상반된 표정에 대해 그는 거리를 두었으며 섬세하게 다듬으면서 결국 성공한다.

따라서 시가 기억에 저항한다는 말은 기억에 자리잡은 야누스의 두 얼굴에 저항한다는 얘기가 된다. 기억이 사물에 새겨진 언어의 문신이라면 시는 기억에 저항함으로써 언어에 맞서는 실존의 문신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파울 첼란이 말한 ‘절반의 밤’의 속뜻일 것이다.25) 그런데 저항함으로써 시인이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의 도서관에 책 한 권 더 꽂는 일일 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하나의 무한-기억을 다른 무한-기억을 연결하는 분명한 교각이 된다.

막스 피카르트는 그의 주저 『인간과 말』에 훨덜린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그가 인용한 시인의 문장은 다음과 같다: “그리하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 위험한 존재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 창조하고, 파괴하고, 멸망으로 치닫다가, / 다시 영원한 어머니이자 최고의 명장인 / 자연에게로 되돌아올 수 있도록, / 자연으로부터 무한한 신성, 모든 것을 포용하는 / 그 사랑을 상속받고 배운 자로서, / 자기 자신을 증명하고 생성할 수 있도록”26)

피카르트가 인용한 시인의 문장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심급이다. 언어는 단지 우리가 자신의 뜻을 밝히면서 타자와 소통하는 도구적 성격을 넘어선다. 시인이 선언하듯, 언어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 위험하다. 그것은 세계를 창조하고 파괴하고 멸망시키면서 인간을 끊임없이 자연으로 되돌려놓는 신적인 존재다. 언어는 내가 사용하기 이전에 이미 주어져 있으며, ‘나’의 의지와 결심, 책임과 판단과는 상관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인간은 언어를 소유할 수 없다. 언어 속에 침잠하고, 그 늪으로부터 약간의 열매를 채취할 뿐이다. 예전에는 언어가 인간을 체험했지만, 이제는 인간이 언어를 체험한다.27) 때문에 오늘날의 언어는 하나의 거대한 ‘코스모스’다. 빅뱅과 더불어 시작된 끝없는 팽창이며, 결코 소진될 수 없는 우주의 의지다.

여기서 우리는 시 쓰기와 관련해서 사소하면서도 본질적인, 그 대답에 따라 시의 성공 여부가 관철되는 질문을 마주해야 한다: 시에 최적화된 언어가 있을까? 다시 말해 ‘시의 언어는 모국어와는 따로 존재할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다. 시의 언어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쓰는 일상어가 시의 언어다. 다만, 그 일상어를 시라는 특수한 시스템에서 발화(發話)된 언어를 우리는 ‘시의 언어’라 부르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시는 자신의 표현-질료로서 언어는 물론이고 언어가 아닌 것까지 수용한다. 시는 ‘문자’들만의 놀이터아 아니며, 시인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오는 일기장도 아니다. 시의 ‘언어’란, 경계가 없는, 망망대해에 무작위로 쏟아지는 햇빛이나 무질서하게 떨어지는 폭우와도 같다. 비-언어마저 포획해버리는, 이 정의할 수 없는 ‘언어’의 놀라운 융해력(融解力)는 시가 아닌 것조차 시로 끌어당긴다.




24) 프란츠 카프카, 배수아 옮김, 『꿈』, 워크롬 프레스, 2014, 27쪽.

25) 파울 첼란, 앞의 책, 45쪽 참고

26) 막스 피카르트, 배수아 옮김, 『인간과 말』, 봄날의 책, 2013, 7쪽.

27) 막스 피카르트, 앞의 책, 29쪽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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