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소환하는 기억

제3장 시와 기억

by 박성현

시에서 기억을 소환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저장된 이미지 그 자체를 불러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예 그 이미지를 분해하여 흐릿하게 만든 채 호명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미지-들을 산발적으로 솟아오르게 하면서, 이미지를 겹쳐 전혀 새로운 색감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각각의 방법에 ‘배치’라는 ‘편집 과정’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흩어진 문장 혹은 영상-이미지들을 의미가 명징한 서사로 통일하거나 의미 생성이 불가능하도록 배치하는 작업은 모든 예술의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첫 번째는 통상 사실주의적 서정시나 미래파(소련)의 시에서 흔히 보이고, 두 번째는 상징주의나 이미지즘 등과 같은 비교적 온건한 모더니즘에서, 그리고 세 번째는 아방가르드로 통칭되는 쉬르레알리즘이나 다다이즘 등에서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지금은 시간의 커튼에 가려진 채 한때 유행하던 사조 정도로 퇴색되었지만, 이들이 문학에 끼친 영향력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다.

기억의 소환이 문학사조와 맞물릴 수 있다는 말은 가정이다. 그러나 창작에 막중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하다. 소환이란 과거를 단순히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감각과 사유가 녹아내리는 순간들의 집적이자 그 표현이기 때문이다. 머릿속을 부유하듯 떠도는 생각들, 무작위로 솟아오르는 이미지의 나열이 아니라, 내가 지금-여기에서 집중하는 무언가에 대한 고도의 섬세하고 정교한 형상들의 흐름이라는 말이다. 소환은, 말하자면 이제 막 촬영을 마친 시퀀스의 1차 편집본인 셈이다. 에즈라 파운드의 「지하철역에서」(1916)와 같은 작품들은. 그가 경험하고 저장했던 시간과 장소들에 대한 오마주가 아닌가. 그는 그 지하철 역의 비인간적이고 무척 쓸쓸한 풍경을 다음과 같이 포착한다.


군중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얼굴들 ;

축축한 검은 나뭇가지의 꽃잎들.

─ 에즈라 파운드, 「지하철역에서」 전문22)


앞서 나는 시 쓰기를, 자기-표현의 문장으로, 그리고 기억을 소환해 그것을 지우는 과정으로 간략하게 소개했다. 이것은 시 쓰기를 통해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온갖 매혹과 환희, 기쁨, 열락 등이 생략된, 어찌 보면 바싹 마른 장작 정도로 축소한 소개일 뿐이다. 자기-표현의 예술 장르가 그렇듯, 시도 ‘나’의 내면에 켜켜이 쌓인 어두운 기억과의 대면 과정을 반드시 수행한다. 밝고 따뜻하고 선명한 기억들을 마주할 때와는 달리 어둠의 터널로 진입하는 것은 느리고 장중하며 엄숙하다. 그것을 농담으로 희화시키면서 기억을 기억으로써 덧칠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에도 나는 ‘나’에게 삼투하고 ‘나’를 끄집어낸다. 그렇다. 기억은 망각 속에서 더욱 견고해진다. 지우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하며 특히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그것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이와 관련해 안토니오 타부키는 한 가지 흥미로운 말을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실 돌이켜보는 한에서는, 냄새라든가 색깔이라든가, 세면대 밑에 보이는 종을 알 수 없는 곤충과 같이 직접적인 육체적 감각이 어느 정도 여과되고 나면, 경험은 모호해져서 한껏 더 나은 이미지로 남게 마련이다. 지나간 현실은 늘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은 법이다. 기억은 가공할 만한 위조자인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왜곡은 거듭 일어난다.23)


기억은, 타부키의 말 그대로 원 장면을 그대로 상영하지 않는다. 사후적(事後的)이겠지만─기억은 그 자체로 사후적이다─, 기억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정제(精製) 현상이 일어난다. 그것이 무의식의 자기방어든, 사람의 기질에 따른 것이든 왜곡은 어쩔 수 없다. 의식 세계에서 온전히 원 장면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어쩌면 이것이 시 쓰기에서 기억을 원재료로 삼아도 기억에 저항해야 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따라서 시 쓰는 사람은 기억의 상자를 여는데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가 쓸 작품은 이미 그 상자 속에서 무르익고 언제든지 소환되기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황홀하고 근사한, 쓴맛은 전혀 없는 달콤한 기억들은 모두 가짜다. 그것은 ‘나’의 덧칠로 오염된 장면이다. 그렇다고 원 이미지를 이끌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답은 단순하다. 지금-여기서 떠오른 기억을 가공하지 않고─어차피 가공된 기억이니─, 초벌로 굽는 거다. 작품으로 다듬어지기 전에, 그것들을 시적인 것으로 만들라는 말이다. 이것이 기억이 관해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작업이다.

과연, 이 과정에서 기억을 소환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유년의 이미지를 시로 고양하는 ‘나’일까. 아니면 나의 기저(基底)라 할 수 있는 무의식의 까마득한 ‘심연’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의 현존을 증명하고 이해하며 해석하는 제3의 존재─‘언어’일까. 아마도 데카르트에 심취한 사람은 ‘나’를 고를 것이고, 프로이트나 라캉주의자들은 무의식의 ‘심연’을, 또한 하이데거를 신봉하는 사람은 ‘언어’로 기울 테지만.


[고찰⑥] 지금-여기서 떠오른 기억이 작품의 초벌이 된다.



22)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4900751

23) 안토니오 타부키, 박상진 옮김, 『인도 야상곡』(선집6), 문학동네, 2015,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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