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기, 마음을 지우다

제2장 시와 사물

by 박성현

철학자 김진영은 『아침의 피아노』에서 시적 형식을 빌려 흥미로운 아포리즘을 쓴다: “왜 기억하는가 / 그건 망각하기 위해서다. // 왜 쓰는가. / 그건 지우기 위해서다. // 왜 망각하고 지우려 하는가. / 그건 새로운 삶들을 기록하기 위해서다.”16) ‘기억’과 ‘망각’, ‘쓰기’와 ‘지우기’가 정확히 대칭되는 이 기묘한 문장의 뜻은 무엇일까. 철학자는 한발 더 나아가서는 기억과 쓰기의 통상적인 역할과 쓸모를 완전히 뒤집는다. 기억은 망각을 전제하고, 쓰기는 지움을 목적으로 한다면, 굳이 기억과 쓰기를 정교하고 섬세하게 다듬으려고 애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왜 기억과 망각이, 쓰기와 지움이 동일한 논리의 선분 위에 병립될 수 있을까. 이 관계는 모순으로, 하나의 시퀀스에 가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철학자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이것이 삶의 비의이자 신비라고까지 말한다. 지우기 위해서는 기억을 떠올려야 한다는 인과 때문일지 모르겠지만, 망각이란 인간이라면 대부분 꺼리고 두려워하는 병리적 현상인데 굳이 그것을 목적으로 삼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는 바로 여기서 철학자의 날카로운 변증법적 직관을 읽게 된다: 기억과 망각, 혹은 쓰기와 지움은 서로를 지양하며 새로운 삶으로 고양된다는 것.

릴케는 진정한 의미의 기억을, 머리에서 빠져나와, 기억을 변모시키는 이미지들로부터 멀어진 것이라 말한다. 이를 인용했던 파스칼 키냐르는 기억의 속성을 “서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쓰는 단어들의 양상과도 같다. 기억은 그것을 묻어 버리고 잊으려는 노력에서 시작되는 것이다.”17)라고 부연한다. 기억은 망각의 힘이고 또한 망각도 기억의 힘이다. 잊어버리려고 애를 쓸수록 기억은 더 막강해지고, 기억하려 할수록 점점 더 망각의 늪에 빠진다. 이것은 영화 <동사서독>의 ‘취생몽사’(醉生夢死)18)라는 술에 담긴 속뜻이기도 하다.

‘지움’을 위한 ‘쓰기’는 또 어떤가. 우리가 글을 쓰는 첫 번째 이유는 남기기 위해서다. 그 쓰기의 장르가 무엇이든 쓰기는 펜의 존재 이유다. 하지만 김진영은 이를 뒤집어서는 ‘쓰기’라는 ‘더함’(+)이 오히려 ‘빼기’(-)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삶의 조건이라고 선언한다: 시는 (끊임없이 부가되는) 기억의 총합이 아니라 극소량이며, 지우는 과정 곧 망각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완성된다. 우리는 시를 ‘빼기’의 문학이라 말하는데, 단 하나의 언어로 수천수만의 사건을 파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 어떠한 생(生)이든, 새로운 실존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이 살아온 생활의 내용과 형식을 정확히 이해하고 그것을 폐기하든 교정하든 해야 한다. 이해는 쓰기이고 쓰기는 지움이며 지움은 곧 도래할 순간들의 미래다. 우리는 왜 쓰는가. 쓰기 위해서. 하지만 그 쓰기는 ‘나’를 비롯한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기 위한 ‘망각’과 ‘지움’이다.


침묵은 끝끝내 말해질 수 없는 것

이번 생의 구원이라고 믿었던

헛된 문장들을 불태우고 나서

비로소 나를 숨 쉬는

— 오정국, 「침묵 피정」 부분19)


끝끝내 말해지지 않는 것이 바로 침묵, 곧 ‘지움’의 피정이다. 오정국 시인은 결코 말해질 수 없는 것에서 시의 새로운 ‘척추’를 이끌어낸다. 물론 그는 “이번 생의 구원이라고 믿었던” 헛된 문장들을 모조리 불태운 후에야 비로소 가능했으며, “비로소 나를 숨” 쉴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철학자의 아포리즘을 읽어보자. 오래도록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행간에서 단어 하나가 떠오르는 것을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제대로’라는 부사다. 제대로 망각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기억해야 하며, 제대로 지우기 위해서는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는, 우리에게 반드시 도래할 새로운 삶의 조건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의 단호한 어깨와 같은.


[고찰⑤] 시 쓰기는 ‘나’를 지우는 과정이다. 이 지워진 ‘마음’은 결국 새로운 삶에 닿는다.




16) 김진영, 『아침의 피아노』, 한겨레출판, 2018, 197쪽.

17) 파스칼 키냐르, 김유진 옮김, 『음악 혐오』, Franz, 2017, 91쪽.

18) 취생몽사의 원뜻은 다음과 같다: “술에 취한 듯 살다가 꿈을 꾸듯이 죽는다.” 한평생을 술 취한듯 흐리멍덩하게 살다가는 사람을 꼬집는 말이다. 그런데 양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서는 그 뉘앙스가 좀 다르다. 황약사는 사막에서 사는 구양봉을 일정 기간 방문해 그의 근황을 살핀다. 물론 그의 형수를 만나기 위한 구실일 뿐이지만, 황약사는 그의 형수에게 은밀히 알려준다. 그리고 형수는 병으로 죽기 전에 ‘취생몽사’라는 술을 황약사에게 건네고, 구양복에게 마시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한다. 이 술은 마시면 기억을 잃게 되는 묘한 술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 술을 마시지 않고 황약사만 마시게 되고, 그는 기억을 잃고 더 이상 구양봉을 찾지 않는다. 나중에 모든 사실을 안 구양봉이 ‘취생몽사’를 마시지만, 황약사와는 달리 연인을 잊지 못한다. 잊으려 할수록 기억은 더욱 또렷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이렇게 고백한다: “취생몽사는 그녀가 내게 던진 농담이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녀는 전에 늘 말했었다. 가질 수 없더라도 잊지는 말자고.”

19) 오정국, 『재의 얼굴로 지나가다』, 민음사, 2021.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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