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천사, 그 이중의 시선

제2장 시와 사물

by 박성현

1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이 말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줄기차게 들어왔던 말이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시대가 암묵적으로 인정해 온 사실이다. 시가 언어 예술인 이유는, 시는 언어가 이끌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이며 치명적이고 감동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한 편의 잘 직조된 시는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빨아들이고 그들의 사유와 감각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그렇지만 시에 장르서 이 말만큼 자동화된 것은 없을 듯하다. 왜 시는 언어 예술로 고양되고 정의되는 것일까.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다르게, 시가 확고부동한 예술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의 예술이 됨으로써, 시는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우리는 시를, 천재적인 예술가의 전유물로 간주하거나 내면의 깊은 울림보다는 ‘뭔가 있어 보이는’ 아름답고 세련되며 현란하기까지 한 언어로 이해한다. 이러한 언어는 시와는 전혀 상관없다. 그것은 ‘진실-말하기’가 아닌 소피스트의 자기-수사에 비견되는 착란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생래적으로 자기 자신의 ‘진실-말하기’다. 이 진실-말하기는 ‘파레시아’parrhesia의 번역어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억압과 핍박에 대한 두려움조차 돌려세우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는 ‘자기 고백’의 언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통열한 반성이며, 이를 통해 시인은 스스로를 ‘시’라는 하나의 명징한 조형물로 건축한다.

때문에 ‘진실-말하기’는 수사나 관용어가 아니며, 페르소나 뒤에 숨은 가면의 언어가 아니다. 이 같은 이유로 ‘진실-말하기’의 문장은 시가 향하는 대상에서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시선을 발견하고, 창조적으로 변형시킨다. 가장 순백의 ‘기억’을 뽑아내는, 마치 보석 세공사의 섬세한 손과 같다는 것. 이를테면, 그는 대상의 이면을 돋보기로 형광하며 동시에 그 미세한 움직임과 파편과 부스러기들을 끌어당긴다.


2


블랑쇼는 『문학의 공간』에서 문학을 “시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10) 행위로 명명한다. 문학이 문학으로서 성립되는 것은 텅 빈 시간, 공백의 시간이 그 내륙에 도사리고 있기 때이다. 안토니오 타부키도 드뷔시의 입을 빌려 시간의 부재를 음악의 본성으로 말한다. “시간은 멈춘 것 같았고, 음악은 이런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을 멈추게 하는 것.”11) 하지만 음악이나 시나 모두 시간을 근본으로 하여 공간을 변용하는 예술이다. 선율이나 언어는 시간의 연속적 흐름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랑쇼와 타부키는 예술을, ‘시간의 부재’로 접근한다. 무슨 이유일까?

여기서 잠시. 문학은 독자의 손에서 완성된다는 수용미학을 살펴보자. 확실히 문학의 완성은 작가가 완성한 작품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하다. 작품을 읽고 수용하는 독자가 있어야 ‘문학’이라는 삼각형이 완성된다. 우리가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작품을 써나가는 시간, 나아가 집필을 모두 마치고 작품을 인쇄하였을 때의 그 엄밀하고 구체적이며 생경한 시간과 만나는 것인데, 여기서 독자는 작가의 시간을 완전히 분해하고 자신의 시간으로 재구성한다. 이른바 작가의 시간은 독자의 지평에서 그 고유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신동엽의 서사시 『금강』를 읽으면서 우리는 녹두장군의 거친 숨결과 민중의 인간에 대한 사랑과 지배계급에 대한 처절한 항거, 그리고 좌절과 희망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그 영상-이미지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의 마음에 펼쳐진다. 그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동학농민전쟁을 다시 산다. 심지어는 독자에 의해 녹두장군의 시간이 재창조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12) 문학은 끝없이 되새겨지며, 이로써 문학 작품이 시간의 부재에 몸을 맡기는 행위의 결과라는 점은 자명해진다.

거듭 강조하지만, 문학은 (작가를 비롯한) 사물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는 시간이다. 물론 이 '시간'은 발화된 언어를 통해, 그리고 이미지라는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 주마등)의 광휘를 통해 만들어진 (과거와 현재, 미래가 기묘하게 서로를 투영하는) 고유하고 내밀한 시간이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자신만의 내력으로 (지금-여기의 세계와는 다른) 또 하나의 세계를 건축하게 되는데, 이때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존의 세계-이미지들은 이 ‘시간’을 통해 끝없이 유보되고 결국에는 융해된다. 블랑쇼의 말처럼, 문학이 ‘시간의 부재에 몸을 맡기는 행위’라면, 다시 말해 작품과 독자가 '작가'라는 존재의 매개 없이 직접 만나게 된다면, 작품의 모든 사태들(사건과 이미지 등)은 독자에 의해 고양될 수밖에 없다.

작품에서 시간은 부재한다. 작가의 시간은 물론이고 독자의 개입을 통해 형성되는 ‘독자의 시간’도 없다. 작품에 내재하는 시간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시간은 반드시 이해와 해석을 거치게 되며 이것은 독자의 시간에 종속된다. 따라서 문학에 있어서 ‘시간의 부재’란 오히려 ‘시간의 충만함’이라는 역설적 의미로 바뀐다. 마치 성별이 결정되기 직전의, 그 무한한 가능성을 충분히 간직한 ‘기관 없는 신체’13)(corps sans organe, 들뢰즈)가 바로 ‘부재’의 양태이며 문학이다. 따라서 시간의 부재는 문장의 아직 미분화 상태의 '주름'이며 여백과 행간을 포함하는 '도처'에 존재하면서, 그러한 이유로 문학은 언어 이전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갈림길에서 망설일 때에

이 길이나 저 길이나 같다 하였습니다

올라가는 길이

내려가는 길이기도 하였습니다

─ 김점용, 「천축사」 전문14)


우리는 이 시에서 온 우주가 흩어지면서도 집중되고 사라진 채 다시 나타나는 마법의 조각술을 읽게 된다. 자연과 신의 섭리는 삶과 죽음을 나누지 않았으며, 갈라져 전혀 다르게 보이는 ‘이 길’과 ‘저 길’ 또한 애초부터 한 데 뒤엉킨 동일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길에서 시간은 중심을 상실하며 마침내 시간의 다성(多聲)─무한으로 펼쳐지고, 무수한 의미로 미끄러지는─을 증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문학의 예술성이 무엇인지 가늠할 수 있다. ‘시간의 부재’를 통해 문학은 아직 펼쳐지지 않은 과거와 동시에 이미 펼쳐진 미래를 농축한다. 예술성이란 근본적으로 작품이 생명력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이며, 그것은 독자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작품의 개방성에 다름 아니다. 요컨대, 문학은 이 시간의 부재를 통해서만 예술적 실체로써 고양될 수 있다. 이것은 문학 작품은 작가 개인의 창조적 산물이 아니고, 독자를 비롯해 시대와 역사, 민족과의 적극적 소통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뜻을 내포한다. 독자의 존재만으로 문학은 무궁무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바, ‘시간의 부재’를 통해 독자의 지속적인 개입을 이끌어내고, 이것은 ‘시간의 충만함’으로 고양된다.


3


문학의 공간도 마찬가지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공간’은, 작품의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특정 장소로서 제시되지만 독자들이 그 작품을 읽는 순간, 공간의 원래 이미지는 사라져버린다. 이때 독자의 머릿속에 생산되는 것은 그/그녀가 경험하고 상상했던 이미지이며, 원-이미지와 비교했을 때 2차로 확장된 이미지가 된다. 작품에서 공간은 의미작용의 바탕으로 작용할 뿐이다. 작품의 시간이 독자의 개입으로 백지화된다면, 공간의 나타남도 동일하다. 이를테면, 김소월의 「진달래꽃」의 배경인 ‘영변 약산’은 독자의 상상(개입)에 의해 원래의 장소성을 잃어버리고 전혀 새로운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곳은 친근한 산일 수도 있고, 밀폐된 방일 수도 있다. .

'시간과 공간의 부재로서 문학은 충만해진다'는 역설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1920)가 바라보는 이중의, 상이하고도 끝없이 반복되는 세계와 유사하다. ‘부재하는 현존’의, 그 ‘파편’의, ‘단속적인 사실들’의 틈을 메우고 보강하는 작업을 통해서 말이다. 벤야민은, 파울 클레의 ‘새로운 천사’를 인용하면서 이 모호한 회화가 이중의 시선과 몸짓을 통해 현실과 내면의 경계를 부수고, 그 속에서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해 낸다고 말했다. ‘새로운 천사’가 파국의 현실(혹은 ‘죽은 의미’)을 타개할 방법이며 사유였다는 것: “천사는 머물고 싶어 하고 죽은 자들을 불러일으키고 또 산산이 부서진 것을 모아서는 이를 다시 결합하고 싶어 한다.”15)


[고찰④] 시 쓰기는 '시간과 공간의 부재, 그 매혹에 몸을 맡기는 행위'다.




10) 모리스 블랑쇼, 박혜영 옮김, 『문학의 공간』, 민음사, 1998, 26쪽. 블랑쇼는 “시간 부재, 그것은 변증법적 시간이 아니”라고 말하며, 이어서 “그것은 단지 자기 자신을 다시 드러내주며, 현재를 비롯하여 언제 어느 시대에나 되돌아온다”고 쓴다. 여기서 ‘변증법적 시간’이란 기원을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시간, 시작과 끝이 있는 진화의 시간이다. 블랑쇼는 문학의 시간만큼은 ‘되돌아온다’고 주장함으로써 이 시간관을 해체한다. 당연하지만 문학의 시간은 사건의 총체적 배경이 되는 특정한 시간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성이 아닌 수용의 시간으로 좀 더 보편적 시간 혹은 ‘시간성’에 가깝다. 만일 19세기의 한 작품이, 생성된 시간에 속박되어 있고 이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문학은 결코 수용될 수 없다. 우리는 오로지 그 시대, 그 시간에서 발화된 의미만을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은 시간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참고로 바슐라르에 따르면 공간도 이와 동일하다.

11) 안토니오 타부키, 박상진 옮김, 『꿈의 꿈』(선집1), 문학동네, 2013, 63쪽.

12) 아울러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 또한 그가 경험한 것을 다시 쓰는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 작가도 시간의 부재 속에서 새로운 시간을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13) 이제 막 세포분열을 시작한 유기물이, 자신의 시스템에 따라 뇌, 폐, 근육 등 여러 기관으로 분화되기 직전의 상태를 말한다. 아직 무정형이므로 그 ‘상태’는 가능성의 모든 것이다. 나는 그 무엇으로도 정의되지 않는다.

14) 김점용, 『메롱메롱 은주』, 문학과지성사, 2010, 85쪽.

15) 발터 벤야민, 최성만 옮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발터 벤야민 선집 5』, 길, 2008, 339쪽.






이전 07화사물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