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의 경계

제2장 시와 사물

by 박성현

시는 자기-표현으로서의 글쓰기에 속하며, 모든 언어 가운데 가장 첨예하고 광범위하며 극단적이다. 시는 언어와 사물을 매개하는 동시에 그 끈을 모호하게 한다. 시는 아슬아슬한 언어다.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 사이의 경계에서 몰락을 향해 나아간다. 사실, 시에서는 언어와 언어가 아닌 것 사이의 구별은 불필요하다. 시라는 특수한 시스템에 사로잡히는 순간, 매혹된 모든 것─모국어를 비롯해, 이국의 말들이나 영상, 이미지, 숫자, 기호, 기하학 문양이나 공식 등─은 시의 언어가 된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사람이 언어를 읽어낼 수 있는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그러나 언어가 아닌 것을 읽어내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은 언어를 읽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던가

─ 다니카와 슌타로, 「사랑에 빠진 남자」 부분20)


여기서 ‘언어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는 분명하다. 그것은 위에 언급한 비-언어적 기호와 더불어 표정이나 몸짓, 낯빛과 손가락의 미세한 흔들림 등을 포괄한다. 시인은 우리가 언어 이외의 것들을 읽어내기 때문에 ‘비로소’ 언어에 닿고, 그것을 읽어낼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인들뿐만 아니라 이제 막 시를 가까이 두기 시작한 우리도 시를 씀으로써 자기-표현의 기록을 남긴다. 그 범위가 감정의 영역일 수도, 아니면 사유와 직관이 교차하는 다른 층위의 영역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들은 ‘시’를 씀으로 하여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생활을, 그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상처를, 또한 결심과 의지라는 굴곡을 정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 쓰기는 자기-확신이다. 이 ‘확신’은 당대를 관통하고 넘나드는 그 확장성을 가지며 어떤 식으로든 역사를 껴안게 된다. 나의 사소한 문장일지라도, 시는 세계-속-의 언어다. 시가 지향하는 것은 이것이다: “나를 멈추고 돌아보기 위해서” 그리고 내가 펼쳐낼 수 있는 “새로운 삶들을 기록하기 위해서”.

시를 쓰고 싶은데 무엇을 써야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은 김진영 철학자의 말을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새로운 삶, 곧 내가 설계하고 짓고 살아가야 할 장구한 시간의 사원을 위해 ‘과거’와 ‘미래’의 ‘나’를 만나 대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를테면 유년이라는, 내가 가장 잘 알고, 신비와 그리움으로 가득 찬, 그래서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어린 시절을 호명하는 것도 좋다.

관건은 어린 시절의 무엇을 시로 써야 하는가에 있는데, 자신의 유년과 관련된 어떤 것을 택하든 상관없다. 새빨간 볼이 동글동글한 헝겊 인형이나 플라스틱으로 주물된 장난감은 물론이고, 딱지나 고무줄, 검은 머리핀, 노란 색연필, 파란색 크레파스, 반을 잘라낸 도화지에 그린 그림, 비닐로 만든 동전지갑 등은 물론이고, 수두를 앓았던 초등학교 2학년의 늦은 여름이나 갑작스러운 마비로 다리에 대침을 맞아야 했던 일, 육교에서 노란색 택시를 쳐다보다 그만 엄마를 놓쳤던 일곱 살 시절도 포함될 수 있다. 특정 사물에서 발화(發話)되는 독특한 감정이나 사건을 주제로 삼는 것도 좋고, 당시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가족 간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도 좋다.

특히 심장에 여전히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강렬한 풍경이나 사건은 시 쓰기의 좋은 소재가 된다. 왜냐하면, 비록 원형 그대로 보존되지 않겠지만 그 감동은 항상 현재의 ‘나’로 이어지면서 나의 모든 영역을 가로지르기 때문이다. 다니카와 슌타로는 한 산문에서 자신의 시 「네로─사랑받았던 작은 개에게」를 인용하고 이렇게 쓴다: “이 시는 6월 어느 날, 어릴지도 모르지만, 정말 강했던 감동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나라고 할 수 있겠다. (중략) 감동이란 좀 더 복잡한 형태를 취할 때가 있다. 만약 네로라고 하는 개가 없었다면 이 시의 감동은 이렇게 순박한 언어로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21) 눈여겨봐야 할 것은 ‘정말 강했던 감동’이라는 구문이다. 그것이 '네로'라는 개를 통해 시라는 '순박한 언어'로 되살아났던 것이다.




20) 다니카와 슌타로, 김응교 옮김, 『이십억 광년의 고독』, 문학과지성사, 2009, 186쪽.

21) 다니카와 슌타로, 위의 책, 221~2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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