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시’의 문채(文彩)를 새기기 위해
문채는 글의 지문(指紋)이다. ‘figure’로 영역되는 이 단어는, 문체(文體)와는 결을 달리하기 때문에 두 관계를 정확히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문체는 ‘style’이다. 비슷한 말로는 글투, 글체가 있는데,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문장의 개성적 특색. 시대, 문장의 종류, 글쓴이에 따라 그 특성이 문장의 전체 또는 부분에 드러난다.”고 설명한다. 문장의 인격적인 측면으로서 당대 문장의 보편적 흐름과 경향에서부터 작가의 목소리에 묻어나오는 은밀하고도 사소한 버릇까지 포함한다. 뷔퐁이 ‘문체는 그 인간이다’고 정의한바 그대로 글쓴이의 사상과 개성은 문체를 통해 뚜렷하게 투사된다.
이에 비해 문채는 통상 수사학이 치중된 용어로, “언어 규범을 벗어나려는 개성적 일탈의 양식”1)이다. 말의 전이 능력(혹은 둔갑술)을 충분히 반영하는 비유법, 곧 상징, 은유, 환유 등과 통상적인 문장의 어순이나 배치를 과감하게 물리치고 낯설게 뒤트는, 반복법이나 대구법 등이 이 여기에 해당된다. 영화로 따지자면 문채는 영화 전반적인 구조나 줄거리가 아니라 일종의 특수효과라 할 수 있다. 표현을 더욱 더 엄밀한 ‘표현’으로 만드는, 다시 말해 영화의, 영화적 표현을 위한 기술이다.
시를 쓸 때 중요한 것은 사물이나 사건을 어떤 방식으로 표출하느냐다. 이것은 순전히 문체에서 파생되는 문제의식이다. 하지만 보다 실제로 시를 쓸 때는 ‘style’보다는 ‘figure’에 더 집중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문채는 유기체로 따지면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현상이다: 저 과수원에 탐스럽게 열린 사과는, 폭염과 태풍을 이겨낸, 그리고 색과 모양, 최고의 당도와 신선함을 가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사과’다. 사과는 사과나무 속에 추상적으로 내재하지만, 사과라는 실체로서 표현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문채를 작품의 지문(指紋)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작품에 내장된 고유한 코드이며, 다른 무엇도 아닌 그 작품으로서의 실존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 ‘지문’은 작품 자체가 생성하는 주름만이 아니라, 쓰겠다는 분명한 욕망과 함께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시인의 의지와 생각의 방향, 감각에 포착된 ‘그것’에 대한 이해와 해석, 그리고 이를 문장의 시퀀스로 엮어내는 손끝의 힘 등이 각각의 역할 속에서 함께 협업하는 총체적 현상임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과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사과나무의 ‘먼저-있음’이 필연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과나무와 사과가 엄밀히 다른 것과 같이, 시인도 시와 다른 세계 속에 존재한다. 바로 여기서 ‘문체’는 ‘문채’와 갈라진다. 작품은 스스로를 ‘표현’하고 ‘제어’하는 힘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이를 ‘작품의 힘’으로 명명한 바 있다. 이승훈 시인 또한 시 「언어」에서 “지금 말하는 건 내가 아니라 언어, 그것, 알 수 없는 힘이다”2)라고 말했다. 아니 에르노도 「사고」에서 “이야기가 나를 끌고 가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가피하게 진행되는 불행의 의미를 내게 강요하는 느낌이다.”3) 문체가 인격으로서 그 사람이라면, 문채는 사물로서 그 작품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질문으로 간주한다면, 시 쓰기의 주안점은 ‘무엇을 쓸 것인가?’에서 ‘어떻게 쓸 것인가?’로 전환된다. 요컨대, 시인의 사소한 경험이라도 문채에 따라 얼마든지 작품으로서의 예술적 성공 여부를 가늠할 수 있다.
물론, 이 두 문장이 서로를 견제하며 첨예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는 없겠지만, 이러한 경지는 대목장도 쉽게 이르기는 요원하다. 다시 말해,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에 지나치게 신경을 쓴다면, 그는 첫 문장도 제대로 쓰기 힘들 것이다. 그 ‘무엇’은 끊임없이 ‘나’에게 새로운 판단—시가 될 수 있는지, 예술적인 성공 혹은 지속이 가능한지, 윤리적인 문제는 없는지 등—을 강요한다. 이 과정에서 창작자는 자칫 주어를 잃을 수도 있고, 시 쓰기가 더 어려워질 수도 있다. 1권에도 계속 말했지만, 중요한 것은 시를 쓰기 위한 경험은 이미 충분히 숙성되었으며, 그것을 주재료로 삼아 요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대상에 대한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은 쓰면서 얼마든지 내릴 수 있다.
이 책에는 비유법이나 수사법 등과 관련된 내용은 배제되어 있다. 시를 쓰기 위해서 상징, 은유, 환유, 제유 등 제반의 비유법을 알고 이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것도 도움은 되겠지만, 필자의 경험상 시인 누구도 비유법을 전제로 시를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나는 이러한 사건을 상징과 은유로써 표현할 거야’라는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쓸 뿐이다. 쓰다 보니 그의 문장은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되고, 나아가 그 영역의 대표적인 문장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쓰다 보면 안다, 과연 내가 어떤 비유를 잘 쓰고, 어떤 수사에 최적화되어 있는지를. 비유와 수사는 나중에 필요하면 따로 공부하면 된다─시인 중에는 공부가 전혀 안된 분들이 오히려 이 영역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심지어는 비유와 수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시 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것에 맞춰진다. 만일 내 안에서 두려움이라는 안개가 제거된다면, 눈부시게 푸른 언어의 초원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다. 마음을 최대한 가까이 두고, 그 투명한 상자 속에서 바람과 구름과 햇볕을 꺼내자. 이때 첫 문장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것이다.
1) 한국문학평론가협회 편, 『문학비평용어사전(上)』, 국학자료원, 2006. <문채> 항목 참조.
2) 이승훈, 『너라는 햇빛』, 세계사, 2000, 41쪽.
3) 아니 에르노, 윤석헌 옮김, 『사고』, 민음사, 2019, 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