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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분필을 들고 1
17화
배움
2023.11.24. 금
by
고주
Nov 26. 2023
벌써 수업을 시작한 지 17일째.
시간은 고삐를 묶어도 발목을 잡아도 소용없다.
낙엽 다 떨군 앙상한 나뭇가지나
흰머리가 올라와 끝만 남은 물러진 염색한 내 갈색 머리카락이나
춥기는 마찬가지다.
수원역에서 조금 서둘러 지하로 달렸고, 운이 좋게 바로 오는 전철을 잡아타게 되었다.
덕분에 학교로 가는 숲길로 걷는 시간이 여유로워졌다.
따뜻한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단풍이 제대로 들지 않았다고들 했다.
길가에 파릇파릇한 은행잎이 뒹구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 와중에 만난 제대로 익은 단풍나무.
사진을 찍고 있는데, 마주 오던 사람도 휴대폰을 꺼낸다.
<단풍나무>
그놈의 날씨 때문에
여물지도 못하고
낙엽이 초록으로 떨어진다고들
저것 좀 봐
다 지 할 나름인 갑이여
이쁜 것이
남 탓도 안 해
가만히 있어도
다 알아본다니까
빨갛게 타고 있는 저 단풍나무
왜 떠드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목소리가 클까?
왜 교실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허벅지가 굵을까?
왜 걸리는 녀석들은 맨날 또 걸릴까?
주체할 수 없는 기운이 입으로 다리로 뻗치니 본인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45분이지만 가만히 있는 것은 고문일지도 모른다.
사과 소녀는 개념은 다 알겠는데, 답을 구하기가 어렵단다.
기둥의 부피는 밑넓이 곱하기 높이는 알겠는데, 계산이 맨날 틀린단다.
그것이야 손이 기억하도록 많이 풀었어야 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쳐주던 옆자리 친구가 가슴을 친다.
6의 세제곱 을 모르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래도 꿋꿋하게 기다리라면서 암산을 하겠단다.
그랬던 사과 소녀가 오늘은 자꾸 뒷자리 오와 실랑이다.
몇 번 주의를 주었건만 멈추지 않는다.
표정을 싹 바꾸고 나무랐더니 완전 나라 잃은 얼굴이 되었다.
수학 선생님이 세상에서 최고인 줄 알았는데, 정면에서 무색을 당했으니.
뒷자리 오는 공부를 제일 잘하는 녀석이다.
한 칠판 마치고 교실을 한 바퀴 도는데, 사과 소녀 책상에 거울이 세워져 있다.
몰래 화장하려는 것을, 오가 못하게 화장품이 들어있는 필통을 뺏으려다 난 사단이었다.
자식, 소금에 절인 배추 꼴이다.
옆 옆 반의 홍은 죽은 듯 수업을 듣고 있다.
지난 주제선택시간에 까불었던 것이 미안했는지, 복도에서 내 손을 잡고 몇 번이고 죄송하다고 했다.
다음에는 절대로 떠들지 않겠다고 다짐 다짐했다.
며칠 갈지는 모르지만 애쓰는 모습이 예쁘다.
귀여운 녀석.
사수 백 선생님은 오늘도 친절하게 테셀레이션 수업에 대해 가르쳐주신다.
색종이며 판, 색연필까지 챙겨주시겠단다.
절대 자습은 시키지 말라.
문제지라도 앞에 있어야 조용하다고.
다음 주는 큰 걱정 없이 주제선택수업을 할 수 있겠다.
주말이 편하겠다.
참 먼 시간의 터널이다. 십 년이라는 세월.
시험 전 마지막 수업을 하는 오전 3시간.
뒤도 보지 않고 달렸더니 머리가 띵하다.
오후는 연속으로 두 시간 미래직업체험.
기후변화전문가, 로봇감성인지연구원, 프로파일러, 게임개발자, 조향사, 화장품연구원, 일러스트레이터, 애니메이터, 제품디자이너, 스마트시티기획자, 식용곤충전문가.
이름만 보아도 범접할 수 없는 전문가들이다.
희망하는 아이들이 정해진 교실로 간다.
나는 애니메이터반 임장지도.
외부에서 강사분이 오시면 아이들을 통제하기 힘드니 당연히 선생님들이 교실에서 함께해야 한다는 주무 부서 선생님의 말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선생님들.
여기까지 돈보스코께서 왔다 가셨나 보다.
강사 선생님은 화면에 애니메이션 영상을 띄우고 제목 맞추기부터 한다.
맞추면 사탕 하나.
서로 하겠다고 손을 들고 책상을 치고.
이런 배신자들.
수학 시간이면 썩은 동태 눈알들이 레이저 광선을 쏜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만든 결과물들을 보여준다.
영화의 시작이 되었던 돌아가는 연속 활동사진 보는 틀을 만들기 한다.
쥐 죽은 듯 고요한 교실.
제 것에 심취해 옆 사람 신경 쓸 생각조차 못 한다.
휴대폰에 어플을 깔고 지시에 따라 자신들의 작품을 만든다.
딱 2초짜리를.
펜으로 손으로 휴대폰에 연속되는 20여 장의 그림을 그리고 저장하고.
특별한 설명이 없어도 척척이다.
관심이 많아 기본이 있겠지만, 휴대폰을 만지는 기술은 수준급들이다.
점점 쪼글쪼글해지는 나.
자식들, 시간이 끝나도 선생님 주변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자신들이 만든 영상을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달라고.
헛살았다 망태.
에라! 시끄럽다고 징징거리기나 하고.
사탕을 사야겠다.
유튜브라도 죽어라 뒤져야겠다.
하려고 하지 말고 하라고 해야겠다.
복도가 떠들썩하게 가득 채우며 오고 있는 사과 소녀.
수업 시간에 좀 심하지 않았나 마음이 내내 무거웠다.
맘을 달래주려고 몇 번이고 교실을 들여다보았는데 만날 수가 없었다.
날 보자마자 “사랑합니다”라고.
어느 반에 갔었느냐고 물으니, 너무나 어울리지 않게 기후변화전문가반이었단다.
마냥 천방지축 개구쟁이인 줄 알았더니, 속 깊은 곳에 지구의 안전을 고민하고 있었구나.
나의 미안함의 표시라는 걸 알아주기는 할까?
그 어렵다는 수학에 이제 막 재미를 갖게 되었는데, 제발 꺾이지 않기를.
우리 다음 주에 만날 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대하자.
너는 그럴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걱정이다.
그래도 금요일.
막걸리 두 병은 정량.
참 긴 일주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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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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