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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23. 목
by
고주
Nov 26. 2023
비가 오는지를 알려면
하늘을 보지 않는다
창문 아래로 걷는 사람들이
우산을 썼는지를 보면 된다
신호들이 있는 건널목을 건널 때
초록 불을 보지 않아도 된다
건너는 사람들을 따라가면 된다
내가 하루를 잘 살았는지는
집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날 반기는 아내의 표정을 보면 된다
나는 누구의 무엇인가?
그것이 중요할 때도 있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고 했다.
그냥 울지 말라고만 하면 멈추느냐고.
아이들이 떠든다고 징징거릴 것이 아니다.
뭔가 집중할 거리를 줘야지.
19세기 선생님이 20세기 교실에서 21세기 학생을 가르친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 말이 그대로 내게 돌아온다.
학습지 만드느라 오전을 다 보냈다.
내가 목젖이 튀어나오도록 악을 써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제 손으로 쓰고 풀고 만들어야 의미를 찾는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지는 다음 주 화요일 시험이 끝나고 현장에서 확인할 일이다.
10년의 공백을 고스란히 몸과 마음으로 느끼는 중이다.
잘 돼야 할 텐데.
의무 연수는 꼭 받아야 한단다.
2개월 이상 근무하는 기간제교사는 교원평가 대상이다.
그래서 정성평가 정량 평가지를 작성해야 한다.
1학년은 시험을 보지 않기 때문에, 동아리 활동이나 교과목 세부 특기사항을 학생별로 모두 기록해야 한다.
부양가족수당, 복지비, 성과급까지 챙겨준다니 시키는 일은 기안내에 내주어야 한다.
벼룩도 낯짝이 있지.
진도는 모두 마쳤으니, 복습이다.
나와 눈을 맞추고 수업을 따라오는 녀석들을 보며 열을 올린다.
오랜만에 교실이 적막이다.
떠들지 말고 자신의 계획대로 공부하게 했더니, 까불이들은 풀이 확 죽었다.
고개를 누이고 잠을 자도 모른척한다.
너무 조용하니 간이 안 된 김치를 먹는 맛이다.
자식들 중간이 없어요.
아이들은 그럼 우리 보고 어쩌란 말이야?
그러겠지.
노인네 비위 맞추기 힘들다고 하겠지.
몰아서 두 연수를 듣고 늦은 퇴근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
어둠 속에서 검은 구름이 모이고 있다.
비가 오려나?
말 잘 듣는 아이들을 기대하고 현장으로 왔는가?
할아버지뻘 선생님을 양손 들어 환영하리라 기대했던가?
어려운 곳이라야 내 역할이 조금이라도 더 있지 않을까?
반성하며 걷는 발걸음이 무겁다.
또 초심으로 가자.
스물여섯 첫 수업을 하던 그때로.
할 일이 남아있다는 것.
팔 걷고 나설 용기가 있다는 것.
축복받을 일이지.
감사해라. 망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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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를 신으로 모시는 고주망태입니다. 36년의 교직생활을 잘 마무리하고, 이제 진정한 자유인이 되고 싶은 영원한 청춘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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