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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분필을 들고 1
15화
바쁜 하루
2023.11.22. 수
by
고주
Nov 26. 2023
금정에서는 오는 전철의 시간을 알리는 표시판 아래에서 타야 한다.
그래야 수원역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앞이다.
어찌나 사람들이 몰리든지 조금만 위치가 달라지면 밀치고 떠밀리면서 다 구겨져서 지하 4층에 도달한다.
수인선으로 갈아타는 데는 서두를 필요 없다.
내가 내리는 곳은 급행이 서지 않기에 줄 서 있을 필요 없다.
눈감고도 훤한 길.
한 달이 가까워졌으니, 개가 아니라면 3년까지는 아니겠지.
학교로 가는 숲길.
두 번의 신호등을 만난다.
신호등을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대신 빨리 바뀌니 뛰어야 한다.
전철역으로 가는 길목이라서 그런지 되도록 위반하지 말라는 현실적인 신호등 체계인 것 같다.
계단은 발로 걷는 길을 택한다.
집에서 나와 30분은 전철에서 나머지는 발로 걸어야 하는 한 시간.
아침 운동으로는 훌륭하다.
학교 앞 낙엽을 쓸고 계시는 분이 입고 있는 초록색 형광 조끼 등에는 학부모회라고 적혀있다.
아직 등교하기에는 이른 시간에 학부모님이 낙엽을 쓸고 계신다!
놀랄 일이다.
진도를 마쳤으니 약속대로 복습이다.
공부할 거리는 알아서 가져오기로 했다.
문제 풀기에 어려움이 있는 학생들만 나와 함께 수업한다.
해찰하는 몇 빼고는 제법 진지하다.
문제마다 기본 개념을 살피고 풀이에 전략을 세운다.
세부적인 계산이야 제 손으로 해야겠지.
오랜만에 신나게 열을 올린다.
들어야 할 녀석들은 안 듣고, 듣지 않아도 될 녀석들만 눈이 똥글똥글.
사실 시험에 나오는 내용들인데.
사는 것이 다 그렇지.
줘도 못 먹는다.
아주 답답하다.
공부는 수업 시간에 해야 써.
이 도토리 쟁여놓고 장소 잊어먹는 다람쥐 같은 녀석들 하고는.
시험문제라며 검수해 달라고 어제 3장을 주셨다.
고등학교에 쭉 계시다가 처음으로 중학교로 오셨다는 연세가 지긋한 사수 여선생님.
문제를 대충 풀었고, 아침에 다시 검토하려고 문제를 꺼내 보니 숫자가 다른 3장이다.
연필에서 연기 나도록 풀었다.
사수는 좀 편해지겠다 싶었는데 결혼한 늙은이를 조수로 맞이한 말년 병장 심정이리라.
문제는 이상이 없다.
시험 보기 전 자세와 채점 방법에 대해 훈시를 듣는다.
성적에 들어가지 않는 1학년이어도 A, B, C 세 유형으로 시험을 치른다.
시험지를 집에 보내 사인을 받아오게 한다니 압박감도 보통은 아니겠다.
경기도가 시골이 아니라는 것을 피부로 느낀다.
어쩌려고 이런다니.
정신없이 1교시 수업.
2교시는 한숨 돌리고 주제선택수업을 어떻게 할까 궁리하고 있는데, 전화다.
3학년 시험 부감독에 들어오지 않았다며, 20분이나 지났는데.
일일 시간표에는 분명히 없었는데, 일단 뛰자.
벌떡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시험을 마쳤다.
시간표는 메신저로 보냈단다.
결국 열어보지 않은 내 불찰이다.
이런 실수가 있나.
3교시를 마치고 식당으로 달렸다.
바쁘게 종종거렸더니 배가 고파 평소보다 좀 더 먹는다.
정보실로 오다 보니 1학년들이 복도에서 배식하고 있다.
가만 시간이 바뀌어 점심시간이 3교시 후이지.
그럼, 3학년 급식지도인데.
5층으로 계단을 세 개씩 밟고 오른다.
폭포를 오르는 연어처럼.
녀석들은 벌써 잔반을 모으고 있다.
오늘 뭐가 씐 건가?
윤주는 복잡한 도형의 외각들의 합을 구해내는 문제에서 어느 책에도 없는 풀이를 내놓는다.
식으로 보여줄 수 없는 중학교 1학년 과정에서 부피나 넓이는 실험을 통한 직관으로 알아가는데, 숙제도 착실하게 해 오는 학생이다.
전체에게 박수로 격려하도록 했고, 노력도 중요하지만 타고난 수학적 감각인 것 같다고 부럽다는 말도 보탠다.
아이들에게는 많이 인기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수학만큼은 자부심 완빵이다.
눈빛으로 보아 퀴리 부인 당첨이다.
조개 속에서 진주 찾듯이, 술김에 산 복권이 당첨되듯이, 이런 노다지가 있나.
하나도 힘들지 않다.
주제선택반에서 녹초가 되어 정보실로 들어온다.
반에서 수업할 때는 나와의 면담에서 서로의 팔목에 건 끈이 잘 역할을 해주었는데, 반이 섞이니 무용지물이다.
준기도 영운이도 휘호까지.
수업보다 훈계하다 더 진이 빠진다.
슬금슬금 눈치 보며 머슴아들의 정신을 쏙 빼놓는 가시나들이 더 문제다.
그렇지.
수놈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뻔한 소굴로 뛰어든다는 것을.
인정해 주자.
눈에 보이는 것이 없을 때지.
메신저가 불났다.
연수확인서를 내달라.
교원평가서를 제출하라.
행정실로 교무실로 천둥보다 빠른 번갯불이다.
새로 회원가입을 하고, 물어물어 서류를 완성하고.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동안 주변에서 다 도와준 일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힘들어도 내 손으로 해야 한다.
일에 대한 예의다.
조금 늦기는 하지만 못할 일도 아니다.
세상에 던져진 조무래기.
그래서 더 신난다.
막내는 까불어도 괜찮아.
신발에서 화약 냄새나도록 뛰어다니면 돼.
농땡이만 부리지 않으면 귀여움 받지 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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