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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Jun 04. 2024

운명

2024.05.09. 목

     

‘행복에게로 한걸음’

나의 부끄러운 시집이 도서관 서고에 꽂혀있다.

동화 실로암을 쓰신 정채봉 선생님이 바로 옆에 계신다.

일찍 돌아가신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보고 싶어, 신발 가지런히 벗고 운주사에 누워 계신 돌부처님 겨드랑이에 얼굴을 묻었다는.

엄마 젖을 만져보고 세상에서 억울한 한 가지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고 싶었다는.

순수와 눈물의 작가를 모시는 영광을.

또 그 옆으로는 세상이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고 화를 내시는 정호승 시인이.

예수님도 외로워 울고 계신다며 안타까워하신다.

두 분은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가까우셨다니,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히 앉아 귀를 쫑긋 세울 참이다.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하루 천 원이면 세상에 부러운 것 하나 없었다는 천상병 시인도 지척이다.

날마다 소풍 가 듯 선술집을 들락거렸을 발걸음 소리.

다 소용없다, 지금 좋으면 그만이라고 외치는 거친 쇳소리.

원 없이 듣겠다. 

고등학생 아빠라는 정덕재 시인은 좀 더 알아봐야겠다.

내 책의 키가 작아서 좋다, 어디서 감히.     


줄넘기.

한 명, 두 명, 세 명.....

반 전체가 다 빠르게 넘는 시합인가 보다.

줄 건너뛰기. 

바닥으로 줄을 끌고 가면, 그 줄을 넘어야 하는.

남녀가 섞여 4명이 뛰는 계주.

만국기가 걸린 운동장에서는 연습이 한창이다.

그 소리는 창문을 넘어 교실까지 왈칵 뒤집어 놓고 있다.

기원전 3세기에 알렉산드리아에서 유클리드라는 분이 정리해 놓은 기하학 원론.

그 안에 ‘같은 것에 같은 것을 더하면 전체는 같다, 같은 것에 같은 것을 빼면 남은 것은 같다’라는 공리가.

지금 책에 굵은 글씨로 등식의 성질로 적혀있다. 

모든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바로 그 기본 원리.

일차방정식의 해를 도형의 길이로 보여주는 실습을 하고 있다.

2300년 동안 쌓인 먼지 냄새가 나지 않느냐? 

알렉산더대왕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고 분위기를 잡아보지만, 녀석들의 귀는 온통 운동장에 있다.

체육대회 하루 전 수업은 진땀으로 내가 먼저 쓰러진다.     


어제.

소변보는 친구에게 달려들어 바지를 벗기고, 물에 빠뜨린 못난이 네 명. 

굴비 엮듯 자리에 앉혀놓았더니, 그 안에서 또 장난하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이 다 아는 중2.

그래 그럴 수도 있겠다고 넘기기에는 좀 심각했던 피해자.

한 밤 자고 나니 모두 용서가 되었나 보다.

하기야 저도 다른 친구를 그렇게 만든 전력이 있으니.

다행히 부모님이 용서했으니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난다.

요즘은 성 사건으로 분류되면 아주 심각한 조치가 따른다.

경찰서에서 나서면 되돌릴 수 없는, 빨간 줄 그어진다. 

자식들 그것을 몰라요.

알면 다 어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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