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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주 Aug 10. 2024

떠나는 일

2024.06.25. 화

<떠나는 일>   

  

더워서도 추워서도 아니다.

눈이 떠진 새벽 2시 30분.

채점이 끝난, 동그라미가 아닌 빗살이 주로 표시된 남은 또 한 반 아이들 시험지.

그 옆에 공주가 그려진 보라색 편지지와

잘 나오는 볼펜이 기다리고 있다.

왜?

긴 밤을 붙들고 실랑이하려고 하는가?

그냥 좋아서.

잠 좀 덜어내고 손가락 눌러가며 아이들을 떠올린다.


‘쉬는 시간에도 한국말을 쓰는 아이들과 어울려라.

소수와 분수까지 사칙연산을 완벽하게 이해해라.

포기하면 안 된다.

조금만 노력하면 바로 수준을 올릴 수 있다.

지금도 너무 잘하고 있다.

여기에서 만족하지 말고 밤낮으로 발버둥 치는 한국의 아이들과 경쟁하라.’

친절하고 웃는 모습이 좋다는 아이들에게.

수학이 재미있었다는 아이들에게 한국말로 된 손 편지를 쓴다.

아마 평생 받아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

당장은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다.

보관했다 나중에 읽어볼 수도. 

이곳의 선생님들께 부담을 지어주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눈치 보지는 않으련다.

나쁜 일이야 남 눈치 보고 자제해야 하지만, 좋은 일이라면 아이들을 위한 일이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

하얗게 태웠다.

밖이 밝아온다.

검지와 중지가 따갑다.

머리도 먹먹하다.

내 맘이 아이들 맘으로 잘 빨려 들어갔으면.

힘든 이국의 하늘에서 자그마한 위로라도 되었으면.

따뜻한 나라라고 느꼈으면.

따뜻한 선생님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안녕하세요 : 센베노,                감사합니다 ; 바야를라

죄송합니다 : 오칠라래,             얼마예요? : 히뜨웨

맛있습니다 : 암츠타벤

까칠까칠한 눈을 어렵게 뜨고, 몽골 말이나 검색하자.


두 개 반에 편지를 주고 시험문제 풀이를 해주고, 마지막 시간을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다.     

처음부터 선생님이 되고 싶었느냐는 함월이.     


아마 중학교 2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투망을 어깨에 지고

나는 고기 담은 망을 들고

보름달이 환한 탐진강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돈 다루는 일에 이골이 났던 아버지는

불쑥 선생님이 돼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나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선생님들의 수업을 들으며 저렇게 해야지

절대로 저렇게는 하지 않아야지

그렇게 나는 만들어졌다

지금까지 아는 것은 오로지 가르치는 일뿐

다시 돌아온 교단

나는 지금이 너무 좋다    

그래, 앞으로 자기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 궁금하겠지.

별처럼 빛나는 눈들.

하고자 하는 일이 정해지면 그 길로 가는 방법들을 알아가는데.

내가 아는 것은 이것뿐.     


시원한 맥주에 시원한 오이를 오도독 오도독.

이 즐거움도 오늘로 끝.

몰라 또 다른 재미를 찾아야지.

짧은 인연 긴 여운, 오래오래 가슴에 담아야 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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