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병원 장례식장에 다녀왔다. 순전히 학교와 가까운 탓이다. 치유기제 강의를 듣고 볼 일로 학교로 갔는데 마침 단톡방에 조문 소식이 올라왔다. 그래서 푸른 바지 차림으로 가서 국화를 한송이 올렸던 것이다. 영정사진 속 고인은 아주 젊었다. 한창 피어오르던 시절의 사진일 것이다. 15도 각도로 저편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
유명인은 나와는 관련 없고 관심도 없다. 세상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살되 그저 먹고살기 바빠 내 일에 허덕이고 있는 탓이다. 보통 사람 대다수처럼. 보통 사람인 우리는 시대의 가치관을 함께 하며 살아간다. 간혹 그 가치관이 후대에 이르러 잘못된 부분이 판명 난다고 할지라도 당대에는 틀림없이 옳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그 가치관의 호오를 따질 수는 있으되 옳고 그름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역사적 의식을 갖고 있거나 시대적 흐름을 읽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는 한때 시대를 노래로 읽어냈던 사람이다. 설령 그가 그 곡을 썼을 때 의도가 시대를 읽는 것이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시대가 그렇게 받아들였고 시대가 그렇게 받아들였던 탓에 지극히 서정적인 가사가 대단히 정치적인 가사가 되어버렸다. 그 노래는 제목조차도 아름다운 '아침 이슬'이고 가사 또한 천천히 읽어보면 아픔에서 일어서는 희망의 이야기다. 그러나 정권의 촉수는 지나치게 예민했다. 그 노래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정권의 영민하신 분들, 그들은 가사 속에서 깊은 은유를 읽어내었고 그리고는 그 노래를 금지곡으로 만들었으며 그렇게 해서 그 노래를 단숨에 유명한 노래로 만들었다. 어제 돌아가신 김민기 선생 이야기다.
가사를 읽어보면 밤새 고민에 시달린 이가 아침 햇살을 바라보며 새로운 용기를 얻고 삶의 광야로 나아간다는 내용으로 이뤄져 있다. 그 고민의 내용은 없다. 사실 고민이라는 단어조차 없다. 긴 밤을 지새웠다는 표현이 있을 뿐이다. 청년이 주체인 듯한 이 가사는 어쩌면 사랑의 고민으로 밤을 지새웠다고 볼 정도로 청춘의 고민을 논한다고도 볼 수 있으니 고무적인 가사다. 마지막 구절을 보면 새로운 희망을 말하고 있으니 변화가 일어난 것이고 성장이 일어난 것이다. 청년이 밤새 고민을 하다가 아침이슬을 보고 밤의 고민을 내려놓고 새로이 출발할 결심을 한다는 것이니 청년의 특권이 아니고 무엇인가.
1971년 발간된 이 노래는 1973년에는 건전 가요로, 아름다운 노랫말로 지정되었다가 1975년에는 금지곡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대체 무엇이 정권의 비위를 거슬렸을까.
아침 이슬/김민기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혹자는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라는 구절 때문이라고 한다. 이때 정권은 붉은 태양이 김일성의 공산주의 혁명을 뜻한다고 억지 주장을 했다고 하는데, 여기에 묘지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데서 정권이 찔렸을 수도 있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그들이 술을 마시며 밤을 새웠던 장소가 묘지 가까운 곳이라고 한다. 오늘날은 누구나 아는 이야기다.
은유는 뜻밖의 효과를 불러온다. 당시 김민기 선생은 이 가사를 그저 청년의 소박한 마음으로 지었을 테지만 정권은 뜻하지 않은 의미를 읽어내었다. 은유는 맥락을 뛰어넘어 새로운 의미를 갖는 일이다. 전혀 다른 영역에 놓여 있던 말들이 영역을 건너뛰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은유는 우리의 무의식을 건드린다. 호수와 마음은 동떨어진 개념을 갖고 있지만 일단 연결되면 유사성을 찾아낸다. 은유가 어려운 것은 우리의 언어창고가 각각의 어휘에 일정한 한계를 긋고 있어서이다. 그 은유의 벽은 높고도 깊어 우리는 그 어휘가 지닌 의미를 뛰어넘을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은유가 가능한 것은 각 어휘의 경계가 느슨해지는 때, 서로가 서로를 활짝 여는 때이다. 달리 말해 그 어휘를 사용하는 이가 그 어떤 경계에도 얽매이지 않는 때이다.
다시 노래 하나를 듣는다. 역시 아름다운 노래다.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친구의 죽음을 차마 부모에게 전할 수 없어서 썼다고 하는 이 노래에서도 다른 세계를 엮는 깊은 은유가 들어 있다. 바다를 두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논한 가사에서는 비장미라기보다는 철학마저도 보인다. 삶과 죽음은 과연 다른 것인가. 삶과 죽음을 놓고 허상을 언급하는 구절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헛헛되다는 성경 구절이 어른거리고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불경의 어떤 구절이 스며 나온다. 흩날리는 꽃잎이 생명의 덧없음을 말한다면 쉼 없이 달리는 기차바퀴는 시간의 여차를 말하고 삶을 말하며 윤회를 말한다. 생명은 돌고 돌아 어디로 가는가. 우리가 남는 것은 서로의 기억에서 일뿐.
친구/김민기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닷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 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눈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누가 있겠오?
눈 앞에 떠오는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 위에 어른거리오
저 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 바퀴가 대답하려나
오전에 천둥 번개를 동반해 그처럼 요란하게 내리던 비는 다행히 그쳤다.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일까. 청년의 고뇌가 친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정권을 거스른다면 우리는 이미 개인이 아니다. 우리는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들이다. 우리가 서로의 기억에 남는다면 우리는 삶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서로를 위해 산다. 그 가치관을 보여주던 이가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