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란지교를 꿈꾸며 / 유안진
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
차 한 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김치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 우리 집 가까이 살았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
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
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받고 나서도
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는 친구.
그가 여성이어도 좋고 남성이어도 좋다.
나보다 나이가 많아도 좋고 동갑이거나 적어도 좋다.
다만 그의 인품이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깊고 신선하며 예술과 인생을 소중히 여길 만큼
성숙한 사람이면 된다.
그는 반드시 잘 생길 필요가 없고,
수수하나 멋을 알고 중후한 몸가짐을 할 수 있으면 된다.
나는 많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진 않다.
많은 사람과 사귀기도 원치 않는다.
나의 일생에 한 두 사람과 끊어지지 않는
아름답고 향기로운 인연으로 죽기까지 지속되길 바란다.
우리는 명성과 권세, 재력을 중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을 것이며,
그보다는 자기답게 사는 데 더 매력을 느끼려 애쓸 것이다.
우리는 우정과 애정을 소중히 여기되, 목숨을 거는 만용은 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우정은 애정과도 같으며,
우리의 애정 또한 우정과 같아서
요란한 빛깔도 시끄러운 소리도 피할 것이다..
우리에겐 다시 젊어질 수 있는 추억이 있으나,
늙는 일에 초조하지 않을 웃음도 만들어 낼 것이다.
우리는 눈물을 사랑하되 헤프지 않게
가지는 멋보다 풍기는 멋을 사랑하며
우리는 푼돈을 벌기 위해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을 것이며,
천 년을 늙어도 항상 가락을 지니는 오동나무처럼,
일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자유로운 제 모습을 잃지 않고
살고자 애쓰며 서로 격려하리라.
우리의 손이 비록 작고 여리나,
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
우리의 눈에 핏발이 서더라도 총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
서로를 살펴 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그러다가 어느 날이 홀연히 오더라도 축복처럼,
웨딩드레스처럼 수의를 입게 되리라.
같은 날 또는 다른 날이라도...............
세월이 흐르거든 묻힌 자리에서
더 고운 품종의 지란이 돋아 피어,
맑고 높은 향기로 다시 만나지리라.
「지란지교를 꿈꾸며」는 시가 아닌 수필입니다. 1983년 3월 <문학사상>지에 실린 이 수필은 교과서에 실렸을 뿐 아니라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으니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고 읽어 보았음직한 글에 속합니다. 시인은 이 수필이 너무도 유명해 자신이 좋은 시를, 유명시를 못써서 이 수필이 더 알려졌나 보다고까지 할 정도지요(2021년 개정판 서문에서).
오래전, 이 수필을 읽을 당시 저자가 남성인 줄 알았습니다. 누구도 그런 사항을 찾아보지 않을 때이기도 하고 내용이 담백해서이기도 했습니다. 한편으로 어떤 선입견이 있었다고 보아야겠지요. 지금 돌이키니 그러합니다.
이 수필의 첫 부분이 사무칠 정도로 와닿는다면 가슴속 깊이 외로운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혹은 자신과 정말로 친한 친구가 누구인지 돌아보겠지요. SNS에 수많은 모임 사진을 올리고 그 사진마다 유명인이 등장하고 그래서 자
신이 중요한 인물이 된 듯한, 혹은 그런 이와 친하다는 깊은 인연을 과시하고 있더라도.
오늘 이 글을 읽으면서 저 자신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나의 지란지교에 해당하는 친구는 누구인지. 나를 지란지교에 해당한다고 여길 친구가 있는가.

그리고 그 외로움을 내려놓습니다. 많은 이가 그럴 것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러한 수필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으니까요. 제목 자체에 “꿈꾸며”가 들어간다는 사실이 증명하지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있듯 우리는 누구나 혼자입니다. 저 유명한 부처님의 말씀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은 자신보다 존귀한 이는 없다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나는 유일무이한 독자적인 존재’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단 하나뿐인 존재기에 독자적이고 단 하나뿐인 존재기에 존귀하지요.
유일무이한 존재는 외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리를 짓고 그렇게 우리는 공동체를 사회를 만드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독자적인 존재입니다. 각자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살아온 경력이 다르며 배경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딜 가나 겉도는 이라고 느낄 수도 있는 이유입니다. 외로움이 사무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외로움이 이런 아름다운 글을 낳게 하고 그 외로움이 시를 소설을 낳게 합니다. 오늘 외로움을 느낄, 지란지교를 꿈꿀 많은 이에게 좋은 일이 있을 듯합니다. 절절한 고독이 스스로 돌아보게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