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에서 나오는 기품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다가 중년의 배우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속에 “나도 이제 5호선을 탔다.”라는 말이 귀에 꽂혔다.
나도 5호선을 타고 출발했으니까…
난 여전히 삶의 혼란스러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급변하는 서울과 가는 곳마다 수많은 인파 속에 덩그러니 나 혼자인 것 같은 느낌이 좀처럼 버려지지가 않는다.
카페, 레스토랑, 모든 편의시설에서 첫 대면하는 키오스크에 당혹스러웠던 지난여름부터 지금까지 나만 혼자 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그 와중에 러닝과 요가는 나의 일상에서 이어져가고 있는 나의 훈련이다.
반포 종합 운동장 한 바퀴는 정확히 400 미터이다.
작년 여름 한국으로 귀국하자마자 이주일도 채 되지 않아 시작한 러닝이었다.
워낙에 계획성 없이 하는 (안 고쳐짐) 나는 별생각 없이 알고리즘에 툭 튀어나온 마라톤 대회를 신청해 버렸다.
그리고 연습은 해야겠단 생각에 나가 뛰기 시작했다. 처음 뛰었던 날 운동장 한 바퀴가 너무 힘들었고 나의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이 있었다.
운동을 꾸준히 해와서 우습게 알았던 400미터였다.
뛰고 나서 알았다. 내가 겪지 않고는 그 어떤 것도 상대방에게 나의 지식인양 얘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읽은 책과 들은 지식과 이야기들을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거의 매일 뛰었다.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했다.
이 봄을 찬란하게 맞이할 줄 알았는데 세상의 무지함과 사람을 덜컥 믿는 나의 오만함 덕분에 나는 또 한 번의 사기를 당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한 게 아니라 당하고도 남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의 선택에 대한 결과로 혹독히 치르고 있다.
그 와중에 많은 일들과 맞물려 나는 소리 없이 묵묵히 버티고 가야 함을 알아차렸다.
싫은 소리 잘 못하고 거절 잘 못하는 나에서 잘 거절하고 한 템포 늦추어서 관계를 바라보는 힘을 조금씩 길러가고 있는 나로 가고 있다.
이런 나를 아주 조금씩 칭찬해 주고 싶다.
1,2,3,4,5,6호선을 타고 간다.
어떤 역은 복잡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또 어떤 역은 수월하게 지나가기도 하고 때론 바깥 풍경이 보여서 반짝이는 물결, 눈부신 하늘을 만날 때도 있다.
삶도 그렇다.
나는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어떤 형태의 삶을 원하는가?
나는 내 삶이 어떤 모습, 어떤 느낌이기를 원하는가?
노트에 적어 본다.
조금씩 디테일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같다.
불안하고 힘듦이 나를 집어삼킬 때마다 다시 나에게 물어본다. 그럼 한결 편안해진다.
러닝과 요가를 꾸준히 하는 훈련은 나와 친해지고 나를 마주하기 아주 좋은 훈련이다.
예전 같으면 주변 사람에게 기대고 답도 없는 나약한 질문과 원하는 답을 들으려고 애썼던 나였다.
가만히 내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성껏 나를 바라보고 케어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부정적 감정과 고난이 한결 가벼워지고 다시 나를 다독이며 지금을 보낸다.
내게 벌어진 수많은 일들은 다 이유가 있음을 깨닫고
이유를 곱씹어 너무 깊이 생각하느라 에너지와 부정적 감정에 소모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매일 나아지는 방향으로 가다 보면 만나는 내가 진짜 성공한 나인 거다.
더 나아지는 매일을 살아가는 나의 과정이 성공이며 진짜 나를 만나는 과정이 느리고 힘겨워도 가장 빛나는 내가 되는 길이다.
나는 그 과정 속에 있다.
러닝과 요가를 하며 나의 일상을 가꾸어나가서 기품이 생겨 나기를 바라며 정성껏 하루를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