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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과 상념

산책

by 자씨

지난날의 산책 일기




몇 달 전 멈췄던 저녁 산책을 요즘 다시 시작했다. 예전에 밤 특유의 향이 낭만으로 나를 적셨던 기간이 있었다. 그것을 잊지 못해 항상 그리워했었다.


그러나 낭만이 주는 행복보다 더한 습기가 머리카락을 적시고, 가로등 아래의 작고 번잡스러운 벌레들을 인지하면서부터 포기했던 작은 행복이었다.


나만의 산책 전 루틴이 있다. 음악 감상 어플에서 새로 올라온 음악 중 좋아하는 가수이거나 제목이나 앨범 재킷이 끌리는 음악 몇 곡을 담는다. 그리고 집을 나선다.


항상 걷는 길과 조금 특별한 길 중 어떤 길을 걸을지 약 5초 고민한다. 대체로 전자를 선택하지만, 그래도 매번 고뇌의 시간을 가진다. (마치 카페에서 매번 아메리카노와 특별메뉴 중 한참을 고민하다, 고뇌의 시간을 함께 보낸 카페 직원분께 멋쩍게 웃으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키듯이.)


상쾌한 발걸음.

기분 좋은 머리날림.

역시 옳은 선택이었다고 (저녁 산책)

스스로를 칭찬하며 길을 나선다.


적당히 빠른 걸음걸이로 귀에서 들려오는 음악에 집중하며 담긴 음악 중 몇 곡을 선별하는 과정을 거친다. 보통 시작 부분 20초면 음악을 고르기에 충분하다. 기분에 따라 그날그날 다르다.


어떤 날은 낮은 목소리와 깊은 첼로소리가, 또 어떤 날은 독특한 리듬과 가슴 깊숙이 울리는 화려한 드럼이 그 순간을 완벽하게 채운다. 그렇게 선별의 과정이 끝나면 최종합격하지 못한 음악들은 과감히 삭제되고, 오늘 산책의 배경음악이 된 음악들을 쭉 눌러 반복 재생한다.


과제를 끝낸 듯 홀가분한 마음으로 이제부터는 조금씩 주변을 둘러보며 걸음에 집중한다.


익숙한 풍경 속 새로움을 찾는다. 눈에 띄는 무언가를 발견하려고도 해 본다. 오늘따라 유난히 시선을 뺏기는 무언가에 집중해 본다.


머리로는 귀에서 울리는 음악을 분석하고, 낮에 나눴던 대화를 되짚고, 잊고 있었던 고민들을 끄집어내며, 시선이 닿는 모든 것들에 나의 삶을 투영한다.


그리고 그렇게 나와의 시간이 가득 차면 가벼운 마음과 살짝 피곤해진 발걸음, 때로는 새로운 과제를 안고 집으로 들어가는 거다.






오늘은 유난히 복잡한 생각들이 이어지는 산책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멈추지 않는 생각의 흐름과 또 다른 나와의 대립과 화합의 장이 머릿속에서 엉킨다.


음악이 마치고 새로운 음악으로 넘어가는 몇 초의 시간. 아 이어폰을 뚫고 귓속으로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들어온다.


다시 다음 음악이 시작되고,

나는 급히 이어폰을 귀에서 뽑는다.


아. 자연의 소리다.

자세히 들어보니 내가 풀벌레라는 큰 덩어리로 묶어 놓은 여러 생물체들의 소리가 들린다. 낮은 소리, 높은 소리, 짧은소리, 긴 소리들이 나를 둘러싸고 사방에서 들려온다. 벌레는 싫은데 이 소리는 참 좋다.


벌레들의 치열한 울음소리. 치열한 전투의 소리인지 사랑의 소리인지 생각해 본다. 아무렴 어때. 전투 중이면 어떠랴 싶다. 나를 둘러싼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란 생각에 귀를 찌르는 소리에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분명히 오늘 내가 택한 음악들은 오늘 나의 기분에, 이 공기에, 이 시간에 가장 어울리는 것이었는데.

지금 나를 가득 채우는 것은 이 풀벌레 소리구나.


이 넓은 자연의 공간을 울리는 풀벌레 소리에 오늘 하루의 지금 이 순간. 왠지 모를 완벽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자연의 일부인 내가 오늘 가진 이 치열한 고민과 잡념들도 이 자연의 일부인 마냥 이 완벽함과 편안함 속에 쏙 들어간다.


'아 그렇구나 그랬구나' 하며 어느새 색이 깊어진 하늘과 여전히 가득 채운 풀벌레 소리에 집중한다. 그래도 놓지 못한 작은 미련이 담긴 생각들을 조심스럽게 끄집어내어 괜히 툭툭 건드려보니 왠지 아까보다 선명하고 가볍게 느껴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아름다운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예술이 존재한다고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술 속 자연이 많이 등장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나 보다.


그렇게 “그리고, 그래도, 그래서... ”가 여러 번 반복된다. 이쯤 되면 생각의 흐름도, 나도. 너무 멀리 왔나 보다. 그래 오늘은 여기서 이만 멈추자.


“나름대로 아름다운 하루였다.” 하며 멀어지는 풀벌레 소리를 등에 업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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