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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1, 편리하고 불편한

by 순쌤

오사카 2007


2005년 호주에서 돌아올 때 동경에 들러 이틀 머물렀던 것이 첫 일본 방문이다.

덤과 같은 일정이었지만 지브리 미술관을 다녀오고 디즈니랜드에서 하루를 보내면서

우리 아이들은 가까운 일본엘 다시 오고 싶어 했다.


새해를 맞아 하루 만에 짐을 싸고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만 챙겨서 나온다. 공항에서 수속을 끝내고 비행기를 기다릴 때 드디어 기분이 달라진다. ‘여행’이 시작됐다는 즐거운 신호가 온다.

오사카에서 4일, 삿포로에서 3일 머무는 동안 고베와 교토를 다녀오고 교토 전통여관에서 1박, 삿포로의 노보리벳츠 온천에서 1박이 포함된 근사한 여행이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숙소를 낮에 그것도 헤매지 않고 찾은 일도 오랜만이다.

둘이 잘 수 있을까 싶게 방도 침대도 좁은 방이지만 이미 작은 사이즈의 일본임을 아니까...


유흥가 도톤보리가 바로 옆 5분 거리에 있다니 짐을 풀어놓고 나간다.

어두움이 서서히 깔리면서 네온이 화려해지고 거리는 북적거리기 시작한다. 여기저기서 한국말이 들리고 여행책자에서 보았던 유명한 상점의 상표들이 보인다.




커다란 게, 커다란 피에로 인형, 커다란 라면 가게 등. 별 이국적이지 않은 이국에서 분위기가 업된다. 오사카에서 유명하다는 길거리표 타코야키, 오꼬노미야끼를 먹으며 화려한 길을 걷는다.


만화 찾아 삼만리

커다란 만화서점 앞에서 아이들 눈이 더 커진다.

일본여행을 계획했을 때 아이들은 만화의 본고장엘 간다는 자세였다.

한국에 들어오지 않은 만화를 보고 사고 싶다며 기대에 잔뜩 부풀어있는 상태로 오랜 시간 독서삼매경이고 우리 둘은 만화방에 딸려있는 스타벅스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시보라는 음식점에서 정식 오꼬노미야끼를 저녁으로 먹는다. 비싸서 3개만 시킨다. 맛이 고급스럽기는 한데 아이들 반응은 '먹었나?'. 양이 신통치 않은 모양이다.

그리고 또 만화방!

덴덴타운이라는 만화방을 찾기 위해 오래 헤매다. 외국에서 우리의 특기가 나온다.

약도 보고 찾아가기!

일본인들은 말도 잘 못 알아듣는 것 같고 가르쳐주는 곳도 제각기 다르다. 결국 덴덴타운 비슷한 곳을 찾았으나 딸아이가 그토록 사기 원하던 만화책은 없다.

지치고 아픈 다리를 끌고 호텔로 들어오다. 각자 방에 흩어져 좀 쉬는데 배가 고프다.

야식 먹으러 가자!

호텔 옆에 한국인 골목이 있는 것을 봤다. 우동과 잔치국수, 비싸기는 하지만 맛있게 먹고 들어온다.

좁은 침대에 눕는데 딸아이와 부딪친다. 잠을 잘 수 있으려나....


히메지성

닛뽄바시(일본교) - 남바 - 우메다 - 히메지행 한신전철

이렇게 갈아타고 간다. 일본의 전철과 철도는 정말 그 복잡함이 끝내준다. 구석구석 거미줄같이 철로가 이어져 있는 것을 보면 대중교통에 대한 그들의 철학(까지)이 느껴진다. 외국인에게는 복잡하겠지만 그들에게는 매우 편리한 교통체계일 것이다.

가격이 비싸고 (기본 제일 싼 곳이 200엔, 약 1600원, 우리의 두 배다.) 먼 곳을 갈 때는 무조건 갈아타야 한다는 것, 갈아탈 때 우리처럼 통로를 이용해 갈아타는 게 아니라 밖으로 나갔다 표를 다시 끊고 들어와야 하는 것이 매우 번거롭게 여겨진다.

우리는 간사이쓰루패스 3일 치를 끊어 오사카에 있는 동안에는 무한정 철도를 이용할 수 있어 그나마 편리하게 다닌다.


어쨌든 갈아타고 갈아타고 갈아타서 히메지역에 도착.

입구에 세계문화유산이라고 커다랗게 쓰여 있다. 1580년 도요토미히데요시부터 시작하여 8년에 걸쳐 완성한 성이라 한다. 성 주변에 해자가 있고, 도요토미 가문의 며느리가 이 성의 성주와 재혼한 기념으로 지었다는 니시노마루의 긴 회랑이 300m 정도 이어져 있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화려한 천수각 건물은 높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사진으로 봤을 때나 멀리서 봤을 때 규모가 크고 화려한 하얀 성이 인상적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는 평범하게 느껴진다. 자연은 실제 모습이, 인간의 구조물은 사진이 훨씬 근사하다는 생각을 다시 하다.

그러나 이곳, 꽃이 피는 봄에 오면 아름답겠다. 신발을 벗고 니시노마루의 긴 회랑을 걷는데 우리 마루를 걷는 듯, 마음이 편안하고 나른한 느낌이 든다. 1월이 봄날같이 따사롭다.


고베


전철을 몇 차례 갈아타고 고베로.

1995년 TV를 통해 도로가 부서지고 철로가 구부러진 지진 장면을 봤던, 아직도 기억이 선명한 항구도시다.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고...

가는 길에 커다란 신사가 있어 들르는데 행사가 있는지 인파에 밀리고 입구 양 옆으로 장사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점을 보는 사람들, 절을 돌면서 절을 하는 사람들, 구경하는 사람들,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본전에서 절을 하는 사람들이 섞여 신사 안은 매우 번잡하다. 사람들 표정을 보니 무엇을 하든 모두가 축제를 치르는 것처럼 즐거운 얼굴이다. 우리만 어색하고 분위기 파악이 안 돼서 나오다.


하버랜드의 모자이크 상가 공원에서 고베항을 감상하다. 불빛이 하나 둘 들어오면서 아름다운 항구의 모습이 드러난다. 잠시 시드니의 오페라 하우스에 있는 듯 착각을 했는데, 이 느낌은 항을 떠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일본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거리의 간판들이 일본어라는 것을 인지할 때뿐, 아름답고 화려한 풍경이 우리가 멀리 왔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바닷바람을 쐬며 고베의 상징 포트타워에 오르다. 고베 시내가 맑게 보인다. 10여 년 전 지진의 참상이 있었던 곳이라는 상상이 안 된다.

포트타워와 해양박물관과 멋진 호텔과 높은 고가도로 등으로 잘 정돈된 화려하고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탈바꿈한 것 같다. ‘참혹한 슬픈 사건’은 널찍한 공원 한쪽에 '지진 기념 공원'으로 기념해 놓았다.

슬픔이나 극한 참담함을 지닌 '과거'는 이를 극복하고 화려한 변신을 한 '현재'에서 볼 때는 극복이 된 걸까. 좋은 결과는 슬픈 과거를 추억처럼 만들기도 한다. 아픔을 제대로 기억하는 기념은 참 의미 있고 필요한 일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일은 그렇게 잘한 것 같다. 여기까지 인정.

그러나 우리 역사와 관련된 그들의 기억은 무엇인가? 제대로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는가? 그들의 '지진 기념 공원'에서 이런 생각이 나는 거다.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생각하다.

히메지성을 갈 때 전철 밖으로 보이는 집들을 유심히 보았을 때, 처음에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참 답답하다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집들이 하나같이 깨끗하고 아담한 것이다. 의외였다. 왜 거기서 그들의 저력을 느꼈을까.

그들은 남들에게 보이는 것에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겉모습이 요란하지도 사치스럽지도 않다. 담백해 보이기도 하고 건조해 보이기까지 하다. 전철에 오가는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불만이 있다거나 지쳐 있다는 느낌은 없고 그렇다고 즐거움에 넘치거나 매우 활기차 보이지도 않다. 그저 주어진 생활을 묵묵히 엄살떨지 않고 사는 듯이 보인다. 영화 ‘철도원’에 나오는 공무원들 같다.


수많은 발품과 전철을 갈아타는 수고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메다역에서 다시 만화방을 찾는다.

만화를 사기 위해 어젯밤부터 싸돌아다닌 딸아이는 오늘 또 우메다의 기노꾸니아 서점을 찾으러 간단다.

오늘은 성공이다. 오매불망하던 만화를 찾은 거다. 가지고 있는 용돈을 다 털어야 할 정도로 비싸 빈털터리가 되었지만 딸아이는 세상을 얻은 표정이다.... 장하다.

교토


한큐교토본선 아라시아마 역에 내리다. 한적한 시골에 온 듯하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넓고 긴 保津川이 흐르고 있다. 길이 250m의 다리 토게쯔교(渡日橋)를 건너면 산책로 공원이 이어진다. 날이 따사로워서 강을 따라 유유히 걷는다.


이제 절 순례 차례다.

버스를 타고 코류지(廣隆寺)로 가는 것은 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1호란다) 하나를 보러 가는 거다. 백제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이랑 아주 유사한 불상, 안내서에도 삼국에서 전래된 것으로 쓰여 있다.

거리에 장난감처럼 전차가 다닌다. 게이후쿠전차. 이것을 타고 료안지(龍安寺)로 간다.

15개의 돌이 섬처럼 놓여있는 모래정원,‘ 카레산스이’ 정원이라 한다. (‘카레산스이’(枯山水)-돌과 모래로만 산수를 표현한 정원. 네이버지식검색)

흰 모레로 쌓은 모양들이 고요하고 독특한데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방장마루에 걸터앉아 뜻 모를 정원을 보며 뜻을 구하고자 하지만 알 길 없다. 한참 멍 때리는데 잠시 아득할 뿐이다. 안방장 뒤뜰 오유지족(吾唯知足)에 나타난 재미있는 의미도 언젠가 깨닫게 되길....


그다음은 金閣寺.

2, 3층을 금박을 입혀 유명한, 1955년에 복구된 절이다. 연못에 비친 금각사와 나무들의 모습이 아름답다. 일본은 뭘 구경하려면 順路라는 표시를 달아 주욱 돌게 만들었다. 길을 고민할 것 없이 볼 수 있는 것은 빼놓지 않고 볼 수 있게 해놓은 것이 좋다.


교토역으로 가서 청수사(키요미즈데라)행 버스를 타다.

큰 절이다. 올라가는 길 양 옆으로 도자기를 비롯하여 일본 과자, 이런저런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늘어서 있는데 구경하는 것이 재밌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절인가 보다. 평일 늦은 시간인데도 일본인이 많다. 본당 무대에서 기념 촬영한 후 길게 줄을 서 오또와노따끼라는 물을 받아먹는다. 이게 맑은 물(淸水)이라는 뜻. 스님들이 늘 이 맑은 물을 받아마셨대나 하여.


전통 여관

간드러진 인사와 함께 할머니가 그들의 전통 방식에 따라 저녁식사를 준비해 주신다.

음식이 우리의 입맛에 크게 다르지 않아 맛있게 저녁을 먹는다. 간을 내놓는 듯한 말투와 친절에 몸이 근질거리기는 했지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이불이 다 깔려있다. 이런...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를 해본다. 온몸으로 가벼운 입놀림으로 그들처럼. 역시 간드러진다. 우리끼리 자지러진다.

여관에 딸려 있는 ‘대온천장’이라는 ‘조그만’ 목욕탕에 가서 몸을 담근다. 온몸이 좌악 풀어지면서 세포가 다시 살아나는 듯하다.

오사카의 좁은 호텔이 아니라 널찍한 다다미 이불 위에 몸을 눕히다. 아이구 좋아라.

오래간만에 넓은 다다미방에서 자고 나니 그렇게 산뜻할 수가 없다.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여관을 나오는데 비가 온다. 멀리 산에 안개가 피어오르고 그치는가 했는데 다시 굵어진다. 잠시 난감했으나 이국에서 비 오는 날은 그 나름 분위기가 있으리. 편의점에서 우산을 4개 사들고 오늘 일정을 시작하기로 하다.


同志社대학에 있는 윤동주 시비를 보러 가다. 조그만 연못 옆에 윤동주의 시비와 정지용의 시비가 나란히 비에 젖고 있다. 정지용은 23년에서 29년까지 영문학부에, 윤동주는 42년에서 45년까지 문학부에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시비에는 자필로 쓴 서시가 새겨져 있는데 비가 오니 그런가 분위기가 더해져 뭉클하다. 용정에서 용정중학과 그의 시비를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이 다시 인다.

우리 아이들은 우리 만큼의 감흥은 일지 않는 것 같다. 여행을 다닐 때 아이들의 반응이 이렇게 시큰둥하면 마음이 흔들린다. 아깝다고 해야 하나 아쉬움이라 해야 하나 이런 것.....

우리의 경복궁 같은 교또교엔을 둘러보고 은각사로 가는 버스를 탄다.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바로 이어진 ‘철학자의 길’을 만나다. 하천이 흐르고 양쪽으로는 벚나무가 늘어서 있고 하천 저쪽으로는 조그만 정원과 나무들로 꾸며진 집들이 이어져 있는데 참 정갈하고 예쁘다. 아파트 말고 저런 집다운 집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봄이면 이 길이 너무 근사하겠다. 1.8Km의 거리라는데 은각사까지 주욱 이어져 있고 은각사 지나서도 길은 계속된다.

처음엔 누구의 별장이었다는 이 절은 정원 같이 꾸며진 일본 절의 전형적인 특징이 드러난다.

야트막한 산을 끼고 順路로 따라 절을 주욱 도는데 전망대에서 바라본 절의 풍경은 지금까지 본 절 중에서 단연 으뜸이다. 돌아내려오는 길이나 은각(긴까꾸), 본당과 동구당, 후지산의 모형을 한 모래탑이 있는 카레이산스 정원에 반하겠다. 은각사가 우리나라에 있다면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이나 꽃이 피는 날이나 자주 찾는 절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케이한 전철을 타고 오사카로 돌아오다. 약 1시간 거리인 걸 보니 우리로 치면 고베나 교토는 서울에서 인천, 수원 정도의 거리가 되겠다. 담징의 벽화를 보러 나라의 '호류지'는 꼭 가고 싶었는데 시간상 생략한다. 언제 또 올 날이 있을까와 시간이 매우 촉박하다는 사이에서 갈등에서... '나중에 기회 되면 다시'로.


도톤보리로 나간다. 오늘 오사카 마지막 날인데 초밥뷔페에 가서 드디어 우리 아이들의 '스시 먹기' 실력을 떨치게 되다. 우리 넷이서 약 80 접시. 엄청 먹고 호텔로 돌아오다. 여행 다니면서 느끼는 거지만 우리 식구는 정말 잘 먹는다.


삿포로


새벽부터 서둘러 공항으로 간다.

일본 동부 쪽으로 눈이 많이 오고 있어서 비행기가 결항한다는 안내가 계속 뜨고 있다.

삿포로에도 눈이 많이 내리고 있다는데 다행히 삿포로행 8시 40분 비행기는 예정대로 출발하고 예정된 시각에 도착하다.


JR쾌속을 타고 삿포로역으로 와서 동풍선 전철로 갈아타고 호스스스키노역에 도착. 전철역을 나오니 바로 앞에 호텔이 떡허니.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여행 중 가장 빨리, 쉽게 찾은 숙소다.

카운터에서는 익숙한 친절이 줄줄 흐른다. 이른 체크인도 해주고 더블 침대가 있는 방을 준다. 도시 오사카보다 확실히 땅이 좀 여유 있나 보다. 심신이 안정되는 느낌. 짐을 얼른 풀어놓고 밖으로 나간다.

로비에서 컴퓨터를 발견한 아이들이 100엔을 넣고 인터넷 한판 해주시고.


삿포로의 음식 세 가지, 라면, 맥주, 유제품.

유명하다는 삿포로의 라면집으로 간다. 라면요꼬조. 된장라면, 간장라면, 그리고 무슨 해물라면.. 후루룩 쩝쩝 잘 먹는다. 그러나 뭔가 다르다. 짜고 느물대는 맛.

다 먹고 나서 하는 말은 "역시 라면은 우리 것이 제일이여."


훗까이도 대학엘 가기로 한다. 겁 없이 택시를 탔다. 길은 엄청 막혀 제자리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미터기는 계속 올라간다. 2000엔까지 그냥 올라가는 순간 우리는 "여기서 세워주세요!"를 외친다. 걸어가는 게 빠르겠다. JR삿포로역에서 찬바람 쌩쌩 이는 곳을 걸어서 10분 정도 걸어가니 정문이 나온다. 학교는 무지 넓은 듯하고 눈이 많이 쌓여 있는데 방학이라 그런지 사람도 잘 안 보인다.

"우리는 여기 왜 왔는가?"

유명한 대학이기도 하고 관광지이기도 하니까 오긴 했는데 오늘은 영 어색하고 춥다. 이 추위에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대학교라니.... 박물관에 들어가 몸도 녹일 겸 이것저것 구경하는데 무슨 세미나가 열리고 있다. 방학이고 일요일인데도 저렇게 진지하게 모임을 하고 있네.

맥주박물관에 가려 했으나 춥고 다리 아프고 지치고...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애들 데리고 맥주박물관, 돌아가자.


백화점 지하 식료품 상가에서 알뜰하게 장을 봐서 숙소로 돌아와 저녁을 차린다.

스시와 샐러드와 이것저것.... 꿀맛이다.

내일은 오타루를 가고 다음 날은 온천엘 가면 이 여행은 끝이다.

동경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는 샘과 통화를 하는데 나를 부러워하고 있다. 자기는 공부한다는 명분으로 공짜로 1년 반 휴식하고 있으면서...

눈이 밤새 내린 듯하다. 많이도 아니고 조금도 아니고 꾸준히 하얗게 펄펄 내린다. 종일 그렇다. 아침에 호텔 조식을 맛있게 먹다. 오사카와는 비교도 안 되게 잘 나온다. 여행을 다니면서 아침(물론 아침뿐 아니지만)을 꼬박꼬박 맛있게 잘 먹는 것은 하루를 종일 걸어 다니는 우리 같은 여행객들에게는 보통 든든한 일이 아니다.


전철을 타고 초콜릿공장엘 간다. ‘이시히 초콜릿팩토리’.

만드는 과정과 전시물도 보고 선물용 기념품을 사고 커다란 창 너머 끊임없이 내리는 눈을 보면서 차도 마시고 오전 일정을 보낸다. 선물을 사는데 포장이 세심하다. 과대포장이라 할 정도로 몇 겹의 포장과 정성을 쏟는다. 선물하기에 딱 좋게, 사고 싶게끔, 상품이 많다.


오타루

영화 ‘러브레터’에 나온 도시 오타루다. 오고 싶었던 곳이다.

오르골가게에 가기 위해 미나미오타루역에 내린다. 눈은 끊임없이 펄펄 내리고 역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다. 작은 시골역, 낯선 땅에 우리만 남겨져 있는 이 낯선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식구들도 없고 혼자 이 상황을 맞으면 어떤 느낌일까. 완벽한 낯섦과 쓸쓸함일까. 그것도 느껴보고 싶다.

오타루오르골당이 나타나자 어디에 있었는지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졌다. 마침 가게 앞에 있는 커다란 시계에서 김이 나더니 음악이 나온다. 재밌고 신난다. 가게 안에는 수많은 종류의 오르골들이 있다. 귀하고 비싼 오르골이 전시된 2층, 그리고 3층까지 빽빽하다. 사람들은 더 많다.

난 오르골이 뭐였는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많은 종류의 신기한 오르골이 있다니... 하나 사고 싶다. 고심 끝에 첼로 연주하는 예쁜 도자기 오르골을 고른다.

눈은 굵게 내리고 있다. 또다시 시계에서 팬플룻연주에 삑사리가 나는 연주가 나온다. 웃음이 터진다. 유럽풍의 건물들과 함박눈이 어울리면서 작은 유럽의 도시에 온 듯한 분위기다. 운하까지 걸어간다. 여름밤이라면 더 황홀했을 것 같다. 겨울은 밤이 너무 일찍 오고 춥고 어둡다.


JR오따루역에서 6시 40분 열차를 타고 삿포로로 온다. 삿포로가 벌써 익숙하고 우리 동네 같다. 어제와 같이 백화점 상가에서 음식을 사들고 호텔로 들어온다. 눈은 끊임없이 내리고 있었다. 아무도 눈에는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바람이 불고 공기가 거기에 존재하듯이 눈은 그렇게 내리고 습관처럼 내리고 있다. 커튼을 젖히니 눈이 제법 심상치 않게 휘날리고 있다. 옷을 껴입고 나간다. 차도나 인도나 거리에는 발이 푹푹 빠지게 눈이 쌓여 있고 차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그냥 달리고 있다. 12시가 다 되어가는데 젊은이들이 많이 나와 있다. TV에서 성년의 날 기념으로 젊은이들이 나와 토론을 하는 프로를 보았는데 오늘이 성년의 날, 일본의 공휴일이란다. 오오도리공원 TV탑까지 걸어간다. 삿포로 눈축제 때는 이 공원에서 많은 행사가 진행된다니 멋지겠군... 눈은 쏟아졌다 멈췄다를 반복한다. 아, 진정 눈의 도시다.


오늘은 삿포로 시내를 돌고 노보리벳츠로 가는 날이다. 호텔에 짐을 맡겨놓고 걸어서 삿포로역 쪽으로 간다. 눈은 무릎 아래 발목을 덮고 있다. 오오도리 공원 기념탑 앞에서 눈싸움 한바탕 한다.

시계탑 앞에서 포즈, 구 북해도청사를 간다. 붉은 벽돌로 멋지게 지어진 건물인데 내부는 입장료를 받는다. 글쎄 북해도의 역사를 알 필요가 있나. 통과. 대신 기념으로 그 앞마당에서 눈싸움 또 한판. 눈이 천지에 깔려있으니까. 그리고 공부 잠시하러 북해도 대학 식물원 온실에 가서 신기한 식물들을 보고 나오다.


노보리벳츠 호텔온천으로 가는 버스를 타는 곳, 센츄리 로얄호텔을 금방 찾다. 외국어는 다 가타가나로 되어있어 딸아이가 글을 읽는데 큰 몫을 한다. 우리들은 거의 문맹이었고 딸아이는 지독한 만화사랑 덕에 더듬거려 가면서도 잘 읽는다. 나머지는 우리가 때려 맞추면 되고. 버스 시간까지 약 30분이 남는다.


우리는 호텔에 짐을 찾으러 가고 아이들에게는 자유 시간을 주기로 한다. 아들 녀석이 좀 걱정은 되지만 전화번호와 장소를 단단히 일러주고 용돈 준 후, 모두 30분간 헤쳐 모여하기!

이런 시간이 미리 있었음 좋았을 뻔했다. 외국에 나와서 엄마아빠 따라 졸졸 다니는 것 말고, 혼자서 시간 보내는 기회도 가졌으면 좋았겠다 싶은데, 앞으로 참고하기로.


30분 뒤에 모여보니 딸아이는 만화방에 가서 만화 보고 새로운 만화 한 권 샀고, 아들은 아까 갔던 북해도청사에서 어슬렁거리다 돈도 하나도 안 쓰고 왔단다. 없어지지 않고 만났으니 됐다!

피자와 스파게티로 점심을 맛있게 해결하고 온천행 버스에 오르다. 모든 일정이 어긋남 없이 딱딱 맞아떨어진다. 일본의 잘 짜인 예약문화와 오차 없이 이루어지는 교통체계 덕이기도 하고 우리가 조심스럽게 안전하게 다니는 것이기도 하고, 감사.


노보리벳츠 (登別)

2시간을 버스로 달려 노보리벳츠 (登別) 호텔 온천에 도착하다.

카운터에서 안내원이 방에까지 들어와 예식을 갖추듯 부담스럽게 차를 따라주고 간다. 교토보다 규모가 큰 대형 전통여관(료칸)이다.


‘지옥의 계곡’에 오른다. 화산이 터진 산인데 거기서 아직도 뜨거운 물과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고 유황냄새가 진동한다. 5시 정도인데 날이 어두워 입구만 보고 내려온다. 한국인 관광객이 무지 많다. 호텔에 있는 온천엘 가다. 열 가지가 넘는 온천탕. 목욕탕이나 온천문화도 별로 땡기지 않았으나, 여기 온천을 보고 맘이 바뀐다.

특히 노천 온천! 노천으로 나갈 때 얼어붙는 듯 몸이 오그라들고 싸하더니, 탕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뜨거운 물이 내 몸을 휩싸고 마음이 사르르 가라앉는데 머리는 서늘하다. 한 몸에 이런 냉온의 감각이 동시에 일어나면서 온몸이 황홀해지는 순간을 느낀다. 그런데 그때 바로 머리 위 하늘에서 눈이 펄펄 나리는 거다.

와 이런 곳이구나, 다른 차원의 공간을 보는 것 같다.

엄마 생각이 난다. 온천을 무지 좋아하셨는데.... 오늘이 내 생일이다. 감사를 드리며.

저녁은 와인과 함께 근사하게 뷔페로 먹는다. 여행 중 가장 세련된 음식들이다. 우리가 이렇게 호화로울 수 있다니. 오늘은 그냥 막 행복하다.

몸은 이미 많이 피곤한데 아이들은 수영장엘 간다. 수영장이 캡 좋단다. 얼마나 좋을까...

여행 마지막 날이다. 시간은 이렇게 막 흐른다.


돌아오는 날, 인천

비행기가 지연된다. 이유는 모르고 늦어서 죄송하다는 안내가 한번 나온다. 우리나라 항공....

'일본항공이면 그럴까, 얼마나 상세하게 몸 둘 바 모르게 안내를 할까'라는 생각을 하는 나를 보다.

일본에 며칠 머물면서 그들의 정확함. 소박함. 정직함. 넘치는 친절함, 부당함이 없는... 이런 것들을 느낀다.


난 그들이 그렇다는 게 속상하기도 한데 이 마음이 불편하다.

정치적으로 지도급에 있는 자들이 정치적인 색깔을 가지고 선동하는 것이나, 국수적이고 폐쇄적으로 일본을 이끌어가는 것은 불행하고 사악한 짓이나, 평범한 일본인들의 시민정신은 좀 다른 것을 느낀다.

백화점은 물론 지하철의 화장실에도 비데가 설치되어 있고 그들의 전자문명이 발달한 것은 그냥 그러려니 한다.

그러나 거리가 깨끗하고 담배를 피우면서 지나가거나 침 뱉는 사람을 못 본 거 같고, 역마다 자전거들이 빼곡히 세워져 있고,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들이 별로 없고 대부분 수수하고, 집들도 아담하고 수수하고 예쁘고, 대중교통이 발달하고 편리하고 시간도 잘 지키고, 친절하고 등등 그들의 일상의 소소한 것들을 보면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

예전의 아시아 여행처럼 '우리나라 최고!'라는 아이들의 감탄사는 터지지 않았다.

짧기도 했고 가깝기도 했고,

여러 모로 발전하고 편리한 나라이기도했고,

우리 형편에 화려한 여행이기도 했고,

고생 좀 덜한 여행이기도 했고.

아이들은 그랬으리라.

어른은 마음이 단순하지 않았으나...

(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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