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교직 은퇴 기념으로 언니들 셋과 조카를 데리고 다섯 명의 여자가 걷기 여행을 나서다.
올레길 걷고, 맛난 것 먹고, 수다 떨고, 온천하고 이렇게 다닐 거다.
얼마나 행복하고 평화로운 여행이 될지 모두가 기대만발이다.
나는 며칠 전부터 일어 공부다, 숙소 예약이다, 패스구입이다... 가이드처럼 다녀야 하는 여행이어서 준비할 것이 많다. 딸아이가 숙소 예약과 레일패스 구입 및 버스 편 등을 알아보고 해결해 주고, 그가 보험이랑 와이파이에그 해결해 주고, 나는 머릿속에 현장에서의 일정을 새겨두고 준비할 것들을 점검한다.
무척 신경은 쓰이지만 결국은 잘 다닐 것이고 서로 좋은 시간이 될 것을 믿는다.
이 여행 이후에는 시댁 형님들과의 패키지여행을 계획해 놓았다. 같은 규슈이며 같이 다섯 명의 멤버이며 같은 효도여행의 성격이다. 양쪽에 해외여행이 처음인 분이 계시고, 그동안 혼자 쏘다닌 것이 매우 미안하기도 하고, 학교를 잘 마칠 수 있게 도움을 준 분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자 떠나는 의미 있는 여행이다.
첫날
1시 후쿠오카 공항 도착, 입국 수속 줄이 길다. 지문 찍고 사진 찍고 참 꼼꼼하게도 한다. 공항 밖에서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국제선으로 와서 거기서 지하철을 이용 하카타역까지 두 정거장을 간다. 하카타역은 엄청 크고 번잡해 언니들 잃어버리지 않도록 정신을 바짝 차린다.
일단 기차에서 먹을 에끼벤(도시락)을 사기 위해 상점 찾기, 각자 마음에 드는 도시락을 고른다.
그리고 3일짜리 북규슈레일패스를 교환하러 간다. 1인당 8500엔!
벳부까지 왕복을 해도 아마 1만 엔이 넘을 텐데, 이 패스만 있으면 3일간 마음대로 기차와 지하철을 탈 수 있다. 외국인 여행객이 저렴하고 편리하게 다닐 수 있도록 혜택을 주는 유용한 패스다.
여권과 함께 지정석 4회와 패스를 발급받는데 줄이 길다. 꼼꼼하고 친절하고 정확하게 하느라 긴 시간이 걸린다.
소닉기차를 타다. 우리가 올라타자마자 기차는 떠난다. 시간 기가 막히게 잘 맞췄다. 기차는 한가하고 지정석이라 쾌적하다. 정신을 차리니 배에서 신호가 온다. 도시락! 연어나 소고기 등 다양한 재료로 만든 종류의 도시락인데 1인당 11000원 정도 한다. 기차에서 이 일본 도시락을 먹고 싶었다. 소풍 가는 것 같다. 오물오물 먹으며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말해 무엇하랴. 산뜻한 전원이 시원하게 달려온다. 두 시간 후면 벳부역에 도착할 것이다.
온천 마을 벳부역에서 10분 거리에 있다는 숙소 시라기쿠(白菊)를 찾는다.
걷다가 확인차 지긋한 분께 길을 한번 물으니 몸을 돌려가며 한참 설명해 주시는데 그냥 주욱 걸어가면 되는 것을 그렇게 진지하고 상세하게 가르쳐준다. 일본 여행 중 ‘친절함’의 메뉴가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하다.
화실 방 한 칸에 짐을 풀고 얼른 가운을 걸쳐 입고 온천으로 직행하다.
오매 좋은 거~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게 없다.... 몸이 다 풀어진다. 내 마음에 안심이 자리하다.
저녁은 ‘가이세키’.
온천으로 불그스레해진 얼굴들이 맥주 한 잔과 함께 더 살아난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풀어지는 밤.
둘째 날
숙소의 아침 식사가 매우 만족스럽다. 화려하진 않지만 음식이 깔끔하고 맛이 있고 참 정성스럽다. 일본이 막 좋아진다. 우리 모두 행복해한다.
오늘은 벳부올레 걷는 날!
규슈올레는 제주올레의 도움을 받아 올레길을 만들었다. 화살표나 간세 표지 등이 제주 올레와 비슷하다니 그 표지를 따라 걸으면 될 것이다.
단, 제주의 섬을 한 바퀴 돌 수 있도록 한 코스의 종점이 이어진 코스의 시작점이 되도록 길을 이어놓은 제주올레와 달리 규슈올레는 한 코스 한 코스가 다 떨어져 있다는 것.
제주올레와 길이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고, 규슈올레의 또 다른 매력이 있을 것을 알기에 많이 기대되는 길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두 코스를 걷기로 한다.
호텔 앞에서 7시 39분에 올레 시작점인 ‘시다카호수’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버스는 오지 않는다. 일정을 계획하고 조사할 때 제일 이해 안 되고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는데, 이것이 안 되면 다른 버스를 타고 ‘토리이’라는 곳으로 가야 한다. 근데 이 ‘토리이’라는 곳이 어딘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다. 어느 지도에도 나와있지 않고 안내도 없다. 다행히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이 부분에 대한 정보를 조금 얻을 수 있었다. 일단 ‘토리이’라는 곳에서 내려서 걷는다는 것.
호텔 앞에서 버스가 오지 않아 지나가는 회사원 아저씨를 붙들고 이러쿵저러쿵 물어본다. 가는 길을 멈추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몬알아듣겠다. 서로 못 알아듣지만, 결국 우리가 기다리는 7시 39분 37번 버스는 여기 오지 않는다는 것, 그때는 이미 시간이 10여분이 지나 시간 잘 지키기로 유명한 일본의 행태에 어울리지 않는, 그래서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서로 알다. 인사하고 바삐 걸어가는 그 아저씨는 정말 착하고 고맙다.
벳부역까지 간다. 8시 20분 출발하는 36번 버스를 타기로 한다. 그런데 1일 자유권을 900엔에 사면 하루종일 벳부를 돌아다닐 수 있다니 그것을 사기로 한다. 그러나 안내소는 문을 닫았고 8시 30분에 나타난다고 쓰여있다. 표를 팔 만한 곳으로 들어가니 파출소인 것 같다. 표 어디서 사냐고 물어보니 두 경찰 아저씨가 서로 눈짓을 하더니 한 사람이 직접 나온다. 표 파는 곳까지 직접 안내할 모양새다. 따라오니 아까 문닫힌 안내소이다. 여기서 사면 된단다. 그런데 8시 30분, 우리는 8시 20분 버스를 타야 한다고 하니 곤란하다고 어떡하냐는 표정으로 그만 가보신다. 인사드리고 그냥 1일권은 포기하기로 하다.
버스줄은 길다. 여학생들이 줄을 서있다. 36번 줄이냐니까 그렇단다. 버스는 정확히 오고 버스를 탄다. 다행히 자리가 있고, 우리 뒤에 여학생들이 앉아서 재잘거린다. “도리이버스 스탑, 오네가이스마스(도리이버스정류장, 부탁합니다.)” 이렇게 얘기하니 몬알아듣는다. 한자 써온 걸 보여주니, “아, 토리이!”, “예, 토리이!” 알려준단다. 버스는 유후인까지 가는 버스다. 학생들은 그쪽까지 통학하는 모양이다. 산으로 올라가는데, 한 20여분 걸린다고 들었는데 30분이 지나도 소식이 없다. 아직 안 왔냐고 묻는데, 폰에 정거장 표시를 알려준다. 지금은 여기인데, 토리이는 여기다. 음 대여섯 정류장을 더 가야 한다. “땡큐! 중학생?” 물어보니, “고등학생!” “고등학생? 난 한국의 중학교 선생님이야. 국어선생님”, 얘네들, “와!”하고 놀란다.
물론 “은퇴했어~” 이 말은 안 했다.ㅎ
다음 정류장이 토리이란다. 계산하고 내린다. 일본 버스비 계산 방식이 참 재밌다. 승차할 때 번호표를 뽑는다. 거기 번호가 적혀있다. 내릴 때 앞에 조그만 전광판에 번호별로 내야 할 요금이 적혀있다. 내가 탈 때 3번을 뽑았으면, 내릴 때 3번 밑에 ‘500’ 이렇게 표시가 되어있다. 그러면 500 내면 된다. 거리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택시와 같은 개념이다. 대중교통비가 정말 비싸다. 재밌다. 운전사 아저씨가 손가락으로 ‘시다카호수’라고 그 길로 가라는 표시를 해준다. 감사! 엄청난 정보다. 내려서 건너편의 버스정류장에서 벳부로 돌아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한다. 반대편 주유소에서 왼쪽으로 약 20m 가면 정류장이 있다는 표시, 아, 블로그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블로그 주인 참 고맙네. 이런 얘기였구나. 내가 여행기를 쓰는 이유 중의 하나, 누군가에게 요긴한 도움이나 힌트가 될 수 있다는 것.
큰길로 걸어 들어간다. 걸어가다 보면 ‘시다카호수’가 나올 줄 알았다. 그러나 올레길 표지가 없고, 아무리 걸어도 호수는 나오지 않고 그냥 저 멀리 유후다케산이 보이고 올레길이 이어진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시작한 점은 시다카호수를 지나온 길이었고, 나중에 다시 시다카호수에서 우리 시작점까지 오면 끝나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토리이’는 이 올레의 약 1km 지나서 있는 길이었다. 이걸 알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디에도 없었다....
길은 너무 아름답고 마음에 든다. 대나무길, 삼나무길, 숲길, 확 터진 길, 농토길, 낙엽길, 그리고 여기저기 나타난 유후타케 산, 아, 나는 이산에 온전히 마음을 뺏겼다..... 날은 쾌청하며 한낮엔 더울 정도, 그러나 걷기엔 참 좋은 길이다. 온전히 우리 다섯만 걷는다. 세월아 네월아 걷는다. 그러다 커다란 삼나무, 그리고 나타난 그리도 반가운 ‘시다카호수’, 그리고 ‘시다카레스트’라는 기념품점..... 반갑다 반가워. 벚꽃이 피면 너무도 아름다울 것 같은 호수, 많은 사람들이 텐트도 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가을이면 환상적인 길이 될 것 같은 이 길, 점심을 먹고 맥주 한 잔과 커피도 마시고 우리는 다시 걷는다.
시다카레스트의 주인에게 길을 안내받고 득도한 듯한 그 길, 우리가 시작한 ‘토리이’까지 약 1킬로 남짓한 길을 걷는 것이다. 아 정말, 우리가 아까 버스에서 내려 시작한 길이 나온다. 반가움. 버스 시간은 2시 56분에 있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54분, 정확히 2분 후에 저기서 벳부로 가는 버스가 나타난다. 36번. 아 신통방통하여라. 뿌듯하여라.
가는 길에 지옥온천 구경을 하기로 하다. 약도를 보니 중간에서 내리는 것이 낫겠다. 운전사 아저씨가 건너가서 타면 된단다. 차를 내리는데 할머니가 다가오신다.
"어디 간다고?"
“우미지코쿠요”
할머니 열심히 고민하신다. 버스가 순환한다는 뜻이리라. 한 바퀴 빙 돌리신다.
“근데 저 건너편에 있다고 했어요.”
할머니가 그리 가라고 하신다. 감사합니다!
그냥 지나가다가 다른 이가 얘기하는 것 듣고는 참견하시고 도와주시려 하는 이 친절한 일본인... 곳곳이 다 친절이다. 온몸으로 친절하시다. 우리는 친구들끼리 가끔 이런 것을 '오지랖'이라고 얘기했는데 수정해야겠다. '친절'!
버스를 타고 ‘해지옥’을 구경한다. 온천을 구경하는 것이다. 족욕을 하면서 피로를 푼다. 언니들이 참 신기해하고 좋아한다. 버스를 타고 벳푸타워 앞에서 내리다. 바다를 잠시 보고 저녁을 먹으러 엄청 헤매다. 그리고 백화점 식당가에서 맛나게 먹다. 곤하다. 숙소로 돌아와 다시 온천으로 직행. 어제와 달리 남녀탕이 바뀌었다. 아주 넓고 쾌적하다. 흐, 좋은 것, 오, 뿌듯하고 긴 하루.
셋째 날
역시 아침을 기분 좋게, 조금 여유 있게 먹고, 예쁜 정원도 잠시 구경하고 체크 아웃한다.
이 호텔은 고급지지는 않으나 품위 있고 정성을 다하는 숙소, 역에서 접근성도 좋고 기분 좋은 호텔이다.
다시 이용한다에 한 표.
다케오 온천 올레길 가는 날.
기차로 하카타역으로 와서 오늘 묵을 호텔을 바로 찾다. 역에서 완전 가까운 곳이다.
일단 짐만 맡기고 역으로 가서 미도리 열차를 탄다. 다케오온천역으로 고고!
약 70분간 역시 쾌적한 바깥 풍경을 보여주며 달린다.
12시 41분 다케오온천역 도착, 유명한 에끼벤집 카이로도에서 시가규 스키야키 벤토를 산다.
품질 좋은 소고기로 만든 덮밥이고 에끼벤 대회 3회 연속 우승한 도시락이란다. 가격은 23000원 정도, 몇 개 다른 종류의 도시락도 고르고 뿌듯하게 가게에서 나온다. 흠 걷다가 먹는 이 도시락은 또 얼마나 맛있을 것인가. 생각만 해도 기분이 업!
올레길 걷기 시작!
작은 도시 길을 걷다가 숲으로 산으로 오르는데 역시 깨끗하고 좋은 숲길이 이어진다. 싸 온 도시락을 먹다.
오늘은 작은 언니의 생일이다. 가장 맛있고 비싼 도시락은 오늘의 주인공에게! 늙으시고 바쁜 엄마를 대신해 학부모 역할을 해준, 내게 너무도 고마운 언니다. 축하!
전망대에도 오르고 대나무숲도 지나고, 그러다 내리막길에서 저쪽을 바라보니 뭔가 근사한 건물이 나타나는데, 앗, 끝나고 들르려 했던 그 유명한 ‘다케오시 도서관’이다. 이렇게 중간에 도서관이 나타난다고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지만 반가운 마음에 길을 건너가 도서관으로 들어간다. 서점 겸 작은 도서관이다. 너무 예쁘고 멋져서 사진을 막 찍는데 한 사람이 다가와서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되고요, 저쪽에서 찍으시면 됩니다.'라는 느낌으로 손가락을 가리킨다.
"아, 예."
둥그런 모양의 도서관은 크지 않지만 아담하고 조용하다. 몇 명이 책을 보고 있고 한쪽 스타벅스에서는 차를 마시며 책을 보는 사람들이 있고 분위기가 좋다. 사람들이 오가서 공부가 잘 되려나 모르겠으나 그러나 우리 동네에 이런 도서관이 하나 있으면 난 매일 가서 책을 읽고 차를 마시고 할 것이다.
돌아오는데 절이 하나 나오고 3천 년 된 녹나무 안내가 되어있다. 이상하다. 지도상 벌써 녹나무가 나오면 안 되는데.... 처음에 도서관으로 건너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옆으로 올라가서 약 6킬로미터 한 바퀴 돌고 와야 도서관이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6킬로를 빼먹고 돈 것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잘 됐다. 다 걸었으면 무지 힘들었을 거고, 하카타에 너무 늦게 돌아오게 되었을 것이다.
오늘 저녁은 회전초밥집 가서 스시 맘껏 먹다. 하카타시티 옥상에 올라가서 시내 야경을 보면서 촛불 하나 켜놓고 생일 축하 의식을 치른다. 언니는 매우 행복해하며 고마워한다. 물론 우리도 그렇다. 언제 우리가 또 뭉칠지 모르지만, 어쨌든 잘 걷고 잘 다닐 수 있도록 건강하게 살기.
마지막 밤이다. 오늘 하루도 참 잘 보냈다. 안전하게 평화롭게. 우리는 모두 감사해하고 있다. 서로에게.
넷째 날
캐널시티로 나가다. 작은 운하가 있고 벼룩시장이 열리고 10시 시작을 알리는 분수가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물처럼 움직이는 곳, 우리는 마지막 한가로운 시간을 보낸다.
공항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가는데 버스가 예정 시간보다 늦게 오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시간을 지키지 않은 버스였으나 관광객을 꽉 채우고 온 버스를 보고 이해하게 된다.
일본의 버스는 절대 사람이 움직일 때 움직이지 않으며 서두르지 않는다. 늦은 것 이해하기로.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우리는 시간을 잘 맞춰서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여자들만의 여행이 좀 더 평화롭다는 것을 알았다. 서로 배려하고 스스로 하고 잔일은 먼저 하려는 마음이 편하고 평화로운 여행을 만드는 것 같다. 말 그대로 '힐링 여행'이다. 모두 만족하며 감사하며 즐겁게 누렸다. 나보고 베스트 가이드라고 엄지 척을 해준다. 그들이 내게 보내는 감사를 안다. 그러나 내가 더 감사한 마음이다. 잘 다녀주고 잘 먹고 즐겁게 걸어줘서 참 좋다. 아, 이번 여행 110% 만족이다.
2. 딸아이가 가이드, 오키나와 가족여행 2019
첫째 날
딸아이가 거의 모든 것을 계획하고 예약하고, 현지에 와선 가이드 역할을 할 것이기에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길을 떠나온다. 가족패키지라고 해야지. 키워놓은 보람이 있군 하며 뿌듯해한다. 녀석들과 언제 여행을 또 갈 수 있을까 싶고 오랜만의 이런 여행이 감회가 새롭다. 우리가 계획 짜고 데리고 다니던 녀석들이 어느덧 커서 엄마 아빠를 안내하다니... 이렇게 시간은, 세월은 흐르는 것일까.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으로 일본의 가장 남쪽에 위치한 따듯한 섬이다.
우리의 제주도처럼 뭔가 일본인 것 같으면서도 일본 같지 않은 땅, ‘사연’이 많은 섬이라 하여 기대된다.
차를 렌트하고 일단 요기를 하러 달린다. 서울은 온통 미세먼지로 뿌옇고 목이 멘다는데, 여기는 20도 정도의 초여름 날씨와 상쾌한 바닷바람과 청명한 하늘로 지근거리의 환경이 이렇게 다르다는 것이 낯설고 부럽고 미안하다.
한국과 달리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으며, 모든 것이 반대 방향이나 이미 뉴질랜드에서 큰 캠핑차를 몰며 경험을 했으니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 모든 객실이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으로 깔끔한 호텔에 묵는다. 파도는 잔잔하고 물은 깨끗하고 따듯하고, 모래사장은 부드럽고 천만년의 세월이 깎은 흔적인 듯한 작은 석회의 돌들은 마치 조개껍데기처럼 모래사장 위를 덮고 있다. 새롭고 신비롭다.
노을이 진다. 바다는 여름바다도 아닌 것이 겨울바다도 아닌 것이 그렇다고 봄바다 가을바다도 아닌 그냥 온전한 바다. 무색 무념의 존재인 듯 그 자리에서 작은 소리로 파도를 철썩이는데 아마 수억 년을 그 자리에 그렇게 존재하지 않았을까.
둘째 날
아침 해변은 평화롭다. 조식을 먹기 전 걷다가 예쁜 조개 세 개 줍다.
식당에서 주웠다고 식탁에 올려놓는데 두 개밖에 없다. 어, 하나 어디 갔지? 제일 예쁜 건데... 헉, 옆자리로 기어가고 있는 그 소라게... 완전 깜놀이다. 죽은 듯이 소라에 들어가 있었는데, 숨 막혀 화석이 된 것인 줄 알았는데, 내가 손을 주머니에 넣을 때 얘가 움직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가슴이 뛴다. 바다에 갖다 놓아주다. 걔는 나보다 십 년 감수했을 것이다.
만자모. 코끼리 모양의 바위. 바닷가에 맞닿은 절벽, 기암괴석들이다. 우리나라 송악산 같이 그런 멋진 풍광이 있다. 그리고 섬의 북쪽 끝 ‘해도곶’으로 달려가다. 꽤 먼 거리에 있는, 햇살이 내리쪼이고 역시 뭐라 말할 수 없는 그런 바다다.
짧은 트레킹코스가 있는 국립공원으로 간다. 大石林山(다이세키린잔). 해도곶에서 육지 쪽으로 보이는 멋진 산이 그곳이다. 약 1시간 반 정도 걷는데 나무들과 암석들이 좋은 햇살 아래 매우 멋지고 아름답다. 남국 같고, 정글 같고, 원시림 같기도 하다. 특히 용수(반얀트리, 가주마르나무)의 그 얽히고설킨 수만 겹의 인연들은 입을 다물 수 없게 한다. 나무 하나가 도대체 몇 개의 나무들로 이어진 건지, 카메라 한 컷에 그 한 나무를 담을 수 없게 크고 넓고 길다. 이런 나무는 처음이다.
산과 나무를 보고 걸을 수 있어 좋다. 오늘은 이걸로 족하다. 수족관 쪽으로 차를 돌려 달리는데 시간이 폐장 시간이 되어 간다. 공원만 도는데 규모가 매우 크다. 꼬맹이 아이들과 함께라면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해양 공원이나, 우리 아이들은 다 큰 관계로 패스.
회전초밥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약 40 접시 먹었나 보다. 예전 80 접시는 전설로 남겨두자고 우리는 낄낄 웃는다. 이틀째 밤이다. 비가 흩뿌린다. 여행지에서 비는 좀 쓸쓸하다. 좋을 수도 있을 텐데, 외국에서는 그렇다.
셋째 날
흐리고 비가 흩뿌리는 하루. 바다 밑에 있는 자연 수족관으로 가다. 큰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듯, 셔틀버스를 타고 바닷가 다리를 건너 계단을 통해 지하로 내려간다. 약 1m에서 4m까지 돌면서 유리창 밖을 바라보게 되어있다. 원통으로 만들어놓고, 돌면서 바다에 있는 물고기와 생물들을 보는 건데 그 물고기들의 유유한 움직임이 아름답기까지 하다. 진정 이것이 물고기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자연수족관. 사람은 안에서 그들은 물에서. 저 바다 위의 수면은 파도가 치는데 깊은 이곳은 아주 고요하고 평화롭다. 물고기의 색이라 믿기 어려운 신비로운 색깔의 물고기들이 헤엄쳐 다닌다. 둥근 창에 눈을 주고 있으면 갑자기 이따만한 물고기가 나타나 우리를 쳐다보고 지나간다. 그런 느낌이지. 신난다. 어지럽다. 올라와서 리조트를 걸어 나가는데, 날 좋은 날 여기 1~2주 그냥 휴양하면 딱이겠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1월이 따사롭다.
‘아메리카빌리지’로 와서 이곳 햄버거로 점심을 하다. 오키나와미군기지가 꽤 넓게 이어져 있다. 미군이 아직도 일본에 주둔하고 있다는 게 뭔가 어색하기도 한데, 이쪽 동네 사람들이 가끔 미군기지 철수를 외치는 기사도 본 것 같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인가.
미국은 왜 '미군 기지 철수'라는 주둔국 시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남의 나라에 주둔하고 있을까?
내가 어릴 때는 미국이 고마운 나라였고, 젊을 때는 자기 나라의 자본 이익을 위해서 남의 나라를 점령하듯 주둔한다고 생각했고, 어른이 되어서는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애매한 각주를 달고 있다. 세상사 단순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평화를 지향하는 시민의 삶과는 관계없이 이익 당사자의 불순한 탐욕이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나하’로 내려와 수리성에 잠시 들르다. 세계문화유산이란다. 오키나와 궁전이자 성이었던 곳이 일본으로 편입된 이후 병영 정도로 격하된 듯하다. 일본 변방의 땅으로 본토에 대한 저항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국적이 불분명한 곳이란 느낌도 든다.
일본의 학생들 꽤 많은 인원이 수학여행 왔다. 우리나라 수학여행 모습과 같다. 교복 하며 단체로 움직이는 모습들이 우리나라 비슷하다. 일제의 영향이 잔존해 있는 것을 여러 부분에서 본다.
오키나와현 박물관, 한국어오디오 가이드와 함께 약 1시간 둘러보다. 오키나와의 역사나 아픔 등을 보고 싶어 들어왔는데, 건물은 크고 훌륭한데 의외로 1층에만 간단히 정리되어 있다.
숙소는 작지만 있을 것 다 있는 깔끔한 일본식 호텔이다. 단 렌트한 우리에게 필요한 주차장이 없다는 것.
코인 주차장을 찾으러 잠시 헤매고,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가는데 나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감도 없고 그냥 따라다닌다. 아이들은 구글맵 등을 이용하여 잘도 찾아다닌다. 역시 아이들이다. 나도 저거 쓰는 법을 좀 배워야 하는데...
넷째 날
아침 눈을 뜨기 전부터 빗소리가 들려온다. 바람도 세게 부는 것 같다.
오늘은 잠깐 아웃렛에 들르고, 온천하고 집으로 가면 된다. 비행기 소리 왕왕대며 들리는 작은 온천에 들른다. 첫날 갔던 테라스 가게들도 보이고 그 너머 바다도 보이는 노천온천이다. 여행의 마무리를 온천으로 할 수 있어 좋다. 한 시간 정도 머물면서 피로도 마음도 다 풀어진 느낌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공항에 앉았다. 3박은 역시 후딱 간다. 오랜만에 다 큰 아이들과 가족여행을 평화롭게 마친다. 공항 창 너머 활주로 건너편에는 파도가 세게 이는 바닷가의 모습이 보인다. 바다가 보이는 공항이라니 오키나와는 제주 같다.
공항 안팎과 활주로에서 일하는 사람들, 가벼운 여행객들의 소리, 늘 진지한 안내 방송 소리 등이 정겹다.
이 마음이 여유가 있어서일 게다.
3. 아이들이 가이드로, 다시 오사카 2023
첫째 날
이번 설엔 큰집에 모이지 않고 처음으로 우리 가족끼리 보낸다.
공항 여행객은 가족 단위로 많이 나온 것 같다. 예전에 못 보던? 우리가 구정 때 여행 가는 것은 처음이어서인가, 코로나 때문에 멈췄던 모든 것이 다시 풀리고 있는 느낌이다.
오사카는 우리나라보다 좀 따뜻하다. 내일부터 한국은 무쟈게 춥다고 하는데, 제주도보다 아래인 여기는 막 춥지는 않다.
공항급행 전철을 타고 난바로 약 40분, 또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 가서 '신사이바시역'에서 내려 걸어간다.
숙소는 일본식 아주 작은 콘도이다. 방 두 개, 작은 주방 겸 거실, 화장실과 샤워실.
있을 것만 있는 딱 일본식인데 우리가 묵는 1층은 창문이 없이 다 막혀있다. 이것이 아쉽지만 3박이니 그러려니. 좀 싸겠지.
도톤보리로 걸어 나간다. 예전에 왔던 그 거리가 기억난다. 게가 있는 가게, 어떤 남자아이가 달리는 그림. 아이들이 얘기해서 나도 기억난다.
고베소고기 먹다. 아들이 먹고 싶다는 것, 고베가 아니라 여기 오사카에서 먹다.
오마카세처럼 고기를 철판에 구워준다. 연세 드신 분들이 젊잖게 사진도 찍어주고 설명도 하면서 품위 있게 준비해 주신다. 우리 넷은 맥주에다 행복하다.
120g 4인분, 밥과 국물. 그리고 맥주.
이렇게 1시간 정도의 기분을 내는데 약 55만 냥 정도라고. 허걱...
좀 비쌌네. 많이 비쌌네. 그러나 이렇게 한번 먹는다. 우리가 한 외식 중 가장 비싼 거 아니었을까.
오래전에 런던에서 4만 원짜리 맛없는 스테이크 먹고 아까웠던 기억이 나는데 여기는 맛있어서 그나마 다행.
거리는 한국인이 많다. 모두 기분 좋은 얼굴이다. 됐다. 우리도 좋다. 걸어 들어오다.
아주 곤하다. 거의 기절할 정도다. 어제 공부 끝나고, 배드민턴 치고 완전 무리했나. 아니 나이를 먹었나...
둘째 날
한큐투어리스트카드를 사서 교토로 간다. 아라시야마역에 내리다. 기억난다. 그냥 강을 잠시 봤던 기억. 도월교, 카츠라강에 떠있는 오리들, 원앙 같은 새들... 특별한 풍경이 아닌데 여기가 유명한 관광지라네. 왜 그럴까? 아이들이 아라비카커피를 산다고 30분 넘게 기다린다. 유명한 집이라고, 글쎄 카페라테가 부드럽긴 하다만. 기다리는 동안 강가를 따라 마을을 걷는데, 아주 일본스럽다. 오래된 마을 같은데 조용하고 예쁘다.
민박 숙소도 있고, 고급 호텔도 고급 음식점도 온천도 있는, 며칠 묵고 싶은 생각이 드는 마을이다.
아, 관광지구나.
대나무숲길을 걷다. 우리 대나무와 다르다. 푸른빛이 감도는 굵은 대나무들이 완전 순수한 빛으로 하늘을 향해 뻗어있다. 멋진 풍경이다. 대나무숲이 끝나는 지점에 천룡사라는 절이 있다. 여기도 세계문화유산이란다. 동백과 매화가 피어있단다. 500엔을 내고 들어간다. 한 바퀴 돌다.. 연못이 있는 일본풍의 정원. 하늘이 예술이다. 잔잔한 연못에 예술이 그대로 반사된다. 외국인이 열심히 사진을 찍어준다. 사진 속에 환한 웃음이 반사되고 있다.
노란 동백과 매화... 걷는 동안, 마음에 뭔가 일어나고 있다. 이게 뭘까. 솔솔, 슬금슬금... 여행이구나. 여행을 왔구나. 여행을 다시 시작했구나. 맞아 여행이 이런 거였지. 이렇게 솔솔 피어오르는 행복이었지. 자유로움이었지. 새로움이었지. 감동이었지... 여행의 마음이 다시 떠오르는 것이었다.
코로나 이후 첫 여행이다. 3년 여 여행을 멈추고 여행의 맛을 잊었다. 오히려 국내를 다니거나 가까운 산을 걸으며 이 나라의 곳곳이 너무 아름다웠다. 굳이 해외로 나가고픈 마음도 없다.
그러던 마음이 아, 봄에 다시 오고 싶다. 이 아름다운 정원과 대나무의 봄을 보고 싶다... 이렇게 여행필이 살아나는 거다.
다른 길로 이 마을을 돌다. 중심가의 예쁜 집들과 가게들의 간판, 상품들이 일본이란 걸 알려준다. 좋은 느낌이다. 얘네 나라랑 사이좋게 지내면 얼마나 좋을까. 못된 짓 한 거 인정하고 사과하고 용서하고 협력하여 좀 좋은 이웃으로 살면 얼마나 좋을까. 높은 자리에 앉은 못되고 못난 놈들이 참 못된 사이로 갈라놓았다.
하여튼 어느 나라나 어느 조직이나 능력도 안 되고 지혜도 없는 자들이 맞지도 않은 자리를 탐하고 앉으면 다수의 선량한 사람들이 고생한다.
란덴아라시아마역으로 오다. 한 량짜리 란덴기차를 타고 교토 중심가로 오다.
참치덮밥집에서 점심을 먹는데 맛있는 된장국을 더 주지 않는다. 어휴, 그게 얼마나 한다고... 고약한 인심도 아니고 고약한 습성인가?
버스로 은각사. 여기가 참 좋았는데, 돌아보니 20여분 걸으면 끝나는 짧은 정원이었네.
오늘은 구름 많은 날, 예전에는 비가 왔었다. 날이 한번 쾌청해도 참 좋으련.
철학자의 길도 오늘은 길게 걷다. 역시 벚꽃이 피는 날 와야 하리. 아니면 그냥 개천을 걷는 기분이랄까.
버스와 전철을 타고 '후시미이나리신사'로 오다. 여우신사란다. 산 위까지 도리이(새가 있는 관문 경계)가 만 개 있다는데 걷다가 어두워져 중간 내려오다. 낮이면 다 걸어 올라갔다 오면 좋았을 텐데. 일단 걷는 곳이 있으면 난 그냥 마음을 뺏긴다.
2만 3 천보가 넘는 하루다. 어제보단 몸이 나아졌다. 거의 12시간을 자서인가. 여행 필도 받고 다시 단련된 몸으로 장착된 듯하다.
딸아이가 정말 애쓴다. 몹시 곤할 게다. 편하게 가이드해도 좋으련, 그 책임감에 많이 알아보고 준비한다. 우린 아무것도 몰라도 되고, 그저 잘 따라다닌다. 잘 먹고.
셋째 날
오사카우메다역에서 고베행 열차 약 27분 걸린다.
비도 오고, 고베 내렸을 때는 바람이 13(?) 정도 강속이다. 이건 태풍급 아닌가? 일본의 바람을 제대로 만나는 건가.
고베역 근처 라멘 전문점에서 라멘을 먹다. 난 돔베고기 같은 고기와 함께 그나마 담백한 맛인 기본 라면을 먹는데 아이들과 그는 벌건 기름 둥둥에 벌건 고춧가루 같은 것이 뿌려져 있는 요상한 비주얼의 라면을 후루룩 쩝쩝 맛있다고 먹는다. 나만 빼고 여행가 체질들 맞다.
커피를 일본 최초로 들여왔다나 최초의 카페라나 어쨌다나 그러한 카페, '니시무라스커피'에서 에티오피아 게이샤와 블루마운틴을 주문하여 마시다. 약 만원. 정말인가? 몇 알 넣은 건가?
게이샤 커피는 정말 부드럽다. 블루마운틴은 그 고급스러운 맛이 어떤 건지 잘 모르겠고.
목조건물로 우아한 카페의 창밖은 바람이 마구 분다. 썰렁한 거리, 그런 분위기를 커피 홀짝거리며 멍 때리고 바라보는 맛도 이국적이다.
'기타노인진칸'이란 곳, 외국인들이 멋지게 집을 짓고 그들의 마을을 만들어 살아온 거리란다. 유럽 풍의 거리와 집들이 고베를 오면 가볼 곳인 모양, 예전에 오지 않았던 곳이다. 날이 따뜻할 때 걸어 다니면 예쁘기는 하겠다.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고베 하노버거리로 오다. 예전에 왔던 곳이 기억나다. 고베 타워, 지진기념관... 바람 거세다. 으스스하다. 얼른 스타벅스로 들어가다. 여행지에서 너무 추우면 아무 생각도 안 난다.
걸어서 고베역으로, 그리고 기차 타고 오사카우메다역으로. 완전 복잡한 전철역 내부이다. 오사카의 인구가 8백만이 넘으니, 서울과 비슷한 사이즈다. 사람들 엄청 많고 전철역 엄청 복잡하고...
쇼핑 좋아하는 아들이 쇼핑을 하고 싶다 하니 각자 두 시간의 자유시간을 갖기로 한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만날 곳을 세세히 얘기하는데 격세지감이로다. 예전에 우리가 이 아이들에게 그랬지. 삿포로에서 잠시 자유시간을 갖고자 했을 때, 아들은 주변에서 빙글거리고 딸은 좀 멀리까지 가서 만화책을 사고, 우리는 '와 자유다' 하고 멀리멀리 돌아댕겼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아이들은 엄마 아빠 가이드하고 주의를 주며 지들은 날아댕기고, 우리는 실내에서, 쉬운 백화점 내에서 빙빙 돌고 있는 거다.
그러다 당이 떨어지는 느낌에 기운이 좌악 빠지고, 카페 가서 털썩 앉아 주스로 긴급수혈한다.
어휴, 빨리 밥이나 먹었음 좋겠다. 밖은 춥고 우리는 갈 곳이 없다.
아이들 만나 도톰부리로 오다. 회전 스시를 먹기로 하다. 먼저 찾아 들어간 곳은 80분을 기다려야 한다니, 일본어로 밥 먹고 사는 딸아이( 일본 만화를 그리 보더니 지금은 일본어 통역사를 하고 있다.)가 정보가 빠르다. 얼른 나와서 다른 넓은 회전스시집에서 배부르게 먹다. 맥주 한잔 하니 기분 좋지.
거리로 나오는데 눈발이 날린다. 오사카에 눈이 내리는 것이 아주 귀한 일 아닌가?
집으로
어젯밤에 공항이 난리가 난 모양이다. 눈발이 날린 줄 알았는데 눈이 너무 내려서 공항이 마비가 됐단다. 심지어 한국에서 온 비행기가 다시 한국으로 회항했다 하니, 아니 눈이 얼마나 내렸다고 난리가 났나? 공항 가는 급행열차도 멈췄다는 둥, 도로에 차도 못 다닌다는 둥...
공항에 도착하니 사람이 북새통이다. 일단 공항에서 오사카로 향하는 사람들 물결이 장난이 아니다. 전철표를 사려는 사람들의 줄이 끝이 없다. 잠시 안도할 새도 없이 공항에는 출국하려는 사람의 줄도 장난이 아님을 보다.
90%는 한국인인 듯. 줄을 돌고돌고돌고돌아...수속하는 곳으로 들어오고, 수속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오니 식당은 없고 먹을 것도 없고... 어제 그 난리통에 공항에 먹을 것이 다 동이 났단다. 커피와 빵으로 점심을 먹다. 다행이다. 그것만으로도. 얼른 인천공항으로 들어가고 싶다.
한 시간 반 연착이다. 몇 시간째 이륙을 못하는 비행기가 많다. 사람들도 뛰고 찾고 난리다. 어쨌든 그들도 집으로 갈 것이다. 여행이 그런 거지. 어찌 계획대로 되겠어. 결국은 원위치로 될 것이라 믿고 기다리는 거지. 무슨 일이든 일어나겠지. 여행이나 삶이나 그렇지 않을까. 지나 놓고 보면 추억이고 그럴 수 있을 일이고 아무것도 아닌 것일 수도 있고 그렇다. 공항에서 기다리면서 우리는 그냥 기다린다. 뭐 어쩌겠는가. 돌아가면 다행인 것을.
기다리면서 아이들에게 '여행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아들 왈, 추억회상이다. 왔던 데 오니까.
딸 왈, 삶의 이유다. 목표를 정해서 살아가니까.
그분 왈, 그리움? 외로움이다. 돌아가야 하니까.
나는, 인생이다. 둘은 똑같다.
여행을 잘 마쳤다. 딸아이가 잘 준비하고 편하게 안내했다. 녀석은 많이 부담스러웠을 텐데, 즐거운 부담이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뿌듯하였기를.
아이들은 가끔 이야기한다. 구글도 핸드폰도 없었을 때, 어떻게 어린 자기들 데리고 자유 여행을 다닐 생각을 했냐고, 특히 아빠가 대단하다고. 짜증도 많았던 아들 녀석이 더 경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