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헬렌 니어링 2
은퇴한 남자분의 하소연이 길게 이어진다. 열심히 일했는데 부인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고, 집에 있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의미 없고 막막하다는 이야기.
난 그가 좀 가엾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했는데, 스님의 진단과 해법은 가차 없이 단호하고 간단하다.
"부인이 30 년 밥 해주고 살림해주고 했으니, 이제는 당신이 3년 정도는 밥하고 청소하며 갚을 생각을 하라. "
'밥 하는 살림하기'
하루 세끼를 비껴갈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기에 나이가 들수록 이를 해결하는 일이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젊은 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는 남자들은 은퇴 후 대접받지 못하고 '삼식이' 등으로 불리는 것을 무지 억울해하고,
살림을 오래 한 여인들은 '이제 밥 하기 지겹다. 자유롭고 싶다'로 긴 세월 '밥'을 전담한 노고에서 해방되고 싶어 한다.
하소연하던 남자분도 이해되고, 그의 아내도 어떤 마음일지 감이 잡히는데, 스님의 의외의 처방을 조곤조곤 듣자니, 우문현답이란 생각이 든다.
제주 올레길 걷다 쉬는 날, 우연히 접한 헬렌의 이 책을 보고 감탄했다.
가난한 헬렌의 집을 방문한 손님들이 그녀의 단순하고 담백한 음식을 먹고 좋아한다. 어떻게 요리를 했는지 궁금해한다.
요리에 전혀 관심 없고 요리하는 것을 즐기지 않고, 요리하는 데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 않은 헬렌에게 이 사람 저 사람이 요리책을 내보라고 권한다. 아니 내게 왜? 의아한 헬렌!
반복되는 '꼬심'에 넘어간 헬렌이 책을 쓰기 위해 도서관에 들러 요리책을 섭렵하는 것부터 인상적이다. 이름하여 ‘도서관 중독증’!
헬렌은 수많은 사람들이 요리에 대해 써놓은 글을 읽으며 (나는 요리책의 역사가 그리 깊고 내용이 방대하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정확한 정보 그대로 옮겨 놓는 것도 의미 있겠단 생각을 한다. 내가 좋은 책을 읽고 그대로 필사해서 다시 읽거나 나누고 싶어 하는 마음과 유사하다.
쿡쿡 웃음이 나오는 대목이 많다. 그녀의 음식처럼 단순한 내용임에도 깊은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재밌다.
구구절절, 공감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구절도 많다.
그녀 못지않게 요리에 관심 없는 나도, 유익한 몇 개의 초간단 요리를 기록해 놓기도 한다.
집에 가면 해 먹어봐야지……. 하면서.
1. 내가 요리책을 쓰게 된 사연
내 책의 주제는 이렇다. 대충 말고 철저하게 살자. 부드럽게 말고 단단하게 먹자. 음식에서도 생활에서도 견고함을 추구하자.
이 책은 육신에 영양을 공급하기 위해 식사할 뿐 미식에 빠지지 않는 검소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
2. 요리라는 일, 꼭 수고스러워야만 할까?
나는 요리보다는 좋은 책 읽기(혹은 쓰기), 좋은 음악 연주, 벽 세우기, 정원 가꾸기, 수영, 스케이트, 산책 등 활동적이고 지성적이거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일을 하고 싶다. 음식 만들기에는 시간을 최소한 투자하고 밖으로 나가든지 음악이나 책에 몰두하고 싶다.
3. 익힐 것인가, 익히지 않을 것인가. 생식 대 화식
자연이 준 푸성귀를 대체할 식품은 없다. 끓이기, 굽기, 튀기기, 냉동, 건조, 염장, 저장 등을 거친 식품은 날것으로 먹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꼭 조리해야겠다면 불 위에서 최단시간 조리해서 즉시 음식을 낸다. 먹는 음식 중 최소한 절반은 날것으로 먹는 것을 목표로 하자. 이렇게 하면 조리해서 죽었거나 독성이 있는 음식을 먹는 데서 오는 폐해를 중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
4. 죽일 것인가, 죽이지 않을 것인가 육식 대 채식
인간은 육식을 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송곳니와 굽은 갈퀴가 있어야 먹이를 잡아서 찢을 수 있는데, 인간은 그런 것을 갖고 태어나지 않는다. 인간의 부드러운 손은 과일과 야채를 따기에 적당하고, 치아는 그것을 씹어 삼키기에 적당하다. (존레이-본초론 1686)
인간이 먹는 고기는 온전하지도, 건강하지도, 싱싱하지도, 생생하지도 않다.
푸른 잎채소와 근채류, 곡물, 열매, 견과, 과일로 구성된 식단은 신체에 힘과 안정을 가져다준다. 건강한 음식이고 미학적이고 경제적이며, 동물들에게 무해하고, 경작과 준비와 소화가 쉬운 식단이다.
5. 복잡한가, 간단한가 가공 식품 대 신선한 음식
시장에서 사들인 것보다는 자기 집 마당에서 난 것으로 식사 준비를 하라.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 가져온 이상하고 희귀한 것보다는 익숙한 음식을 더 높이 평가하라(저버스 마크햄-영국가정주부 1615)
이 요리책은 ‘들어가지 않는’ 게 많은 책이다. 물론 고기나 생선, 닭고기 류가 들어가지 않는다. 또 백설탕, 흰 밀가루, 베이킹소다와 파우더가 들어가지 않는다. 후추와 소금(천일염 예외), 달걀과 우유도 들어가지 않는다. 또 폭신한 빵과 파이, 페이스트리도 없다. 그럼 남는 게 뭐냐고 물을 것이다.
무엇이 남는가? 온갖 과일과 야채, 건강에 좋은 곡물이 있다. 유익한 것이 너무 많아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다.
7, 아침 식사(breakfast)로 금식을 깬다(break fast)?
식욕도 소화력도 왕성한 사람이 아침에 금식하면 배불리 먹을 때보다 생각이 빨라지고, 판단력이 완벽해지며, 말이 술술 나올 뿐만 아니라 분별력이 또렷해지고, 귀가 밝아지며, 기억력이 확실해지고, 모든 힘과 재치에서 더 능률적이고 나은 상태가 된다는 사실을 현명한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토머스 엘리어트 경-가버너라는 책 1531)
역시 헬렌 니어링!
남편의 독특한 이력, 늘 찾아오는 손님들, 어쩌면 남편 못지않게 재능이 있었을 그녀가, 어디서나 남편을 존경하고 서로 존중하며 산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녀가 궁금했다. 정말 그게 다일까?
많은 손님을 치르는 데 주부로서 지치지 않았을까. 그러나 정확한 답은 모르겠다.
다만, 그녀의 평소의 삶의 철학이 이 책에 그대로 나타났다는 것, 그리고 여성으로서 주부로서 감당해야 했던 일, 상차림, 요리에 대하여 최선의 방법, 최고의 방법을 찾아냈다는 것.
"요리가 즐거운 사람은 그렇게 해라. 그러나 나는 거기에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나에게 뭐라 요구하지 마라. 나는 중요하지 않는 일에 시간과 공을 들이고 싶지 않다. 나는 읽기 쓰기 음악 등, 내가 하고픈 것에 더 시간을 쓰고 싶다. 여자라고 거기에 묶여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얼마나 부조리한가. "
이렇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친다. 게다가 이런 간단한 식생활은 인간에게뿐 아니라, 다른 동물과 식물과 이 지구에게까지 좋은 영향을 끼치는 선한 것이라는 것! 이렇게 완벽한 조화가 있겠는가.
헬렌 니어링은 먹거리를 자신이 직접 가꾼다. 시간은 많이 들이지 않지만 그래도 좋은 재료를 선택하고 좋은 음식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육식이나 다양하고 화려한 음식은 아니더라도, 건강한 밥상을 위하여 공을 들인다. 당당할 만하다.
나도 요리나 살림에 시간을 쏟는 시간이 아깝다.
그러나 건강을 위하여 최소한의 것은 하려 애쓴다. 간단한 최소한의 요리만 하려 한다. 살림도 마찬가지.
주부가,
'밥 하기'가 부담이나 짐이나 미안함으로 자리하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밥 하기가 지겹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살림으로부터 해방되기를 간절히 꿈꾸지 않으려면,
남편이,
'삼식이'로 귀찮은 존재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끼니 숙명이 부인에 의해 결정되지 않으려면,
상담했던 남자분이나 그 아내처럼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젊을 때부터 가사를 함께 나누거나, 은퇴 후 3년은 전담하거나... 이것은 여기서 논할 주제는 아니고,
다만 '맛있게 배부르게 먹는 것에 목숨 거는' 자세에서, '간결한 식사'로의 전환은 매우 중요하지 않을까.
옮긴이도 고백했듯이, 나는 그녀가 먹거리를 위해 손수 가꾸어 준비하는 수고나 건강한 식생활을 그대로 따라 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녀의 철학을 이해한다. 그 철학에 공감한다.
요리에서 뿐 아니라 삶의 태도, 자세, 마음 씀, 실천 등에 경의를 표한다.
할 수 있는 것은 나도 해보려 한다.
일단 서울 올라가면 초간단 요리 몇 가지 해보자.
- 제주 서귀포 중앙도서관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