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전 인생계획

by 김혜진




스물둘 무렵 앞으로의 10년을 생각하며 인생계획을 세워둔 적이 있다. 가로줄 하나 쭉 긋고선 그 위에 1년 간격으로 점을 찍었다. 이게 내 삶이구나, 하면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하지만 해 볼 만한 것들을 두루 섞어 적었더랬다.


그리고 마지막 점이 찍힌 곳에 또박또박 두 글자를 적는데 몹시도 어색하다. 어른들의 세계에 나도 들어갈 수 있을까 싶다. 내가 적고도 의구심마저 들지만 이미 적힌 글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서른둘의 숫자가 적힌 점 아래 또렷이 쓴 글은 '결혼'이다.


너무나도 어색한 나머지 다시 지울까도 했다. 그러나 이대로 남겨두기로 한다. 부끄러움을 커버라도 하듯 미래의 마흔까지 계획하니 이제야 만족스럽니다. 그렇게 완성된 나의 20년 인생계획이 노트 위에 세워졌다.




그 계획은 개략적으론 이러했다.


스물넷엔 일본으로 유학을 가고,

스물여섯엔 취직을 하고,

서른에는 친구들과 맘껏 여행을 가고,

서른둘에는 결혼을 한다.

서른여섯에는 미국에서 살아보고,

마흔둘에는 동화책 작가가 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서른아홉이 되어가는 서른여덟에 다다랐다. 노트 위 서른여덟은 이미 결혼하여, 미국에 살며 동화책 작가가 되기 일보 직전의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테다. 그러나 현실의 좌표는 서울에 거주 중이며, 미혼이고 하루 종일 온라인 게임을 일로서 해야 하는 회사에 다니고 있다.


물론 스스로 원하던 유학을 갔고, 고되고 힘겹던 유학 생활 끝엔 일본 게임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여러 좋은 사람들 덕분에 나름의 보람찬 회사 생활을 했고, 인생 친구라 일컬을 수 있는 아코(ako)와 인(yin)을 만난 것은 외롭던 일본 생활을 마지막까지 잘 견디게 해 준 활력소였다. 고마운 친구들이다.






원하는 계획대로 흘러가는 게 어디 인생이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고 보니 계획이란 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 목표와 그 목적들을 머릿속에 지니고 있느냐 없느냐는 살아가는 내내 나의 큰 뿌리가 된다. 그에 더해 최종 결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이십 대에 세운 인생계획의 세부 플랜들은, 1년 혹은 2년이 지나고서야 겨우 이룬 것도 있고, 그 이전에 달성된 것도 간혹 있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힘들어 다 그만두고 서울로 돌아갈까도 하였으나, 그 눈물겹던 일들을 참아내다 보니 해보고자 한 것들의 대부분을 클리어해냈다. 다만, 그중 딱 하나만은 2년이 흐르고 3년이 흘러도 이루지를 못했다. 지난날 부끄러워하며 적어본 두 글자 '결혼'은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스무 살 시절의 계획대로라면, 난 서른둘에 이미 결혼 완료다. 그렇지만 현실 속 서른둘의 나는 한참을 워커홀릭에 빠져있던 때였고, 나의 이상형 남자는 숨바꼭질을 심하게 좋아하는 사람인지 숨어서 나올 생각도 없다. 꼭꼭 숨어있던 이 남자는 내 나이 서른일곱이 되던 때에 모습을 드러냈고, 일 년이 지나자 그간 나를 애태우던 결혼이라는 의례를 함께하기로 했지 말이다.


17년 전, 스무 살 시절 나의 하얀 노트 위 서른둘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때는 서른이라는 나이조차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고 결혼이라는 의식 또한 무척 생소했다.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결혼이 뭐라고, 결혼을 꼭 적어놓아야 하나 했다. 그래도 적어는 놓자, 하여 써 두었고 그러던 내 모습이 부끄럽던 때였다.


서른이 되고, 서른둘도 지나고 서른다섯마저도 지나던 때에는 역시나 나와는 거리가 먼 것임엔 틀림없나 보다 했다. 결혼 따위에 얽매이지 말자 싶어 혼자 사는 것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잠시 잠깐이긴 하지만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결혼이란 단어를 내 삶에서 지워버리자 맘먹어 본 적도 있다.


그럼에도, 인생에 내 짝 하나 없으랴 싶어서 이대로는 포기 못한다 싶기도 하고, 말 그대로 이번 생은 아닌가 보다하며 생각하기도 했다. 유니크한 내 성격 내 성향에 맞는 상대는 어쩌면 우리나라가 아닌 저 멀리 바다건너 해외 어딘가에 있으려나 싶기도 했다. 한 번 더 혼자만의 해외 생활을 하러 멀리멀리 떠나야 하나 심각히 생각했지 말이다.






결혼과 나이, 나이와 결혼은 떼려야 떼어낼 수 없는 상관관계로 인해 그 생각이 깊어진다. 남자의 경우와 여자의 경우, 각자의 성별에 따라 사고의 차이가 있겠으나, 연령대가 이윽고 마흔에 이르다 보면 어느 누구라 할 것 없이 깊어진 생각이 결국엔 갈피를 못 잡아 미로 속에 꼼짝없이 갇히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우리 너무 걱정 말자. 그 미로, 그 깊숙한 미로는 알고 보니 내가 만든 것이였다. 그러므로 그것을 가장 잘 풀 수 있는 사람도 이미 정해져 있다. 어쩌면 단 한 명만이 가능하고 그건 바로 '나'라고 지칭되는 우리 자신이지 말이다. 엉키고 설킨 이 미로는 분명코 결국엔 풀리게 되어있다.


언젠가 심하게 꼬여있던 목걸이를 몇 날 며칠 못 푼 적이 있다. 아무리 애를 쓰고 풀려해도 계속해 더 꼬이기만 할 뿐 도저히 풀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결국 포기하고 한참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시 시도해 보자 싶어 꺼내 드는데 엉킬 대로 엉켜있는 그 밉고도 못생긴 모습이 마치 결혼을 대하는 나 자신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에 놓인 목걸이를 보는데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못내 안쓰럽다 싶어 져 '넌 아름답다. 넌 이쁘다. 이쁘고 말고.'라며 주문을 걸어줬더랬다. 아무리 애써도 도저히 안 풀리던 체인이 주문을 들은 건지, 마법에서 풀려난 진짜 공주라도 된 것처럼 단 몇 분 만에 풀렸다. 출구 없던 엉킴이 스르르 너무나도 자연스레 풀리던 그 순간을 기억한다. '되는구나. 힘을 빼니, 이렇게나 쉽게 해결이 되는구나.'를 깨닫듯 알게 되었지 말이다.


의식하지 못한 사이 나이를 들어가고, 이제는 해야겠다 싶어 결혼을 하려니 너무 멀리 와버린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그저 내 안에 갇힌 미로일 뿐이라 생각하자. 그 복잡하게 엉킨 듯한 길은 언제든 헤쳐나갈 수 있고, 언제든 벗어날 수 있는 형태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채면 된다.


스무 살 시절, 스스로가 예상했던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를 10년도 아닌 그보다도 한참이나 지나고 지금 여기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나에게 있어, 결혼하기 딱 좋은 나이는 서른일곱도 여덟도 아니었다. 결혼에 있어 내게 주어진 나이는 서른에서 아홉을 더한 서른아홉이었다. 나로서도 신기한 예상 밖의 나이가 아닐 수 없다.


서른여덟이던 어느 날엔가 남자친구와 걷던 중에 한 가지 물어보았다. 진지하게 물어보았던 내 질문은 이러했다.




"자기야. 근데 있잖아. 자기 내 나이 정말로 정확히 알고 있는 거 맞아? 나 몇 살인지 알아?"


"어. 알고 있지. 당연히. 왜?"


"내가 일곱 살이 많고 자기는 일곱 살이 적은 거. 진짜 알고 있는 거 맞는 거지? 진짜지?"


"처음엔 설마 했긴 했지."라며, 그렇게 차이가 날 줄은 몰랐다 한다. 결국 씩 웃고 마는 남자다. 나도 따라 옛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나이로 인한 오해가 없도록 다시 한번 더 확인에 확인을 거쳤고, 이젠 되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곧 서른아홉이 되는 나와 '결혼'을 결심한 서른한 살의 남자가 여전히 신기하다. 서로를 알만큼 알았다 생각되면서도,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이 남자의 마음이 여전히 궁금하다.


어쩌면, 이미 다 알아챘으면서도 또 궁금하고픈 그런 마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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