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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사담 Aug 15. 2023

집단 지성의 중요성

[사기열전 유경 편] 사기열전을 통해 배우는 삶의 지혜


유경(생몰미상)은 제나라 (현재 중국의 산동성지역) 출신의 사람이었습니다.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북쪽 농서지역을 지키는 일을 하러 가는 중, 낙양에서 황제가 된 유방이 머물러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유경은 같은 제나라 출신의 우장군에게 부탁하여 황제를 만나기를 요청했습니다. 
 


황제와 만남


우장군이 유경에게 황제를 만나기 위해 새 옷을 주려 하자, 이를 거절하고,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바꾸지 않고, 입은 그대로 만나겠다고 하였습니다. 유경은 그때 양털로 된 갖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우장군의 소개로 유경은 황제를 만나게 되었고, 황제는 음식을 하사하며, 자신을 만나고자 하는 연유를 묻게 됩니다. 이 시기는 한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도읍을 낙양으로 정했습니다. 낙양은 진나라 이전에 주나라의 수도였으며, 진나라는 관중지방 내에 함양을 수도로 하였습니다.


낙양과 관중의 지리적 특성


낙양지방은 당시 중국지역의 중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주나라의 수도이기도 하였고, 평원의 위치하고 있어, 어느 지역이나 쉽게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에, 적이 공격할 경우 방어에는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비해서 진나라가 위치한 관중지방은 분지평야로서 사방이 높은 산으로 막혀있고, 중국의 본토와 연결되는 경로가 좁아 수비하기에 매우 유리합니다.


또한, 중국 4대 평원중 하나인 관중평원으로도 불리는 관중지역은 좌우로 300킬로미터에 달하며, 면적은 약 3.6만 평방킬로미터로서, 드넓은 농지를 포함하고 있어, 많은 인구를 유지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현재의 남한지역의 전체면적이 10만 평방킬로미터이고, 산지가 70%인 점을 감안한다면, 관중평원은 남한 지역의 평야를 합한 만큼의 크기로 볼 수 있습니다. 아래의 지형도를 보면 낙양(Luoyang)은 화북평원의 끝자락이고, 서안(Xian)이 속한 관중지역이 산들로 둘러 쌓인 분지 평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안(Xian)과 낙양(Luoyang) 지형도 [출처 : 구글지형도]


한나라 도읍의 결정


유경은 수도를 낙양이 아닌 진나라 땅, 즉 관중지역에 도읍을 정할 것을 권고합니다. 그 이유는 주나라의 경우 은나라를 멸망시킬 때, 은나라는 포악하고, 인심을 잃었으며, 천하의 제후들이 무왕을 지지하여, 은나라를 멸망시켰다고 했습니다. 새로 건국된 주나라는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모두 다 주나라의 왕을 천자로 여겨 병사가 없이도 전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방의 경우에는 초나라와의 숱한 전쟁 속에서 백성들이 수많은 목숨을 잃었고, 주나라만큼의 덕으로 쌓지 않아, 적으로 부터 공격에 대비할 수 없어, 관중으로 수도를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전한 관중에 위치하여, 나라를 다스린다면, 천하의 목을 조르고, 등을 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신하들은 모두 산동지역, 즉 관중지역이 아닌 중국 동부 지역의 출신으로 고향과 먼 서쪽지역으로 도읍을 정하는 것에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들의 논리는 주나라는 낙양을 도읍으로 한 주나라는 수백 년을 왕 노릇하였고, 진나라는 2년 만에 멸망했으니, 주나라의 낙양이 도읍으로 적합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모순이 있는데, 사실 진나라는 통일 후 급속히 멸망했지만, 통일을 할 수 있는 힘은 바로 관중지역에 위치하고 있어서, 상대를 공격하기에는 유리하고, 힘이 약해 수비할 때도 유리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결정을 하지 못하자, 장량이 관중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리하다고 하자, 바로 관중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그 공로로 유경에게 황제와 같은 유 씨를 하사하였는데, 유경의 본래의 성씨는 '누'씨로서 누경이었습니다.  



한왕 신의 반란


한 7년에 한(韓)왕으로 임명된 신이 흉노족과 결탁하여, 반란을 꾀하자, 황제는 그들을 치고자, 우선 사신을 보내서 상대를 파악하도록 합니다. 한나라의 사신이 도착했을 때, 흉노는 노약자와 야윈 가축들만 보여주어 자신의 힘을 감추었고, 이것만 보고 온 사신 10여 명 모두 흉노는 징벌할 만하다고 황제에게 보고 하였습니다. 이에 황제가 다시 유경을 사신으로 보내자, 돌아온 유경은 동일한 상황을 보고도 다르게 해석을 합니다. 전쟁을 할 때는 모두 장점을 과시하고 자랑하는 것이 마땅한데, 단점 만을 보여준 것은 정예병을 숨기고, 적을 끌어들이기 위함이라고 보고합니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많은 전투에 승리하고 20만의 군대가 진격 중에 있어, 유경의 말은 군대의 사기를 크게 꺾는 것이고, 황제의 생각과도 맞지 않아, 황제는 이를 크게 책망하고, 유경을 형틀에 채워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앞선 패배는 흉노의 전략이었고, 본진과 격리되어 너무 적진 깊숙이 들어온 황제의 군대에게, 유경의 예측과 같이 흉노의 정예병이 나타나 한나라 군사는 크게 패하고, 7일간 포위된 후에 황제는 간신히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습니다. 돌아온 황제는 흉노를 공격해도 좋다고 한 사신 10여 명을 모두 참수하고, 유경에게 추가로 벼슬을 주고 봉지를 내렸습니다.


묵돌



흉노 묵돌에 대한 대책


당시 묵돌이 흉노의 수장인 선우가 되었는데, 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자주 한나라의 북방을 괴롭혔습니다. 황제가 이에 대하여 유경에게 대책을 물어보자, 유경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금의 한나라는 전쟁을 많이 치러 무력으로도 이길 수 없고, 묵돌은 아버지를 죽이고, 선우가 된 자라 인의로도 설득이 되지 않는 자니 유일하게 복종시키는 방법은 그의 자손을 한나라의 신하로 만드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황제는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유경은 황제의 본처 소생의 맏공주를 묵돌에게 시집을 보내고, 후한 예물을 준다면, 묵돌은 예물로 인해, 한의 공주를 연지로 삼고, 그 아들을 태자로 삼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한나라의 흔하지만, 흉노에는 드문 물건들을 자주 보내고, 사신을 보내 예절을 가르친다면, 묵돌은 살아서 사위요, 죽게 되면 외손이 선우가 되니, 외손이 감히 외할아버지에게 대등한 예를 요구하지 않을 테니, 전쟁 없이도 신하로 만들 수 있는 전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맏 공주를 안 보내고, 속여서 보내면 흉노도 곧 눈치채고 보낸 공주를 귀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황제는 이를 좋은 계책이라 여겨 실행하고자 하였으나, 여태후가 밤낮으로 울며, 반대하자, 결국 다른 사람을 보내면서 맏 공주라고 속여 선우에게 시집보내고, 유경을 사신으로 보냈습니다.



관중이주 정책


사신으로 돌아온 유경은 황제에게 흉노와 관중지역이 가깝고, 백성에 비해 토지가 비옥하니, 더 많은 백성의 이주가 가능하니, 백성을 늘려서, 흉노를 막을 계책을 올립니다. 한나라가 막 통일을 하였으나, 아직 전국시대의 6국의 왕족이 있고, 그들의 반란이 불씨가 살아 있으므로, 각국의 왕족의 후손과 호걸, 명문가를 관중으로 이주시키면, 흉노를 대비할 수 있고, 더불어 중국 내의 반란도 대비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황제는 이를 좋게 여겨 유경의 말과 같이 10만여 명을 관중으로 이주토록 하였습니다.





유경으로 인한 관중지역의 도읍 선정은 한나라의 기초를 다지고, 안정을 꾀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사신으로서 적국의 상황을 매우 날카롭게 간파했고, 한나라 초기 흉노의 위협에 국가를 안정되게 운영하는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도읍선정과 흉노와의 외교에 있어, 유방은 열린 마음으로 유경의 제안을 수용했습니다. 황제로서 신하들의 의견을 경청하는 능력은 중국역사에 빛나는 한나라를 건국하고, 이를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사마천은 천금의 갖옷도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털로 만든 것이 아니며 (여우의 부드러운 털로 만든 보물급 갖옷), 서까래도 한 그루의 가지가 아니며, 하·은·주 삼대의 시기도 모두 한 사람의 지혜로써 이룬 것이 아니라고 하며, 큰 일에는 집단의 지성이 중요함을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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