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열전 원앙 편] 사기열전으로 배우는 삶의 지혜
원앙(기원전 200년~기원전 150년)은 진나라 이후 초한 전쟁을 통해 다시 중국을 한나라가 통일한 이후의 인물로서 과거 초나라 지방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도둑신분이었으나, 이후 형의 추천으로 벼슬을 한 것을 보면 추측하건대, 학식이나 다소 배경이 있는 집안이었으나, 혼란한 시기에 어쩔 수 없이 도둑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정 내에서 원앙의 강직함은 상대의 지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비판한 인물들은 모두 당대의 상당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상은 황제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 승상들, 황제의 동생이자 제후왕,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환관과 애첩이었습니다. 사마천은 원앙의 이야기를 사기열전의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여, 그의 강직했던 삶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승상 강후는 한고조(유방)가 처음 봉기했을 때부터 동거동락한 인물로서, 진나라와 싸움에서 시작으로, 이후 항우의 초나라와 전쟁에도 참여하여, 한나라가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한나라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초기 반란군들을 제압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한고조의 죽음 이후, 부인이었던 여태후가 실권을 장악하고, 유 씨 세력을 내쫓고, 한나라를 여씨 나라로 바꾸고자 했습니다. 승상 강후는 중신들과 함께 여태후가 죽자, 봉기하여 유 씨가 다시 황제를 계승할 수 있도록 한 인물이었습니다. 강후는 이것을 늘 강조하며, 조정 내에서도 자랑하며 다녔고, 황제조차도 그를 크게 예우하며, 그가 궁에서 돌아갈 때 친히 전송해 주곤 했습니다. 이를 못 마땅하게 여긴 원앙은 강후가 여태후 시절, 병권을 갖고 있음에도, 태후가 죽고 나서야, 우연한 기회를 잡아 성공했을 뿐이므로, 황제가 여기듯이 사직의 중신이 아니라, 공신의 한 명일뿐이라며, 승상의 교만함과 황제의 겸허함이 군신의 예를 잃게 되었으니, 황제가 올바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을 직고 했습니다. 황제가 원앙의 말을 듣게 되자, 점차 위엄을 되찾고, 승상도 점점 황제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승상 강후는 자신이 원앙의 형과도 친한 사이인데, 조정에서 자신을 비난한 것을 원망했으나, 원앙은 전혀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강후가 승상에서 물러난 후, 자신의 봉지로 돌아갔습니다. 이때, 강후가 모반을 계획한다고 상서가 올라와, 강후는 소환되어 감옥에 구금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강후를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때, 원앙이 나서 강후는 죄가 없음을 강변하였고, 강후가 석방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강후는 원앙을 진면목을 알아보게 되었고, 그와 친교를 맺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사기세가’의 ‘강후주발세가’의 내용을 보면, 이 시기의 원앙의 도움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으며, 강후가 옥중에서 자신의 재산을 활용하여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했고, 많은 재산을 받았던 박소가 박태후에게 간청하자, 태후가 황제에게 강후의 억울함을 항변하였고 강후를 풀어 준 것으로 쓰여 있습니다. 두 이야기가 다르기는 하지만, 모순이 된다기보다는 강후가 풀려나는 데 있어 태후의 도움이 컸지만, 아무것도 받지 않고, 변호한 원앙의 도움도 황제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의 이복동생인 유장은 회남왕(회남: 현재 중국의 강소성, 안휘성, 후베이성 일대)으로 있었을 때, 조정 내에서 매우 거만하게 행동을 하였습니다. 이를 본 원앙은 제후가 교만하면 문제가 생기니 제후에게 주어진 토지를 줄여 힘을 줄이고, 경고를 하기를 황제에게 진언했습니다. 그러나 황제는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로 인해 회남여왕은 더욱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이후에 다시 회남여왕이 죄를 짓게 되자, 황제는 형벌로 그를 죄인의 수레에 태워 촉 지방으로 귀양을 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원앙은 황제가 이전까지 벌하지 않다가 갑자기 형벌을 가하면, 자신만만하고 강경했던 회남왕이 기가 꺾여 험한 귀양길에 병사할 수 있고, 이는 황제의 오명이 될 것이라고 충언하였습니다. 이 역시, 황제는 듣지 않고 귀양을 실행하였습니다. 과연 원앙의 말대로 회남왕은 귀양길 도중 병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듣고 황제는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하자, 원앙은 크게 낙담한 황제를 위로하고, 회남왕의 세 아들에게 높은 자리를 주어 유족들을 위로할 것을 건의를 하자, 황제는 그들 모두를 제후왕으로 봉했습니다. 이로 인해 원앙의 명성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황제에게는 두 황후와 애첩인 신부인이 있었습니다. 신부인은 황후가 아니면서도 항상 황후와 동석에 앉았습니다. 어느 날 황제와 상림원을 나갔을 때, 관리들이 또 동석을 만들자, 원앙이 일부러 신부인의 자리를 뒤로 빼어 놓았고, 이것을 본 신부인이 노하여 좌석에 앉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를 알게 된 황제도 크게 화를 내며 궁중으로 돌아갔습니다.
원앙은 황제를 찾아가, 질서가 있어야 서로 화목해질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정식부인과 첩의 신분인 신부인이 동석을 할 경우, 질서를 무너트려, 결과적으로 신부인에게 해가 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척부인 사건을 예로 들었습니다. 한 고조(유방)가 그토록 척부인을 총애했으나, 고조가 죽자마자, 여태후가 척부인의 혀와 사지를 자르고, 귀를 못 듣도록 박해했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원앙은 황제에게 질서는 지키는 것이 신부인의 안위에 이로움을 말하고, 상림원 사건으로 마음이 상한 신부인에게 상을 내려주기를 청했습니다.
황제는 이 말에 크게 기뻐했고, 원앙의 이야기를 그대로 신부인에게 전했습니다. 신부인은 원앙에게 황금 50근을 하사했습니다.
여러 사건과 사고를 겪으며 살아온 원앙은 후에 벼슬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한경제는 그러한 원앙에게 자주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 시기에 양왕은 두태후의 후원을 받아서 경제의 후사가 되고자 하였지만, 원앙이 반대하는 진언을 하자 조정 내에서 양왕의 후사 이 이야기는 끝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일로 인해 원한을 품은 양왕은 원앙을 암살하기 위한 자객을 모집했습니다. 한 자객이 관중에 도착하여 사람들에게 원앙에 대하여 물으니, 모두가 원앙을 칭찬하기 일색이었습니다. 이 일로 자객은 원앙을 찾아가 자신이 자객으로 이곳에 왔으나, 덕망을 가진 자를 죽일 수 없어 죽일 수 없다고 하며, 자신 이후에도 더 많은 자객이 있을 테니 조심하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원앙은 결국 양왕이 보낸 자객에 의해 결국 살해되었습니다.
원앙은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고 드러내는 데,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관리로서 자신의 뜻을 마음 것 펼쳤고, 백성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강인함은 주위의 많은 적을 만들었습니다. 결국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객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뜻을 이루기 위한 여러 방법 중 강직함도 있겠지만, 과거의 '사기열전'에서 다루었던 ‘숙손통’이라는 인물의 유연함이 더 효과적이지 않을지 원앙의 삶을 통해 생각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