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가 관계를 이끈다는 사실
우리는 여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갑니다. 가족이라는 공동체에서부터 한 나라의 국민, 더 나아가 지구인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에도 일조를 하고 있죠. '관계' 없는 인간의 삶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인데요. 이 무수한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기에 '관계'라는 심리적 끈은 우리 내면 깊숙이 자리 잡아 꽤나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사람사이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점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그런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인간관계로 인해 힘겨워합니다. 그만큼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반증일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관계의 등급'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 가까운 관계냐 아니면 그냥 알고 지내는 관계냐에 따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수도 또는 쉬울 수도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관계로 인해 힘겨워지는 상황을 한번 떠올려 봅시다. 그냥 알고 지내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를 받거나 고통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가요? 아니면 가까운 관계에서 그런 경우가 많은가요?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가까운 관계일수록 상처나 고통을 받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을 분류할 때 등급을 매깁니다. 굳이 어딘가에 기록해 놓지 않더라도 어떤 사람을 마주했을 때 이 사람이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등급인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는 등급에 맞는 기대치를 적용합니다. 그래서 가볍게 알고 지내는 사람에게는 실망할 것도 없고, 상처를 안겨줄 일도 없는 것이죠. 중요한 어떤 일을 요구할 일도 없고,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주면 좋겠다고 푸념을 늘어놓을 일도 없습니다. 그냥 오늘 날씨가 어떤지, 흥미로운 뉴스거리가 무엇이 있는지 처럼 누구나 알 수 있고,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가볍게 주고받는 상황에서 관계를 망칠 만한 일이 생긴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따름이죠.
반대로 우리가 가까운 사람을 대할 때는 어떤가요? 그 사람에게 적용한 기대치는 이미 높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본인과 가까운 사이니까요. 그래서 어떤 중요한 일을 요구하거나 약간은 무리한 부탁을 하기도 하죠. 가까운 관계이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상대가 충분히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들 예상하다시피 이 부분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는 두 당사자가 서로의 관계에 대해서 다르게 느낀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들이 다르게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대화의 깊이가 달라서'라고 생각합니다. 관계의 등급에 따라 대화의 깊이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죠. 마주하는 상대가 물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라고 해서 대화의 깊이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는다면 상대와 본인이 느끼는 관계의 괴리감이 상당히 멀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 녀석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청소년이 스마트폰에 너무 과하게 빠져있으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니 스마트폰 사용을 최소화하자는 입장이었고, 아들 녀석은 온종일 스마트 폰을 놓지 않기 위해 안감힘을 쓰는 입장이었습니다. 저는 자꾸만 약속을 어기는 아들 녀석에게 실망을 하고 있었고, 아들은 잔소리만 늘어놓는 저에게 화가 나 있었습니다. 고민하던 차에 이번에는 다른 방법으로 대화를 이끌어 가 보기로 했습니다.
"왜 계속 약속을 어기는 거야? 무슨 이유라도 있어?"
"..."
"솔직히 이야기해 줘. 엄마나 아빠가 너한테 뭐 실수한 게 있어서 그래?"
그러자 아들은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랑 아빠는 맨날 뭐 하지 말아라 뭐 하지 말아라 잔소리만 하잖아요."
"엄마 아빠는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화가 나서 그랬어요."
충격적이었습니다. 제가 아들을 싫어하다니요.
"엄마 아빠 말고 너한테 스마트폰 그만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또 있어?"
"아니요."
"그럼 왜 엄마 아빠만 너한테 하지 못하게 할까. 한번 생각해 봤어?"
"..."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너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사람이 엄마 아빠이기 때문이야."
"네가 훌륭하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기 때문인 거야."
그동안 단순하게 하지 말라고 말을 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자식이니까 당연히 엄마 아빠의 마음을 알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이죠. 그 착각에서 벗어나 마음속 깊은 감정을 꺼내어 이야기해 주었더니 아들 녀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관계에 따라 대화의 깊이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대화의 깊이에 따라 관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수십 년을 함께 붙어살면서도 대화의 깊이가 얕다면 그 부부의 관계는 순식간에 파국으로 치닫게 됩니다. 서로에게 기대치는 높지만 실제로 서로에게 느끼는 심리적 끈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과 나누는 대화는 깊이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소중한 사람을 만나면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심을 꺼내어 전해 보세요. 더욱 깊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을 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