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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누군가의 동생 Aug 13. 2023

사라져 버린 희망

동생의 간암 누나 간병일기

누나가 잘 먹고 체력을 회복하던 휴약기가 금세 지나고, 2차 항암을 하기 위해 입원 전 보건소에 들러서 코로나검사를 진행했다. 코로나 검사는 언제 해도 별로다. 이제 집에 가려는데, 누나가 갑자기 늘 가던 절에 잠시 들리고 싶다고 말을 하더라.


그날이 한파주의보였나.. 그래서 엄청 추웠었다. 나는 금방 올 거란 생각에 내복도 안 입고 왔었지만, 누나가 가고 싶다는 한 마디에 그냥 갔다. 아마 내가 내복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누나는 그냥 집에 가자고 했을 텐데, 혹여나 말을 해서 집으로 갔다면 남은 평생을 후회하지 않았을까.


누나와 택시를 타고 절 앞에 내렸는데, 갑자기 오는 바람에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아 근처 편의점에서 카스타드라도 사갔다. 그리고 절에 갔고, 누나는 왠지 모르게 찹쌀을 시주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절 내부에 있는 판매점에 갔는데, 마침 찹쌀이 딱 2개 남아있어서 얼른 사 왔다.


절 내부의 마룻바닥이 무척 차가워 오래 있지는 못했고, 누나도 힘들어서 절을 몇 번 하고 이내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왔다. 누나가 기분이 좋은지 마스크 뒤로 웃음이 새어 나오길래, 내가 사진을 찍는데 뭐라 하지도 않고, 오히려 꽃받침을 해줬다.


이때는 우리 모두 몰랐다. 이게 마지막 방문이었다는 것을. 정말로 부처님이 누나에게 마지막으로 오라고 알려주신 걸까? 하필 그날 누나가 절에 가고 싶어 했고, 찹쌀도 마침 딱 2개가 남아있었으니까.


다음날 우리는 늘 그렇듯 짐을 챙겨서 택시에 탔고, 기사님께 천천히 가달라고 부탁드렸다. 하지만 늘 그렇듯 누나는 내려서 구토를 했고, 조금 진정되고 나면 그제야 입원하러 병동으로 향했다. 집이 4층이고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나가기 위해서는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했었다. 그래서 외래나 입원이 아니면 늘 누나는 집에만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항암은 다음날 오전에 진행하는 일정이어서, 저녁에 누나랑 지하에 있는 편의점과 빵집, 그리고 카페를 들렀다. 누나는 오랜만에 외출이라 기분이 좋은지 연신 웃는데, 그 모습이 너무 좋았다. 누나는 지금에 와서 늘 큰 걸 바라지 않았다. 늘 잠시 카페에 다녀오고 싶어 했을 뿐이었다.


환자복이 생각보다 얇기 때문에 누나는 입고 왔던 맨투맨 티셔츠를 외투처럼 덮었고, 손이 시린 지 맨투맨 티셔츠 안에 넣고 있었다. 누나는 내가 카스타드를 먹고 싶어 한 줄 알았는지, 편의점에서 카스타드를 사서 카페에 잠시 앉아있다가 올라갔다.


나는 늘 누나에게 일부러 사달라고 했다. 자신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미안해하는 누나에게, 그나마 누나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동생 먹으라고 사주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래서 나는 늘 고맙다는 말과 함께, 최대한 맛있게 먹었다. 나도 누나와 같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카페에서 기분을 낼 수 있어서 너무 좋은 시간이었다.


오전에 투여했던 항암을 금방 마치고, 잠시 스타벅스에 들렀다. 누나는 짐도 많고, 피곤하기도 해서 집으로 바로 가고 싶었나 보다. 하지만 다음은 없다는 생각으로 누나와 마찰을 빚으면서까지 같이 카페에 갔었고, 누나는 막상 가니까 생각보다 두유라떼를 잘 마셨다. 그래서 다음에 집에서 해 먹으려고 디카페인 원두도 사 왔고. 


평소에는 커피 냄새도 싫어서 집에서 드립커피 대신 분말커피로 대신 먹을 정도였는데, 이때는 누나가 커피를 잘 마셔서 정말 기분 좋았다. 누나도 커피가 잘 들어가서 놀란 듯했고, 이때도 다음은 없다는 생각으로 카페를 다녀온 것은 정말 잘 한 선택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짐을 풀고, 평소처럼 생활했다. 항암제 때문에 혹시라도 누나의 면역력이 약해질까 봐 우리 가족은 집안에서도 늘 마스크를 끼고 생활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누나가 열이 나지 않아서 걱정을 덜었는데, 대신 유난히 어깨 통증을 많이 호소했었다. 분명 괜찮아진 듯했었는데.


평소에는 마약성 진통제 (아이알코돈)을 1개, 많으면 2개로 버텼던 누나인데, 갑자기 4개까지 먹는 날이 잦아졌다. 6시간 간격으로 먹었던 약이라, 약효가 떨어질 즈음이 되면 누나는 정말 울면서 약을 먹어야 했다. 그래서 급하게 앉았다가, 누웠다가 할 수 있는 보조 의자를 구입했는데, 그마저도 누나는 너무 아파했다.


그래서 맞는 각도를 찾는 게 너무 힘들었고, 그마저도 최대한 아프지 않게 앉다 보니 자세도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누나는 날이 갈수록 어깨의 통증을 심하게 호소했고, 급기야 잠을 자기 위해 눕기까지 1시간 이상을 소요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마저도 너무 아파서 울면서 눕는 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전에 누나가 화장실을 가려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아버렸다. 놀란 가족들은 급하게 누나의 상태를 확인했고, 누나는 일어나지 못하겠다며 울고 있었다. 아빠와 나는 누나를 이불에 올린 다음 끌어서 방까지 옮겼고, 내일이 외래라 진통제를 먹으며 기다려보기로 했었다.


외래는 오후였고 당일 새벽, 나는 뒤늦게서야 이러다가 큰일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바로 응급실로 가자고 했다. 구급차가 안될까 봐 사설구급차라도 불러야 하나 걱정했는데, 혹시 몰라서 일단 119에 전화를 해봤다. 누나의 상태를 말하니 다행히 접수가 되었고, 119는 금방 도착했다.


구급대원은 총 3명이었고, 1명은 남성 2명은 여성 구급대원이었다. 여성 구급대원 분들, 비슷한 또래여서 그랬던 걸까, 이유는 모르겠지만 누나를 최대한 신경 써주려고 노력했다.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최대한 오래 남아계셨고, 응급도를 분류하는 간호사와 오랜 시간 대화하면서 조율해 주셨다.


나는 응급실에 도착해서 또 의자에 누워있으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응급도가 높았던 건지, 구급대원 분들이 신경을 써주셨던 건지, 다행히도 간이침대를 내어주었다. 누나는 자신의 다리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도, 동생이 배고플까 봐 밥을 먹고 오라고 하더라. 커피도 꼭 먹고 오라고.


나도 현실적으로 누나를 계속 돌보기 위해선 밥을 먹고 오긴 해야 했다. 편의점에서 간단히 밥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 누나가 갖고 싶던 신년 토끼컵을 사 왔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였고, 그렇게라도 누나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누나는 토끼컵을 보고는 반짝 웃더니, 깨지지 않게 잘 넣어놓으라고 말했다. 


누나가 다리에 힘이 없다 할까 데려가야 했을까? 아니면 허리가 아프다 했을 때? 단순 항암 부작용인줄 알았더니.. 내가 너무 늦게 데려온 걸까? 데려왔어도 방법이 없던 걸까. 치료를 안 받고 있더라도 예정된 수순이었을까? 매번 키, 몸무게, 혈압 측정 시 키가 조금씩 줄어들었는데 그걸로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누나는 소변이 마렵다고 말했고, 간호사는 지금 상황에서 소변줄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누나는 소변줄이 하기 싫어서, 보안요원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에 탑승해서 나와 같이 화장실에 갔다. 나는 누나를 변기에 앉혀주고 잠시 나가있을 생각이었지만, 누나는 아예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변기에 앉는 게 불가능했다.


누나는 안될 것 같다며 이내 포기했고, 돌아온 뒤 나는 간호사에게 말해 소변줄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소변줄을 하는 동안 간이 칸막이로 가린 다음 나는 뒤를 돌아있었고, 간호사가 부르는 소리에 가보니 소변통은 빠르게 차오르고 있었다. 얼마나 소변이 마려웠던 걸까?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지금도 가슴 한 켠이 아려온다.


새벽에 남매를 급하게 응급실로 보낸 부모님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일단 외래를 미룰 수 없으니 대리진료라도 봐야 했고, 대리진료에 필요한 서류들을 챙겨서 오라고 말했다. 나는 부모님에게 예정보다 조금 일찍 오라고 말했는데, 그래야만 누나를 잠깐이라도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응급실은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 1명 이외에 출입 금지였다. 그래서 CT를 찍으러 이동하는 길목에서, 그나마 누나와 인사를 시켜주고 싶었다. 잠깐이지만 우리 가족은 함께 할 수 있었고, 이내 나는 누나와 함께 다시 응급실로 들어갔다.


대리진료 시간이 되어 나는 부모님과 같이 교수를 만났고, 교수는 누나가 응급실에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정말 혹시나 교수가 누나를 응급실에서 퇴원시킬까 봐 겁먹고 입원시켜 주면 안 되냐고 물어봤고, 교수는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퇴원하냐고 입원할 거라는 말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대리진료를 마치고 부모님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누나의 곁으로 돌아갔다. 이내 누나는 간이침대에서 응급실 내부로 옮겼고, 몇 시간 뒤에 정형외과 선생님이 오셨다. 갑자기 누나의 바지를 벗기라고 말하셔서 당황했지만 이내 벗겼고, 선생님은 누나의 항문에 손을 넣고 힘을 줘보라고 말하셨다.


진찰이 끝나셨는지 금방 돌아가셨고, 이내 잠깐 와서 갑옷 같은 척추보호대를 주고 착용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당시 새벽이었는데, 다음날 오후에 수술이 잡혔다고 말하셨다.


지금 상황의 원인은 척추 전이암의 크기가 너무 커져서 척추가 골절되었고, 신경을 눌러서 마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종양이 신경을 압박한 채로 오래 놔두면 신경을 살릴 수 없어서, 급하게 수술이 잡힌 듯했다. 선생님은 후방유합술이란 수술을 할 것이고, 교수님이 이 분야의 권위자라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회복기간은 두 달 정도 걸릴 거라 말하는데, 그건 상관없었다. 그런데 간암이 유독 피가 많이 나는 종양이라, 신경외과 - 흉부외과 - 정형외과 3개의 과가 동시에 들어가는 대형수술이라고 말하셨다.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었으면 3개의 과가 동시에 들어가고, 새벽 당일 다음날 오후로 바로 수술이 잡혔을까.


수술 이야기를 듣고 조금 뒤 우리는 병동으로 이동했고, 코로나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1인실에서 잠시 대기했다. 나중에 수술을 마치고 재활을 위해, 무슨 바람을 부는 재활도구도 받았었다. 그런데 담당의가 들어와서는, 수술을 하면 중환자실에 조금 있어야 할 수도 있고, 심하면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불안함을 직감한 나는 급하게 부모님과 누나를 통화시켰다. 혹시나 이게 마지막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으니까. 누나도, 가족도 모두 최악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수술을 하길 원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수술은 진행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는 듯했다. 리스크가 너무 커서 그랬을까. 


누나는 고용량 스테로이드를 맞아서 잠시나마 발가락을 움직이는 듯했으나, 이내 소용없었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방사선부터 해주지.. 당시에는 교수를 원망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무엇을 선택하든 방법이 없었을 것 같았다.


간암이 유독 방사선이 잘 안 듣기도 했고, 오랜 기간 치료하기엔 당시 원발암인 간암의 상태가 너무 나빴던 것 같았다. 만약 척추를 위해 방사선을 먼저 진행했다면, 누나는 원발암 진행으로 다른 것을 잃지 않았을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누나가 회복하는 것까지는 바라진 않았다. 불가능하니까. 다만 삶을 정리할 시간은 주길 바랬다. 여자친구의 말대로 항암을 하지 말고, 진통제를 먹으며 남은 삶을 정리해야 했을까? 더 일찍 데려가야 했을까? 지금도 매일매일이 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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