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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r 27. 2024

해제| 3장 2절 - 시온과 유대 문제의 관계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대부분의 역사책에는 수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팔레스타인/이스라엘 역사도 예외는 아니고요. 이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지만, 초심자에게는 커다란 진입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물의 등장을 최소한으로 했는데, 유일하게 예외로 둔 게 3장 2절입니다.


3장 2절에는 무려 주인공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건국의 1등 공신으로 평가받는 '국가의 선지자' 테오도르 헤르쯜입니다. 헤르쯜은 시온주의를 대중의 정치적 운동으로 발전시키고 서구 열강의 이해를 구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을 설파해 시온주의가 성공할 수 있는 올바른 방향성을 잡았습니다. 비록 서른 중반에야 시온주의자로 각성하고 또 10년 채 안 돼서 단명하지만, 그 짧은 기간 동안에 시온주의 운동은 헤르쯜이란 이름 아래 움직입니다. 따라서 헤르쯜을 이해한다는 건 곧 이 시기의 시온주의 운동을 이해하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헤르쯜을 주인공으로 삼은 데는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그가 일기를 매우 상세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남겼다는 겁니다. 헤르즐의 일기는 영어로 번역되었고 1,500쪽을 넘습니다. 덕분에 3장 2절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은 다른 장/절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더 정확하게 재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3절 2절은 시온주의가 발흥 10여 년 만에 쇠퇴하던 1890년대 중반부터, 성공궤도를 달리는 10여 년 간의 이야기입니다. 이 시기에 헤르쯜은 시온주의 세력을 크게 성장시키기는 했으나 가장 본질적인 문제를 풀지 못하고 실패하고 맙니다. 그건 바로 시온과 유대 문제의 관계입니다. 1절에서 살펴봤듯이 시온은 예루살렘, 즉 팔레스타인/이스라엘 땅을 의미하고, 유대 문제는 유럽에서 타자로 정의된 유대인들의 처지입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서 국가를 세우면 정말로 유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지,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실현 가능한 방법인지, 혹은 바람직하거나 유일한 방법이었을까요? 150년이 다 되어가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는 이 질문에 그동안 그 누구도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2.1. 헤르쯜의 정치적 시온주의


다른 초기 시온주의자들이 그랬듯이, 헤르쯜 역시 시온주의자가 되기 이전에는 자신을 유대인이 아닌 유럽인으로 믿던 유럽 민족주의자였습니다.


헤르쯜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언론인으로 시온주의자가 되기 이전부터 반유대주의와 유대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박해와 게토에 갇혀 산 세월 때문에 유대인들이 육체와 정신적으로 나약하게 되었고 그러한 내면적 결함을 능동적으로 극복해야지만 다른 유럽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지 않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유럽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예루살렘으로?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만 불행히도 불가능하다. 우리는 (유럽) 땅의 토착민이다!”


따라서 유대적인 성향을 지우고 진보적인 유럽에 동화되는 것만이 유대 문제의 해결책이라 보았고, 교황의 주재하에 모든 유대인이 기독교로 일제히 개종하거나 중유럽 문화의 특징인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고려했다. 하지만 정작 스스로는 개종하거나 사회주의자로 전향할 의사가 없었다. 자신의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자긍심을 가지게 되고 반유대주의가 거세질 것으로 우려되자 유대인만의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헤르즐은 시온주의자가 되자마자 '유대 국가'라는 사상서를 씁니다. 이 글은 세간에 시온주의 사상의 시초라고까지 잘못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헤스보다 30년 늦은 3번째 사상서입니다. 핵심 내용도 같았습니다. 헤르쯜은 이전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유대 문제를 사회적이거나 종교적인 것이 아닌 민족의 문제로 진단했고, 반유대주의의 보편성과 영속성을 강조했습니다.


유대 문제는 유대인이 주목받을 만큼 거주하는 어느 곳에서나 존재했고, 그렇지 않던 곳도 유대인들이 이주해 오면 생겨났다. 우리는 자연스레 유대인들이 박해받지 않던 곳으로 이주해가곤 했지만, 우리의 존재가 박해를 만들어낸 것이다. 이는 모든 곳에서 일어난 일이며, 프랑스처럼 가장 문명화된 곳조차 예외가 아니다. 정치적 차원에서 유대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낼 때까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유대 국가를 건국해야지만 유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헤르쯜은 식민화로는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면서 정치적 운동을 옹호합니다.


국가 사상에 동조하는 유대인들이 협회에 가입하고, 협회는 우리 민족의 이름으로 (열강의) 정부들과 협의할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러면 협회는 정부와의 관계에서 국가 창출 권력으로 인정받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사실상의 국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 [그다음에 해야 할 일은] 지구상의 한 조각의 땅에 우리의 주권을 (열강으로부터) 승인받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론적 차이 때문에 헤르쯜의 사상은 흔히 ‘정치적’ 시온주의라고 불립니다. 그런데 헤르쯜은 왜 식민화에 반대했을까요? 하나는 어떤 개인도 국가를 건국하기에 필요한 만큼의 인원을 이주시킬 수 있는 재력을 보유한 부자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토착민의 반대였습니다. 헤르쯜은 모든 식민화는 “필연적으로 토착민들이 위협을 느끼게 되는 순간”까지만 가능하며, 그 이후에는 토착 정부가 이주를 금지하는 참사로 끝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이주해갈 지역의 국가로부터 주권을 인정받는 헌장(charter)을 먼저 획득하고, 이주(=식민화)는 그 뒤에 시작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선헌장 후이주라고 불리는 헤르쯜의 사상의 핵심입니다.


선헌장 후이주는 헤르쯜주의라고 불릴 정도로 유명하고 또 중요하지만, 우습게도 친이스라엘계에서는 헤르쯜이 왜 식민화 이전에 주권을 얻자고 말했는지 이유를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친이스라엘계는 아랍인들이 식민화를 환영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헤르쯜은 식민화가 무조건 토착민의 반대에 직면하기 때문에 선헌장이 필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헌장(=주권)을 얻게 되면 토착민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헌장으로 주권을 얻게 되면 그 지역에서 행하는 모든 일은 합법화될 수 있습니다. 국가의 이름으로 토착민을 모조리 죽일 수도 있고 노예로 삼을 수도 있겠지요. (실제로는 토착민과 국제사회의 반대로 불가능하지만 국내법상 이론을 말하는 겁니다.) 하지만 헤르쯜이 그런 걸 꿈꾸지는 않았고, 그는 다른 시온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토착민을 쫓아내기를 원했습니다. 아래는 헤르쯜이 '유대 국가'를 쓰기 반년 전에 적은 일기입니다.


(열강이) 우리에게 할당해 주는 지역에서 온화하게 사유지를 몰수해야만 한다. 가난한 주민들이 우리 땅에서 고용되지 못하게 막는 한편, 인근 지역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만들어 비밀리에 국경 너머로 옮겨 버려야 한다. (땅을 팔고 싶어 하는) 지주들은 우리 편에 설 것이다. 토지 몰수와 가난한 자들을 제거하는 과정은 모두 신중하고 비밀리에 실행되어야 한다. 지주들이 우리에게 실제 땅값보다 비싸게 팔면서 사기치고 있다고 믿게 만들자. 그러나 우리는 어떤 땅도 되팔지 않을 것이다.


일기를 쓸 당시 헤르쯜이 추방하려고 염두에 둔 토착민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이었으나, 아직 유대 국가가 세워질 장소로 팔레스타인을 확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국가를 세우기에 어디가 유리할지 고민하고 있었고, 반년 뒤에 쓴 '유대 국가'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광활한 땅을 매입할 수 있어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아르헨티나와 유대인들의 열정을 자극하기에 좋은 “역사적 고향”인 팔레스타인을 후보지로 소개하면서, 열강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지고 유대 여론에 따라 선택된 땅을 가질 것이다.”라는 열린 결말을 내놓았습니다.


2.2. 민족의 고향으로 둔갑한 유대 국가


헤르쯜은 박해받는 유대인을 구하는 것에 관심이 많았고 유대 문화나 유대교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히브리어는 조금도 구사하지 못했고요. 따라서 팔레스타인만을 고집할 생각은 없었으나, 곧 다른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팔레스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얻기 위해 외교 공작에 착수합니다.


1896년 6월에 헤르쯜은 뉴린스키와 함께 이스탄불로 떠났다. 야심찬 출발이었으나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술탄의 초대를 받지 않았고 술탄을 만나더라도 어떤 조건을 제시할지를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그가 일기에 적은 바로는 단지 오스만의 재정을 관리해 주거나 돈을 주고 팔레스타인을 얻어내겠다는 방향성만 잡은 것이 전부였다. 심지어 그런 조건을 실행할 수 있는 자금조차 확보하지 못했다. 영국의 유대인 부호 사무엘 몬터규(Samuel Montague)가 팔레스타인을 매입하기 위해 2백만 파운드를 낼 의향이 있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것만이 약간의 위안을 줄 뿐이었다. ...


헤르쯜은 기차에서 우연히 오스만의 주프랑스 대사를 만났다. 그는 대사에게 인사를 건네고 팔레스타인을 매입해 “완전한 독립 국가”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들려주었다. 대사는 그의 솔직함에 대한 보답으로 진솔한 답변을 들려주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이 팔레스타인을 독립된 국가로 얻을 수는 없을 것이오. 어쩌면 속국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헤르쯜은 모든 속국은 어차피 독립을 원하게 되기 때문에 위선적이라며 부정적으로 대답했다. 그렇지만 협상이 생각보다 어려울지 모른다고 염려하기 시작했고, 이스탄불에 도착하자마자 독립 국가가 안 된다면 속국도 논의해 보기로 입장을 바꿨다.


헤르쯜은 이스탄불에서 갖은 노력 끝에도 술탄을 알현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 오스만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을 형성하는 등의 공을 세우면 알현할 기회를 주겠다는 조건부 대답은 얻어냈습니다. 그는 이제 속국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속국을 목표로 내세웁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위장목표로써 말이지요.


시온주의자 골드스미드(Goldsmid) 대령에게 협상의 결과를 알리는 편지에서 그는 속내를 드러냈다. 오스만은 “어떤 대가로도 팔레스타인을 독립 국가로 주지는 않을 것이오. 그러나 (아마도 이집트와 같은) 속국의 형태로는 우리 조상의 땅을 단기간에 얻을 수 있을 테지요. ... 튀르키예가 해체되면 팔레스타인은 우리에게나 자식들에게 독립 국가로 떨어지게 게요.


헤르쯜은 유대인 부호의 재력과 권력가들의 도움을 빌어 오스만에 공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상류층에서 도움의 손길은 구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방향을 바꿔 대중의 도움을 얻고자 시온주의자 대회(congress)를 열기로 합니다. 그러나 이조차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대회 개최지가 독일의 뮌헨으로 결정되자 독일의 유대인들이 항의해 급하게 스위스의 바젤로 변경하고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합니다.


자신을 유대 민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 속해있다고 보는 고대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우리가 민족적 정서를 취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우리만을 위해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유럽) 민족주의를 존중하니 ... 우리의 (유대) 민족주의를 존중해 달라.


헤르쯜은 시온주의 선전 신문의 창간호에서 시온주의의 목표를 “지금 사는 곳에서 동화되고 싶지 않거나 될 수 없는 유대인들을 위해 국제법으로 보호받는 고향(Heimstatt) 을 건설하는 것”으로 정의했습니다. 유대인의 반발과 오스만을 의식해 불과 1년 만에 독립국가에서 속국으로, 속국에서 다시 고향으로까지 바꾼 겁니다.


이런 어려움 끝에 1897년에 제1차 시온주의자 대회가 열렸고 20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조촐한 시작이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순간이었습니다. 참가자들은 헤르쯜의 신중론을 따라 시온주의의 목표를 "팔레스타인에서 공법으로 보장받는 유대 민족의 고향을 건설하는 것"으로 정의하는 데 동의했고, 시온주의자 기구를 설립해 헤르쯜을 초대 의장으로 선출했습니다.


시온주의자 대회는 헤르쯜이 던진 마지막 승부수였다.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에 쓴 일기는 절망적인 심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내가 모두에게 숨기고 있는 사실은, 나에겐 오직 구걸하는 무리만이 있다는 것이다. ... 충직한 이는 거의 없다.” 그는 대회를 열고도 열강의 지배자나 유대 부호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면 은퇴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회를 마치고 적은 일기에서는 승리감을 만끽했다. “바젤 대회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 나는 유대 국가를 건국했다. 지금 이 말을 소리 내서 말한다면 온 세상에 웃음거리가 되겠지만 아마 5년 뒤나, 적어도 50년 후에는 모두가 그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국가의 기반은 국가를 원하는 민족의 의지에 있다.


2.3. 커지는 아랍의 경각심


시온주의자 대회가 열렸다는 소식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 지난 10여 년 간 식민촌이 늘어나고 소작농들이 추방되는 걸 보며 아랍 지도자들은 가뜩이나 경계와 우려의 목소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헤르쯜 이후로 공개 활동이 커지자 즉각 대응태세를 갖췄습니다.


대회가 열렸다는 소식은 예루살렘과 가자의 지역신문에 보도되었다. 바로 그 해에 예루살렘군에서는 타히르 후세이니의 주도로 유대인의 토지 매입 현황을 조사하는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토지 매입을 엄격히 규제할 것을 권고했고, 이후 수년간 예루살렘군에서 유대인의 토지 매입이 금지된다. 불법 이주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조사하는 위원회도 설립되었다.


그런데도 헤르쯜은 아랍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을 유지합니다. 오스만 제국은 튀르키예인들의 나라이고 아랍인은 제2의 국민 혹은 그마저도 못한 존재로 치부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태도는 사실상 모든 시온주의자들의 공통점이었고 이듬해 열린 2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확인됩니다.


아랍인들의 경계심은 커지는데 시온주의자들의 현실 인식은 여전히 변함 없었다. [식민화 파벌인] 히바트 시온은 식민화가 아랍인들에게 경제적 혜택을 가져와서 갈등이 원만히 해결될 것이라는 전망을 유지했다. 헤르쯜을 따라 최근에 시온주의자가 된 이들 중에는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이 산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들도 있었다. 헤르쯜의 최측근인 막스 노르다우(Max Nordau)조차도 뒤늦게 알고는 “그러면 우리는 잘못된 일을 하고 있는 거군요.”라고 탄식했다.


아랍인들이 시온주의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우려도 없었다. 2차 대회에 앞서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온 레오 모츠킨(Leo Motzkin)은 대부분의 비옥한 땅은 아랍인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고 그 수가 확실치는 않으나 65만 명에 이르며, “선동된 아랍인과 유대인들 사이에 셀 수 없이 많은 충돌이 있었다.”고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하지만 모츠킨은 누가 왜 선동했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이런 충돌이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있어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가 부족한 아랍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며, 유대인들이 용감히 맞서 싸웠다고 칭송했다. 다른 한 시온주의자는 팔레스타인의 아랍 인구는 여전히 매우 과소하며 아랍인들은 유대인과 같은 셈족이므로 잘 지낼 수 있다고 발언했다.


식민화가 토착민의 저항을 불러오기 때문에 이주 이전에 주권을 먼저 인정받아야 한다고 주장해 온 헤르쯜이 이런 낙관론을 믿었을 리는 없다. 한 달 전쯤 오스만의 주미 대사가 시온주의에 부정적이라는 소식을 들었을 때 헤르쯜은 “나는 오래전부터 튀르키예인들의 불신을 알고 예상하고 있었소. 이게 바로 내가 침투[=점진적 식민화]에 반대하는 이유요. ... 소규모 식민화에 반대해야지만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국가를 요구할 수 있소. 식민화를 하는 이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겁니다.”라고 말했다.


헤르쯜이 등장한 이후로 시온주의 운동은 매년 크게 성장하고 식민촌도 덩달아 규모를 키웁니다. 비록 헤르쯜 자신은 식민화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시온주의 운동의 시발점이자 핵심 세력인 식민화 파벌무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식민화는 시온주의의 한 가지 방법으로 인정받고 꾸준히 진행됩니다. 또한, 유대 국가를 지향하지 않는 인도주의 기구인 '유대식민협회'가 유대인의 피란처 중 한 곳으로 팔레스타인을 지정하면서 식민 활동이 더욱 왕성해집니다. 이에 따라 아랍인들의 저항은 점차 격렬해지고 유혈 사태가 늘어납니다.


2.4. 풀리지 않는 시온의 문제


1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헤르쯜은 시온주의 운동이 “유대 문제를 시온의 문제로 변형”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시온의 문제란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얻어내는가’를 뜻한다. 그러므로 헤르쯜의 말은 유럽에서 유대 문제가 해결될 방법은 없고 팔레스타인을 얻는 것만이 유대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이란 인식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1890년대 말에는 서유럽에서도 해방의 기조가 무너져가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 문제가 유럽에서 해결되기 어렵다는 인식은 강화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이 팔레스타인에 있다는 믿음은 만들어지기 힘들었다. 시온의 문제가 풀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스만과의 협상은 지지부진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얻는 게 불가능하거나 너무 먼 미래처럼 보이자 헤르쯜은 중간집결지로 삼을 다른 지역을 얻고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방편도 고민합니다. 1901년의 일기에는 “우리는 키프로스에서 집결해 언젠가 이스라엘 땅으로 넘어가 무력으로 빼앗을 것이다.”라고까지 적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주변에 공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지지자들은 '유대인의 피란처'라는 실질적인 기능보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유대 국가'라는 이상향을 더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02년에 마침내 오스만이 최종적으로 거절하자 임시영토를 추구하기로 마음을 바꿉니다.


2.5. 유대 문제로부터 멀어져 가는 시온


시온주의가 그동안 유대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시온의 문제가 저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20여 년 동안 팔레스타인은 단기간에 획득 가능한 땅으로 믿어졌다. 처음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서 아무 데서나 곧장 경작할 수 있는 ‘버려진 땅’으로 상상되었고, 아랍인들이 거주하는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에는 식민 활동으로 금세 유대인들의 땅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이후 식민화의 암울한 전망이 확인되었을 때는 헤르쯜이 등장해 오스만으로부터 협상으로 얻어낼 수 있다고 희망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가자 시온주의자들은 유대 문제와 시온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903년에 동유럽에서는 또다시 포그롬이 발생합니다. 이번에는 사흘 만에 41명이 사망하는 등 이전보다 인명피해가 컸고, 이주자 또한 증가했습니다. 헤르쯜은 영국의 동의를 얻어 동아프리카의 식민지에 유대인의 피란처를 조성하기로 합니다. 제6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그는 이같이 말했습니다.


(영국의) 제안은 동아프리카에서 ... 유대 자치 지역을 세우는 것입니다. ... 유대 민족은 팔레스타인 외의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없으며 ... 선조들의 땅을 향한 우리의 태도는 지금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the Congress)은 영국 정부와의 협상의 결과로 우리의 운동이 엄청난 진전을 거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겁니다. ... 저는 여러분이 이 제안을 이용할 수단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제안에 담긴 정신은 우리 운동이 기반으로 삼는 중대한 원칙들을 조금도 포기하지 않고 유대 민족의 상황을 개선하고 고통을 줄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


동아프리카는 시온이 아니며 시온이 될 수도 없습니다. 민족적, 정치적 기반에 근거하지만 단지 식민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이 제안에 따라 유대 대중에게 대규모로 이주하라는 신호를 주어서는 안 되며, 줄 수도 없습니다. 동아프리카는 현재 (유대인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는 자선가들의 당혹감을 덜어주고, 우리 민족이 각지로 흩어져 우리와 유대감을 잃는 경우를 예방하는 긴급조치로 남아야만 합니다.


이처럼 헤르쯜은 동아프리카의 식민지가 시온주의의 종착지가 아니라 시온주의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될 중간 과정이라는 의도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샀고, 강력한 반발에 부닥치게 됩니다. 반대파는 아이러니하게도 박해가 발생한 러시아의 시온주의자들이었습니다.


포그롬이 일어나 유대인들이 피난처를 찾고 있는 동유럽의 시온주의자들이 정작 새로운 피난처를 확보하는 것을 거부하고, 물리적 박해와는 거리가 먼 서유럽의 시온주의자들이 동아프리카안에 찬성하는 역설적인 상황은 시온과 유대 문제의 관계를 인식하는 방식의 차이에 있었다. 서유럽에서는 시온주의가 근본적으로 유대인의 생명과 권리를 억압하는 유대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우선적으로 인지된 반면, 동유럽에서는 그에 못지않게, 혹은 그 이상으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것이 중요하고 팔레스타인은 그러한 정체성에서 핵심을 차지한다고 믿어졌다. 반대파는 스스로를 “시온의 시온주의자”라고 불렀고, 시온 밖에서 이루어지는 시온주의를 상상하는 것을 거부했다.


헤르쯜이 던진 동아프리카 안은 시온주의 운동의 정체성에 커다란 질문을 던졌습니다. 시온주의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팔레스타인가 아니면 유대인의 생명인가? 그동안은 양자가 병행하는 것처럼 상상되었지만, 이제는 '유대 문제'와 '시온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현실적 자각을 하게 됩니다. 헤르쯜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놓기 전에 사망하게 되고, 이후 다수의 시온주의자들은 동아프리카를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즉, 유대 정체성]을 선택합니다. 다만, 유대인의 생명이라는 본연의 문제를 저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식민화를 하면 팔레스타인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여 유대 문제와 시온의 문제를 일치시킵니다. 그러나 정작 팔레스타인의 식민촌에서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이런 생각에 반대했습니다.


식민촌의 이주민들은 팔레스타인이 결코 단기간에 유대 민족의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현실을 몸소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동유럽에 남겨두고 온 가족이 나 친척, 혹은 친구들이 박해받는 소식을 견딜 수 없었고 당장 새로운 피난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은밀한 식민화로 팔레스타인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던 벤예후다도 그중 한 명이었다. “민족이 그 땅[팔레스타인]에 있을 수 있다면 좋지만, 그렇지 않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의심된다면, 민족을 위협하는 위험을 막아내기 위해서 당장은 우리 민족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땅에서라도 민족을 만들겠다.” “우리가 원한다면,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어떤 지배적인 언어도 없는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구는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해 히브리인으로 변화할 것이고 그들의 국가는 유대 국가로 변할 것이다.”


서유럽 유대인들과 식민촌 이주민 등은 '시온 외의 시온주의자' 파벌을 꾸려서 팔레스타인 밖에서의 해결책을 찾자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토지가 민족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민족이 토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이념을 내세웠고, 팔레스타인을 단기간에 얻을 방법은 없다고 설파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모두가 금기시해 온 아랍인들의 반대를 화두에 올리고야 맙니다. (3장 3절에서 계속)




3장 2절은 시온주의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점을 짚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바로 유대 문제와 팔레스타인의 연결고리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수백만 유대인을 이주시킬 땅을 찾고 있었고 팔레스타인은 어떤 조건에서도 이에 부합하지 않았습니다. 너무나도 작은 영토, 부족한 농경지, 그리고 이미 거의 모든 경작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식민화에 반대하는 아랍인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팔레스타인이 유대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이유는 사실상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역사적 고향이라는 낭만'이었습니다. 유대교조차 연결고리는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1930년대 이전까지는 다수의 랍비들이 팔레스타인으로의 집단 이주에 반대하는 입장을 유지했고, 대다수의 시온주의자는 세속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다수의 시온주의자들은 어째서 그토록 팔레스타인을 염원했을까요? 그들이 원하는 '낭만'이라는 무엇이길래?


우선, 먼저 짚고 넘어갈 점은 시온주의에서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다는 이념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동유럽의 포그롬은 30년 간 백여 명의 목숨밖에 앗아가지 않았습니다. 중세 시대에 수천 명, 수만 명의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학살당한 것과 비교하면 미미하고, 오늘날 21세기에 팔레스타인에서 반년 만에 3만 명이 죽은 것과 비교해도 천국이 따로 없다고 말할 정도로 안전했습니다. 분명, 시온주의가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다는 이념에서 출발한 것도 맞고 모두가 이 점을 의식한 것도 사실이지만, 가까운 미래에 대규모 유혈 사태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는 시온주의자들이 나중에 나치 히틀러와 협정까지 맺고 유대인의 대독일 불매운동을 무력화시킨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따라서 다수의 시온주의자들은 당장 몇몇이 흘리는 핏줄기에 조급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며 가장 완벽한 해결책을 원했고, 그게 팔레스타인에서 세워질 유대 국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박애주의자가 아니라 '유대' 민족주의자였고, 진정으로 구하고 싶은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의 유대인들은 절대다수가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인지하고 있었고, 팔레스타인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가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을 우려가 컸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서 팔레스타인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습니다.


'유대'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겠다는 목표의식은 그 자체로는 분명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표에는 아랍인의 권리를 희생시킨다는 이면이 존재했고, 우리는 그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친이스라엘 사관은 시온주의가 유대인의 목숨을 구하는 이념이었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며 시온주의의 정당성을 옹호하지만, 진실된 역사는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의 생명에는 소홀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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