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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r 20. 2024

해제| 3장 1절 - 팔레스타인에 내던져진 유럽의 문제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오늘 3월 20일은 국제 행복의 날이랍니다. 그렇지만 오늘도 어김없이 그리 행복하지 않은 내용의 글을 씁니다. 그래도 이런 글을 자꾸 읽고 널리 알려야 국제 행복을 만들 수 있는 거겠지요?


팔레스타인에서의 분쟁을 이해하기 위해 끼워야 할 첫 단추는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갈등이 19세기말에 처음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일부 기독교 종파에서 주장하는 5천 년 분쟁이라는 속설과는 정반대로, 우리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인'하고 싸운 적도 없고, 무슬림의 지배 하에서 유럽이나 다른 이슬람권에서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다는 것을 2장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왜 갑자기 19세기 말에 갈등이 생겨났느냐? 3장 1절은 그 답을 찾는 단락입니다.


우선, 제목부터 살펴볼까요? "팔레스타인에 내던져진 유럽의 문제"네요. 그러면 당연히 유럽에서부터 글을 시작해야겠군요.


 1.1. 유대 민족의 발명과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


19세기는 유럽의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문을 열어주었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 이후로 ‘계몽된’ 여러 서유럽 국가들이 유대인의 해방(emancipation)을 선포한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게토에서 빠져나오고 종교와 직업의 자유를 인정받으며 선거권을 가진 시민이 되었다. 이는 정체성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 기독교 질서 속에서 항상 타자(他者)로 규정되고 박해를 당할 때는 유럽 공동체에 소속감을 느끼기 어려웠으나 이제는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유대인들은 오래지 않아 유럽 민족들에 완전히 동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는 이들의 소망을 짓밟고 결과적으로 유대 민족이 만들어지는 중요한 계기를 만든다. 분쟁의 기원은 여기서부터 찾을 수 있다.


19세기는 유럽 유대인들에게 정말로 희망찬 시대였습니다. 기독교의 영향력이 약해지고 사회가 세속화되자 유럽인들은 굳이 유대인을 괴롭혀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일자리가 넘쳐나니 이웃을 약탈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경제적으로 성장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도 중요한 변화의 요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만국협회나 그 밖의 여러 자선단체를 만들어 유대인의 구제와 지위 향상에 힘썼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는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유럽인들은 중세 동안에 '우리'를 정하는 기준이었던 기독교를 대신할 무언가를 찾아 나섰고, 그게 바로 '민족'이었습니다.


‘민족’(nation)은 18세기에 서유럽에서 태동한 새로운 개념의 공동체였다. 일반적으로 특정한 지리적 공간에서 오랜 세월 동안 동질성을 공유해 온 집단을 일컫지만, 그러한 민족성이 무엇인지, 누가 구성원에 해당하는지를 판별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고 유지되어 온 집단이 아니라 오랜 역사 속에 혼재하고 섞여 있는 여러 사람을 새로운 기준으로 묶어내어 '발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민족이란 개념이 만들어졌을 때 이는 자연히 국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래서 '민족국가'라는 개념이 파생되고, 민족은 자기만의 국가를 가질 권리가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개념에 들어맞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였습니다. 박해를 피해 여기저기 피란을 다니다 보니 여러 국가에 흩어져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유럽을 넘어 중동과 아프리카에서도 살고 있었고요. 그러니 유럽의 민족주의자들유대인 눈엣가시로 여겼고, 유럽에서 쫓아내야 한다거나, 아니면 유대인들이 유대교를 비롯해 과거의 관습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논쟁을 유대 문제(Jewish Questino)라고 부릅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심지어 유대교는 교리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유럽인과의 동화를 지향했습니다. 그동안 유대교에서는 메시아(구세주)가 도래하면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갈 것이라고 가르쳐왔는데, 이를 근거로 유대인들이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게 되자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는 현실의 문제가 아니라 유토피아적인 세계가 도래했을 때를 의미하는 것으로 개념을 전환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변화에 반발하고 유대인만의 민족을 만들자고 주장하는 세속적인 유대 지식인도 나타납니다. 19세기 중반에 독일 유대인 모세 헤스는 유대인만의 민족성이 팔레스타인으로 건너가 유대 국가를 세우자고 주장합니다.


유대인이 독자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대 문제는 반드시 생길 수밖에 없다. “유럽 민족들은 그들 사이에 있는 유대인들의 존재를 항상 이질적으로 여겨왔다. ... 계몽과 해방에도 불구하고, 민족성을 부인하고 해외에 사는 유대인들은 거주하는 지역의 다른 민족들로부터 절대로 존중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식민촌”을 건설하고 “유대 국가”를 “재건”함으로써 민족을 부흥시켜야지만 유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헤스는 서유럽 유대인들 사이에서 관심을 끄는 데는 성공했으나, “우리는 독일인이거나 프랑스인, 영국인, 미국인이며, 오직 그 후에야 유대인일 뿐이다.”와 같은 반박에 힘없이 무너졌습니다. 근본적으로, 헤스는 유대 민족이란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이 종교를 통해 이어져 온 민족이고, 따라서 유대교는 '민족성의 표현'이며 '독실한 유대교 신자는 누구보다도 애국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불과 얼마 전까지 세속주의자였으니 주변에서 공감을 살 수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헤스는 사회 변혁에 실패하고 잊히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의 사상이 미흡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후대의 사상가들도 헤스보다 나은 설명을 제공하지는 못했습니다. 헤스가 실패한 것은 너무 일찍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20여 년의 세월이 더 지나 1880년대에 동유럽에서 유대인 박해가 일어나자 유대인들은 앞으로도 영원히 유럽인으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나고 비로소 '유대 민족'이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됩니다.


당시 동유럽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는 유대인을 러시아인으로 동화되도록 교육시켰으나, 동화의 속도는 느렸고 사회적 차별이 사라지지도 않았습니다. 1881년에 러시아의 군주 짜르가 암살당하자 기독교도 상인들이 선동해 유대인의 소행이라는 소문을 퍼트렸습니다. 1884년까지 4년 동안 총 160여 개의 도시와 마을에서 49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고 방화로 2만 명 이상이 집을 잃었습니다. 이때부터 동유럽에서는 1차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2백만여 명의 대규모 피란 물결이 일게 됩니다. 대부분의 이주자는 경제적 기회가 보장된 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지만, 극소수는 팔레스타인으로 오게 됩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세속주의적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이 기독교를 대신해 민족주의를 '우리'라는 공동체를 만드는 기준으로 내세웠듯이, 세속적인 유대 지식인들에게도 '우리'라는 공동체를 만들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와는 담을 쌓고 멀리했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럽 민족으로서의 동화를 지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참해지는 박해를 당하게 되자 생각을 바꾸고 유대인만의 민족을 만들기로 결심합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자로의 전환은 급작스러운 것이었고 특별한 사상적 토대가 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낭만주의적인 생각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깊이 생각해 보지 않고 '조상들의 고향인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가자'는 비현실적인 제안을 던집니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사실 역사 속 팔레스타인의 위상은 유대인에게나 기독교도에게나 무슬림에게나 매우 약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애착이 대단했고 어쩌고 하는 소리를 들어보신 분들도 있을 텐데, 그건 전부 유럽에서 살 권리를 부정하고 성경의 하느님을 증명하는 도구로서의 유대인을 원하는 기독교의 반유대주의에서 비롯된 편견입니다. 예루살렘을 성지로 둔 유럽 기독교도들이 유럽을 고향으로 생각했듯이, 유럽 유대인들도 유럽을 고향 땅으로 생각했고, 팔레스타인에는 기독교도들만큼의 관심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성경을 멀리 한 세속주의자들에게 팔레스타인은 더더욱 무가치한 곳이었고요.


그러니 1881년에 박해가 일어나고 세속적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자로 거듭났을 때, 그들의 머릿속에는 팔레스타인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누가 살고 있는지, 그 수는 얼마나 되는지, 농사를 지을만한 땅은 있는지, 외국인이 땅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유대인만의 정치체제를 가지는 게 허락이 될지 아무것도 모른 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습니다.


1.2. 팔레스타인의 식민화


유럽 유대인들의 이주는 식민화라고 불립니다.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식민주의와는 달리, 식민화는 본토(本土)로부터 떨어진 외부 지역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기 위해 이주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런 이주자들이 모여 사는 곳을 식민촌(colony)이라고 불렀고요. 그런데 역사적으로 대부분의 식민화는 경제적 착취나 문화적 지배 등 토착민에게 위해를 끼치는 식민주의로 이어졌습니다. 유대인의 식민화도 마찬가지였는데, 왜냐하면 아랍인을 열등한 족속으로 여기고 철저히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유럽 유대인들은 식민화를 꿈꾼 동시대 혹은 한 세대 전의 기독교도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토착민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땅에만 관심을 가졌다. 기독교도의 ‘약속의 땅’이라는 종교적 권리가 ‘선조들의 고향’이라는 역사적 권리로 바뀌었을 뿐, 팔레스타인은 ‘구원’을 기다리는 ‘버려진 땅’이라는 똑같은 관념이 그들의 의식을 지배했다. 일례로, 1853년부터 1890년대 초반 사이에 출판된 히브리 픽션(fiction) 문학은 팔레스타인을 배경으로 하는 게 많지만 아랍인을 언급하지 않는다. 문학자 데이비드 패터슨(David Patterson)은 이 40년 동안 출판된 히브리 문학의 상당수를 읽었으나 “다른 어떤 민족이 이스라엘 땅을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하는 글은 고작 두 개밖에 보지 못했다."


유럽 유대인의 상상과는 달리 1880년경에 팔레스타인에는 약 50만 명이 살고 있었고 2만 명 내외의 유대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구가 아랍인이었다. 아랍인을 유목민으로 간주하는 오리엔탈리즘과도 다르게 대부분은 정착 생활을 했다. 인구의 약 3분의 1이 16개의 도시에서, 3분의 2는 613개의 농촌에서 거주했고 그 외 2~3만 명의 베두인만이 유목 생활을 했다.


팔레스타인에 와서 아랍인들이 많이 사는 것을 보고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깜짝 놀랍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와서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민족이란 '국가'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집단을 뜻하는 거니까요. 또, 그러한 국가가 있어야지만 유대인들을 박해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이 버려진 땅이 아니라니,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팔레스타인에서 히브리어를 일상언어로 소생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엘리에젤 벤예후다(Eliezer Ben- Yehuda/1858-1922)는 1881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최초의 민족주의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버려진 땅으로 믿었던 이곳에서 다수의 아랍인을 발견하자 걱정에 빠졌다. ... 벤예후다는 팔레스타인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고 1882년 9월에 동료에게 서신으로 알렸다.


“우리가 지금 해야 할 일은 가능한 강해져서 조금씩 은밀히 땅을 정복하는 것이다. 조용하게, 은밀하게 해야만 해낼 수 있다. ... 아랍인들이 우리의 목표를 알지 못하도록 위원회는 만들지 않아야 한다. 간첩처럼 은밀하게 행동하고 계속해서 (땅을) 사야 한다.”


“우리는 신뢰하는 ... 사람들을 제외하곤 정보를 노출하지 않도록 규칙을 정했다. ... 목표는 이 땅에 우리 민족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 우리가 강해지고 다수가 되기 전까지 아랍인들의 적대감을 일깨우지 않고 전략적으로 행동하기만 한다면, 땅을 쉽게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1.3. 갈등의 시작


이스라엘의 건국 신화에서 유대인들은 사막에서 꽃을 피워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될 때까지도 유대인들은 사막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제로 정착한 땅은 팔레스타인 저지대의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그것도 버려진 땅이 아니라, 지주들이 아랍 소작농에게 개간을 맡겨놓은 곳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서 사들인 땅은 성경 시대에 고대 이스라엘인의 중심지였던 산악지대(오늘날의 서안지구)가 아니라 근래에 아랍인들이 열심히 개간 중인 저지대였다. 산악지대는 저지대에 비해 척박한 데다가 아랍 인구가 밀집해 있고 많은 농민이 개별적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식민촌을 만들려면 토지를 팔 의향이 있는 농민들을 여럿 찾아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반면, 저지대는 대체로 비옥하고 인구가 적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나 레바논 등지에서 사는 부재지주(absentee landlord)가 토지를 소유한 땅이 많았다. 부재지주들은 토지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기 때문에 유대 민족주의자들에게 기꺼이 토지를 팔았고 민족주의자들은 단 몇 명과의 거래만으로도 식민촌을 건설하기에 충분한 토지를 구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하지만 이들의 거래에서 소작농의 권리는 보호받지 못했다.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아랍 지주들처럼 돈을 벌기 위해 토지를 사들이는 게 아니라 유대인을 정착시켜 땅을 정복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언제나 아랍 소작농을 추방했다. 쫓겨난 농민들은 관습적 권리를 내세워 생계수단과 집을 돌려달라고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 지역에서는 지주가 바뀌어도 소작농은 그대로 두는 게 관습이었습니다. 경작을 한 사람이 땅의 주인이라는 매우 바람직한 사상이 오래전부터 널리 자리 잡고 있었던 덕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런 법도에는 관심이 없었고, 특히 민족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민족만의 정치체제를 만들어내고 싶었기 때문에 아랍인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소작농들이 반발했습니다.


식민촌이 규모를 키울수록 그에 비례해 불만을 품은 아랍인들이 늘어났고 물리적 충돌로 번졌다. 급기야 1886년에는 아랍인들이 페타 티크바를 공격해 다섯 명의 유대인이 다치고 그중 한 명은 부상이 악화돼 목숨을 잃었다. 같은 해에 시리아의 골란 고원(Golan Heights)에 세운 식민촌 브네이 예후다(B’nei Yehuda)에서는 2명이 살해당했다. 유혈사태는 비록 예외적이었으나, 아랍인들이 작물을 해치려고 경작지에 가축을 몰고 오고 식민촌 주민들이 총으로 쫓아버리는 일과 같은 ‘소소한’ 충돌은 매우 흔했다. 역사학자 네빌 만델(Neville Mandel)은 “단 한 번도 아랍 이웃과 갈등을 겪지 않은 유대 식민촌은 거의 없었다.”고 설명한다.


유대인들의 세력이 약했던 이 시기에 아랍인들은 실제로 위협적인 존재였으나, 적어도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낙관적으로 전망했습니다. 아랍인들은 미개하기 때문에 식민화로 경제적 이익을 보게 되면 이빨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고, 또 식민화가 성공해 빠른 시일 내에 유대인의 수가 늘어나고 군사력을 갖추면 아랍인들이 대항할 생각조차 못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식민화는 아랍인들에게 많든 적든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힘과 기술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아랍 농민을 임금노동자로 고용했다. 비록 약소한 급여였으나 농민들은 부가적인 수입을 거두고 이를 현금으로 받을 수 있어서 만족했다. ...


따라서 식민화에 대한 저항은 주로 토지 분쟁을 겪은 마을의 주민들로만 국한되었고 그보다 많은 아랍 주민들은 식민촌과 호혜적인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수혜자가 많다고 해서 피해자의 불만을 잠재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추방당한 소작농들은 고용이 불안정한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것보다 땅의 주인으로 있던 과거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피해는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히 보상받을 수 없었다. ...


유럽 우월주의와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식민촌 주민들은 ‘원시적인’ 아랍인과 어울릴 생각이 없었다. 위협을 줄이기 위해서는 아랍어를 배우고 어느 정도의 교류가 필요하다는 인식은 있었으나, 유럽에서 멸시받던 약자에서 누군가에게 공포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된 것을 긍정적인 변화로 반기는 주민들이 많았다.  ‘야만적인’ 아랍인들은 힘과 권위에만 복종하기 때문에 대화가 아니라 무력을 길러서 존경심을 얻어내는 게 올바르다는 신념도 있었다. 빌루의 선발대로 팔레스타인에 이주해 왔다가 포기하고 1887년에 러시아로 되돌아간 하임 히신(Chaim Chissin)은 “식민 초기 시절에는 아랍인들을 동물처럼 다루었고, 고압적으로 처벌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유대인들은 몰랐지만, 이 시기부터 아랍 지도자들은 유대인의 식민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경계했습니다. 그들은 오스만 정부에 유대인의 이주와 토지 매입을 금지하고, 불법체류자들을 추방시켜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이 늘어나면 자신들의 영향력을 키울 수 있다고 생각한 러시아와 영국 등의 입김으로 인해 오스만은 이주를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군사력도, 재정도 너무나 약화돼서 유럽 국가들의 도움 없이는 살아남기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불법체류자를 찾아내도 유럽의 비위를 상하게 할까 봐 두려워 쫓아내지도 못했습니다. 이를 본 아랍인들은 무능한 정부,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내정 간섭, 그리고 유대인의 식민화에 대한 불만을 키워갑니다.


1.4. 깨어진 환상


오스만 제국이 별다른 제재를 하지 못했는데도 유대인의 식민화는 진척이 매우 더뎠습니다. 여전히 절대다수의 유대인들이 민족주의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동유럽에서 이주의 물결은 계속되고 있었으나 팔레스타인으로 오는 이주자는 얼마 없었고, 민족주의를 숭상해서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아메리카대륙까지 갈 여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극빈층이었습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에 와서도 굶주림에 허덕였고, 상당수가 오래지 않아 유럽으로 돌아갔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유대인들이 유럽에서처럼 상업에 종사하기보다는, 농사를 지으면서 근면 성실함과 육체적 건강함을 기르고, 정신적으로 각성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농업 식민촌을 만들자고 소리 높이고 이를 후원했으나, 이주자의 95% 이상이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육체노동에 익숙지도 않으니 농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습니다. 그나마 유대인 부호 로스차일드 가문의 도움이 있었던 덕분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식민화의 또 다른 문제점은 지나치게 아랍 노동력에 의존한다는 데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처음에 자신들끼리 농사를 지으려고 했으나, 농사일이란 게 들이는 수고로움에 비해 수확이 보잘것없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 농장주는 농업 노동자들에게 넉넉한 임금을 주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거부한 일자리는 적은 돈이라도 벌고 싶어 하는 아랍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럽식 생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고임금을 요구했으나 농사를 지은 경험도, 지식도 없었다. 자연히 노동 시장에서 아랍인들에게 밀려났고 식민촌으로 오고 싶어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1890년에 식민촌은 약 5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었는데 그중 4분의 3이 아랍인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못하고 유대 국가의 초석이 아랍인들의 피땀 어린 노동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현실이 민족주의자들에게 달가울 리 없었다. 그러나 식민촌의 존속을 외부의 지원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아랍 노동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나마 4분의 1이라는 저조한 비율도 로스차일드와 민족주의자 기구 히바트 시온이 유대인들에게만 통상임금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보조금을 추가로 지급한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유대인만을 고용하기로 목표를 세운 식민촌들도 있었으나 오래 버티지 못하고 아랍 노동자를 고용했다.


유대 민족주의자들은 히바트 시온이라는 단체를 조직해 유대인의 이주를 장려하고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1885년에 회원 수는 1만 5천 명이었으나, 10년 뒤에는 오히려 절반 가까이 줄어듭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식민화로 유대 국가를 건설해 유럽의 유대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야심 찬 꿈은 점차 무너져가는 듯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식민화를 이어가는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시온주의자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이 용어는 유대인과 비유대인 모두에게 빠르게 퍼졌다. 민족주의자, 즉 시온주의자의 활동이 뚜렷하게 정치적 현상으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시온주의는 멈추지 않았다. 아무리 더디더라도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와 식민촌의 건설은 계속되었다. 유대 문제가 존재하는 한 해결책은 필요했고 민족을 만들고 싶어 하는 자들에게 시온주의는 가장 이상적인 답으로 보였다.




3장 1절의 제목은 "팔레스타인에 내던져진 유럽의 문제"였지요?  유럽의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셨나요? 바로 유대 문제, 그러니까 타자로 정의되어 유럽에서 소속될 곳을 잃은 유대인들입니다.


친팔레스타인 사관에서는 시온주의의 유래나 궁극적인 목적보다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추궁하며, 식민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유럽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설명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남긴 시온주의자들의 기록에는 아랍인에 대한 반감이나 증오가 전혀 없습니다. 그들이 유럽 우월적 시각으로 아랍인을 멸시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것만으로는 식민화와 아랍인의 추방을 정당화하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연구를 했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1. 우선,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아랍인이 사는지 몰랐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이 처음으로 아랍 인구를 조사하여 65만 명으로 보고한 것은 1897년입니다. 그 이전에는 막연히 아랍인들이 산다는 인식이 있었을 뿐, 식민화와 유대 국가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을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습니다.


2. 식민화는 유럽의 오랜 역사이고, 그 잔학함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굉장히 칭송받습니다. 그 이유는 미개한 원시인들에게 문명을 전파해 잘 살게 해 준다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독교보다도 더 많은 유럽인이 강력하게 숭배했던 '신앙'입니다. 19세기 말에는 반성적인 태도도 형성되지만 소수의견에 그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들이 시간이 지나면 식민화를 환영할 것으로 믿었습니다.


3. 유럽 문학에서 아랍인들은 사막을 떠돌며 유랑하는 유목민으로 묘사되었기 때문에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에게는 땅에 대한 애착이 없다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땅을 차지해도 아랍인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해 가면 그만이라고 믿었습니다.


4. 유럽 문학은 아랍인이 미개하여 힘을 숭상하는 집단이라고 묘사했고, 이는 유대인들이 아랍인과 사회적으로 교류해서 평화를 얻어낼 아니라 힘으로 억눌러서 평화를 쟁취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발전했습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이런 점들이 식민화를 정당화해 주는 강력한 요소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전혀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까지 믿은 것은 아닐 겁니다. 벤예후다 같은 시온주의자들이 아랍인들 몰래 비밀리에 식민 활동을 해야 한다고 결의한 것에서 알 수 있지요. 다만, 저런 요소들이 잘못을 '어느 정도' 감추는 사상적 도구가 되었던 거지요.


식민화를 계속해가면서 시온주의자들은 저런 생각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됩니다. 가장 이르게는 1891년에 아하드 아함이라는 지도자가 이를 지적합니다.


해외에서 우리들은 이스라엘 땅이 사람들이 거의 전적으로 살지 않고 경작이 안 된 사막지대이고, 누구나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땅을 살 수 있다는 믿음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어디에서도 경작에 적합하지만 미경작지로 남아 있는 땅을 찾기는 힘들다. 기껏해야 과실나무나 심을 수 있고, 그마저도 경작하는 데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필요한 모래밭이나 돌산 같은 곳만 미경작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 그러므로 언제나 좋은 땅을 매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농민들뿐만 아니라 지주들도 결함이 없는 좋은 땅을 내놓지 않는다. ...


식민촌의 유대인들이 “아랍인들을 적대하고 잔인하게 대하고, 그들의 영토를 부당하게 침범하고, 부끄럽게도 타당한 이유도 없이 폭행하고, 심지어 그런 행동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도 누구도 나서서 이렇게 위험하고 야비한 충동을 멈추라고 말하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런 행동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랍인들이 식민 활동에 저항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아랍인들이 힘과 용기를 선보이는 자들만을 존중한다는 우리 민족의 생각은 옳다. 하지만 상대방이 압제적이고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면 ... (아랍인들은) 원한을 품고 복수한다.”


다만, 아랍인들의 잠재적 위협은 매우 미약하게 평가되었다. 하암은 태도만 개선하면 아랍인들의 증오를 일깨우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설령 유대 공동체가 번영하는 것을 보고 “질투심으로 증오가 생겨나더라도” 그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고, 그 사이에 유대 공동체는 “인구와 토지가 많이 늘어나고, 단결되고, 모범적인 생활방식으로 기반을 잡을 수 있을 것이므로 (아랍인들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전망했다


하암의 문제의식이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정받기까지에는 40여 년이 걸립니다. 과정에서 이미 수십 개의 식민촌이 건설되고 수만 명이 이주해 왔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 아랍인들이 싫어하네? 그럼 그만두자.'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들의 노력과 인생을 부정하는 일이었겠지요. 그러니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새로운 변명거리를 내세우며 계속 자기 행동을 정당화합니다. 의학용어로 말하자면, 골든 타임이 지나가 버린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안타깝습니다. 유럽인들이 편견에 사로잡혀 비유럽인을 제대로 이해하려 들지 않았던 수백 년의 역사가, 그리고 21세기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편견이 살아 숨 쉰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찾고 스스로를 발전시켜 언젠가는 분쟁이 없는 국제 행복의 날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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