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이스라엘 서적을 읽으면 유대인들은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거나 적어도 나쁜 의도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느껴집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나쁜 의도를 드러내는 역사적 사실을 숨기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로운 의도를 보여주는 기록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전자는 1차 사료를 직접 찾아보거나 친팔레스타인 서적을 읽으며 해소할 수 있었으나 후자가 어려웠습니다. 친팔레스타인 서적은 이 부분에 대해서 조명하지 않더군요. 단지 나쁜 의도를 보여주는 기록이 있으니, 좋은 의도를 보여주는 기록은 거짓말이다에 그칩니다. 저는 반드시 그렇게만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이 부분을 정말 많이 고민했고, 5년 차 때야 비로소 해답을 찾았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3장 3절 - 시온주의에 평화는 없었다]에 담겨 있습니다.
3.1. 수면 위로 떠 오른 아랍 문제
1881-2년에 처음으로 팔레스타인으로의 집단적 이주를 도모하기로 결심했을 때 시온주의자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예상했으나 토착민이 문제가 되리라고 생각지는 못했다. 팔레스타인에는 몇 안 되는 아랍 유목민이 있을 뿐이고 그들은 유럽의 기독교도와는 달리 유대인에게 친화적이라고 알려진 탓이었다. 아랍인들이 실제로는 대부분 정착 생활을 하고 있고 그 수가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도 가난하고 토지에 애착이 없는 유목민 출신일 테니까 기꺼이 땅을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것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농민들은 절박한 상황이 아니라면 땅을 팔지 않았고 지주들로부터 땅을 산 후 소작농을 추방하면 언제나 반발했다. 이 소식은 유럽에도 일찍부터 전해졌고 식민화를 시작한 지 20년이 넘은 1905년에 7차 시온주의자 대회가 열릴 무렵에는 아랍인들이 식민화에 저항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시온주의자가 많았다.
"시온주의자가 직면하길 원치 않지만, 결코 눈을 돌릴 수 없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는 이미 주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선조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곳을 점유 중인 부족들을 검으로 쫓아내거나 ... 많은 이질적인 인구와 함께 사는 문제를 붙잡고 씨름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팔레스타인을 얻더라도 누구도 그곳으로 가려하지 않고 파리에 남아 (유대 국가의 프랑스 주재) 대사를 맡을 것이라는 반시온주의자들의 진부한 도발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1905년에 열린 제7차 시온주의자 대회는 영국으로부터 동아프리카에 식민지를 얻어 박해받는 유대인을 이주시킬 것인지를 논의했습니다. 아랍 문제는 이 과정에서 크게 불거졌습니다. 다수파인 '시온의 시온주의자' 진영은 팔레스타인을 고집했고, 아랍 문제는 존재하지 않거나 설령 있다고 해도 식민화를 하는 과정에서 소멸되는문제로 얼버무렸습니다.
결과적으로, 1914년까지도 아랍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하고 변두리에서 간간이 ‘논의만 하는’ 주제로 남게 된다. 친이스라엘 사관에서는 그 이유를 아랍 문제가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했을까?
팔레스타인은 버려진 땅이 아니므로 대규모의 식민화는 아랍인을 쫓아내지 않고는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자명했다. 1907년경에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인구가 약 8-10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0% 내외를 차지하고 토지 소유는 고작 2% 내외에 그치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식민화는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많은 아랍인을 추방해야만 했다. 팔레스타인에 경작 가능한 땅이 많아서 추방하지 않고도 식민화를 계속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주장도 여전히 제기되었으나 이는 지난 25년간의 과거를 부정할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실천하지 않는 일이었다. ...
1881년부터 1907년까지 총 13명의 유대인이 살해되었고, 안보가 취약했던 식민 초기보다는 무장과 경비를 강화한 후기로 갈수록 더 많이 발생했다. 식민화가 경제적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에 아랍인들이 저항하지 않을 것이라는 오랜 통념은 이미 깨어졌거나 상당히 흔들리고 있었다. ...
어쩌면 식민화 초기에는 다수의 시온주의자들이 아랍인은 야만적이라는 유럽식 편견을 믿고 진정으로 평화가 가능하다고 상상했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부터 살펴볼 것처럼 1914년에 이르기까지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은 선입견이 틀렸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3.2. 고용을 위한 추방
1903년 이후로 동유럽에서 이주해 온 유대인 중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았고, 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사회주의자가 주류 세력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중에는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이자 1948년에 인종청소를 지시한 다비드 벤구리온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민족이나 인종을 초월해 전 세계 모든 노동계급의 단결을 주장하는 일반적인 사회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족적 가치를 더욱 중시했습니다.
유대 노동자는 식민촌의 노동 시장에서 계속해서 아랍 노동자에게 밀려나고 있었다. 새로운 이주자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선에 의존했던 이전 이주자의 태도를 비판하며 아랍인과 동등한 시장임금을 받아들이고 검소한 생활을 살아보려 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빈궁한 삶을 잠시도 견디지 못하고 유럽식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고임금을 받을 방도를 모색했다.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그들이 떠올린 것은 저임금으로 일하는 아랍 노동자를 식민촌에서 퇴출시키는 민족주의적 ‘노동의 정복’이었다. ...
그러나 농장주들은 유대인의 고용을 당장 늘리기보다는 저임금 아랍 노동력으로 경제적 기반을 건설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반박했고, 아랍인과의 갈등이 점증하면 종국에는 유대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어서 임금이 자연히 상승하게 될 것이라고 달랬다. ...
결과적으로, ‘노동의 정복’은 두 집단의 이해관계를 절충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즉, 식민촌에서 아랍인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지만 노동 시장을 인종적으로 분리해 임금을 차별화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능력과 관계없이 같은 일에 종사하는 아랍인보다 고임금을 받고 일부 전문기술직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1914년을 기준으로 유대 노동자의 최저임금은 동종업종의 아랍인보다 2배나 높았고 평균임금도 50% 이상 높았다. 하지만 임금의 차별화가 노동 시장의 아랍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었다. 고임금을 받는 만큼 당연히 일자리가 매우 제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시온주의자 기구는 유대인만으로 운영되는 집단농장을 실험해 보았고 성공을 거둡니다. 비록 자본주의적 동기가 약해 많은 인구를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유대인만으로 자립 가능한 식민촌을 탄생시켰다는 상징성은 컸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 국가의 기반을 만들 민족적인 식민화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유대인만을 배타적으로 고용하는 방식은 시온주의자들이 그토록 옹호해 온 아랍인에 대한 식민화의 경제적 수혜를 크게 줄였습니다. 특히 추방당한 농민들에게 임시노동자로서 생계수단을 제공하며 다소나마 불만을 진정시키는 최소한의 해독작용마저도 포기한 셈이었습니다. 자연히 식민화에 대한 아랍인의 불만은 심화되고 고용 문제는 훗날 아랍 문제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발전합니다.
3.3. 언론의 자유가 만든 반시온주의 연대
1908년에 오스만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납니다. 혁명 직후 팔레스타인에는 4개월 만에 15개의 신문이 창간되고, 1914년까지는 총 34개가 만들어집니다. 언론은 시온주의의 정치적 목표를 알리며 반시온주의 여론을 형성하고 식민 활동과 농민들의 피해를 즉각 알려 집단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물꼬를 틔워냈습니다.
정치적 지도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시온주의에 대한 저항을 이끈 것은 언론이었다. 언론인은 대부분 시온주의에 반대했다. 1908-14년 사이에팔레스타인과 인근 지역에서 간행되고 현존하는 신문 22개를 조사한 역사학자 라시드 칼리디(Rashid Khalidi)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사무소에 소속된 [시온주의자] 유대인이 통신원으로 일하는 이집트 신문 하나를 제외한 나머지 21개가 모두 반시온주의 성향이었고 해당 기간에 총 650개 이상의 반시온주의 기사를 작성했다.
시온주의에 대한 반감은 하루가 다르게 커졌다. ... 소규모의 반시온주의 비밀단체도 조직되었다. 이전까지는 폭력 사태가 치안이 불안정하고 인구가 뒤섞여 사는 팔레스타인 북부 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했으나 1911년 하반기부터는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확장되고 해마다 유대인들이 살해당했다. 아랍 언론의 비판적인 태도는 견고해져 갔다. 시온주의자들은 언론에 후원금을 지급해 호의적인 기사를 싣게 하거나 적어도 비판의 수위를 낮추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는 일시적으로만 효과가 있었고 후원이 중단되면 언론은 다시 반시온주의로 돌아섰다.
3.4. 아랍 유대인과 시온주의 문제
아랍인들 사이에서 반시온주의 여론이 강해지자 아랍 유대인들은 화합을 주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은 유대 국가에 '명시적으로' 반대했지만 유럽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이 팔레스타인이나 인접 아랍 지역으로 와서 생명을 부지하고 아랍 문화를 받아들여 조상들의 얼을 되찾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시온주의자들이 위장막으로 내세운 '유대 민족의 고향'이 팔레스타인에서 만들어지기를 바랐고, 그 바람에 시온주의자들에게 이용당했습니다. 아랍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의 목표가 유대 국가가 아니라는 선전대로 나섰고, 반시온주의자를 반유대주의자로 호도하며 비판했습니다. 이들은 훗날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 사회에 재앙을 가져다주는 것을 보고 후회하게 됩니다.
이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미래였다. 아랍 유대인들은 시온주의의 방향을 변화시킬 힘이 전혀 없었다. 누구도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고 수적으로도 미미했다. 시온주의자 기구는 철저히 유럽 유대인들 본위로 돌아갔고 아랍 유대인을 포섭하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이라크에는 1941년에야 처음으로 시온주의 조직이 설립되었고 1%의 유대인만 가입했다. 무엇보다도, 유럽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적인’ 동포를 괄시했다. 1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히바트 시온의 한 회원은 “이스라엘 땅에 있는 (아랍) 유대인들은 어떤 측면에서도 유럽적 정신에 적합하지 않다. ... 그러므로 많은 수의 유럽 유대인들이 (이주해) 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연설했다.
이런 인종 차별적 태도는 시온주의자들의 요청으로 팔레스타인에 온 예멘 유대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잘 드러났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식민촌에서 아랍인 노동자를 대체하기 위해 예멘 유대인을 데려왔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예멘 유대인들이 아랍 임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자연히 시장 원리에 따라 예멘 유대인의 평균임금은 아랍인들보다 높게 형성되었다. 그러자 “아랍 노동자를 제거할 수 있는 희망”으로 기대받던 예멘 유대인들이 유럽 유대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현상이 나타났고 유대 임금의 저하로 이어졌다. 유럽 유대인들은 이제 자신들이 데려온 ‘동포’를 혐오했다.
예멘 유대인들은 식민촌에서 각종 차별에 힘겨워했다. ... 유럽 유대인 감독관은 그들을 “멍청이”, “아랍인 같은 놈”, “미개한”, “개 같은 고임(Goyim, 비유대인들을 비하하는 표현)”이라 부르며 모욕했다. 급여가 적다 보니 구걸도 해야 했고 여성들은 장작으로 쓸 나뭇가지를 주우러 식민촌에 들어오다 걸리면 폭행당했다. 심지어 집단 농장에서는 추방당했다. 아랍 노동자가 없는 ‘청정 식민촌’에서는 예멘 유대인이 아무런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예멘 유대인의 실패 이후 아랍 유대인을 데려와 유대 인구를 늘리려는 시도는 사라지게 됩니다. 시온주의자들이 원하는 건 유대인이 아니라 유럽 유대인의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에는 아랍 유대인의 이주를 대거 받아들이지만, 오늘날까지도 이들은 2등 시민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3.5. 시온주의/아랍 문제의 평화적 해결책?
1차 대전 직전인 1913-14년에 오스만 정부와 비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은 시온주의자들에게 재정 지원을 요청하며 우호 관계를 맺자고 제안을 던집니다.
오스만은 1912년 10월에 발발한 발칸 전쟁으로 유럽 쪽 영토를 거의 모두 잃고 군사력과 재정에 큰 타격을 입어서 자금이 필요했고, 아랍 지도자들은 아랍 지역의 개발을 위한 유럽의 자본과 기술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라시드 리다처럼 이전까지 시온주의에 반대하던 이들도 시온주의의 정치적 위험을 통제한다면 이로운 방향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협상이 성사될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오스만 정부와 아랍 정치인들은 시온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내세우던 목적, 즉 박해받는 유대인의 이주와 지역 경제 발전을 협상 의제로 상정했고 유대인들이 오스만 국민이 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은 유대 국가라는 최종 목표를 진솔하게 밝히거나 포기하지 않은 채 이익만 취하려고 했다.
서구권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의 '비협상 관행' 때문에 분쟁이 생겼다는 강력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이 거짓말이라는 것은 1913-14년의 협상만으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에게 협상은 기만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어떤 시온주의자도, 심지어 협상에 적극적인 시온주의자조차도 유대 국가라는 목표를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협상으로 아랍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기대한 소위 ‘평화적인’ 시온주의자들은 역설적이게도 아랍인을 비뚤어진 눈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루핀은 1908년에 팔레스타인 사무소를 운영하기 시작한 이래로 끊임없이 아랍인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설파해오고 있었다. 1913년에 열린 11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과 평화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는 게 가장 시급한 목표가 되어야 하며 식민촌에서 유대인만을 고용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유대 국가를 꿈꿨고 이를 위해서 아랍인들을 추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07년에는 “당분간은 시온주의의 영토적 목표를 제한해” 이미 토지를 매입한 지역과 그 인근 지역에서부터 먼저 “자치권”을 획득하자고 주장했고 1911년에는 이 지역에서 아랍인을 추방하는 “제한적인 인구 이전”을 제안했다. 심지어 협상 분위기가 무르익던 1914년 5월에조차 “(시리아에 있는) 홈스와 알레포 등지의 땅을 산 후 우리의 토지 매입으로 피해를 본 팔레스타인 농민에게 할부로 파는 걸 계획 중”이었다.
협상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하임 칼바리스키는 회담이 성사되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하며 그 책임이 시온주의자들에게 있다고 비판했다. “회담은 여러 이유로 취소되었으나, 주된 이유는 유대인들이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랍 민족 운동을 경솔하게 대하거나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랍 민족 운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1919년에 “비유대인들이 우리에게 하길 원치 않는 일을 우리가 아랍인들에게 하길 원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이스라엘 땅은 유대 민족의 고향이 되어야 한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자신의 고향을 민족의 땅으로 유지하려는 정치적 욕구와 권리는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
시온주의가 어떠한 정치적 목적도 없고 아랍인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한 운동이라는 일관된 거짓말은 협상이 시작된 이유이면서 동시에 협상이 성사될 수 없는 이유였다. 시온주의자들은 식민 활동에 정치적 의도를 금지하는 협정을 맺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따라서 기만적인 위장정책을 버리고 시온주의의 실체를 실토해야지만 진짜 협상이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시온주의자들은 절대 그러지 않았다. 친이스라엘 사관에 따르면 그들은 아랍 문제를 몰랐거나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는데 왜 진정한 목표를 밝히지 않았을까? 이 책은 그 답을 충분히 알려주었으리라 믿는다.
(키보드가 작동이 잘 안 돼서 인용문으로 많이 때웠습니다;;;)
1905년 이후로 아랍 문제는 시온주의자들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아랍 문제가 '장애물'로서 토론의 장에 올라왔고, 식민촌 주민들이 경험담을 살려 그 심각성을 호소했습니다. 그런데도 사회주의 시온주의자들은 아랍 노동자를 식민촌에서 쫓아내려고 갖은 시도를 다합니다. 자연히 인명 피해는 해마다 커지고, 1908년 이후로는 언론에서 아랍인들의 반대가 가시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수많은 친이스라엘 서적은 단순히 이 모든 증거를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아랍 문제가 없었거나 몰랐다고 역사를 왜곡합니다.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점은 이런 현실 속에서도 '평화'를 운운한 시온주의자들의 태도입니다. 거의 모든 시온주의자들은 시온주의가 아랍인에게 나쁜 게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며 평화를 옹호합니다. 어떻게 이런 자기 세뇌가 가능했던 것일까요? 저는 그 해답을 '평화'라는 단어에서 찾았습니다.
'평화'의 뜻이 뭔지 아시나요? 뭐, 화목하고, 사이 좋고, 그런 상황이나 관계를 생각하셨을 겁니다. 맞습니다. 그런데 평화에는 사전적으로 또 다른 뜻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이 없는 상태'입니다. 이 두 가지 뜻은 유사하면서도 다릅니다. 가령 우리나라는 전자의 의미에서 북한과 평화롭지 못하지만 후자의 의미에서 제한적인 평화(=휴전)를 누리고 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친이스라엘 사관이 주장하는 것처럼 실제로 평화를 추구했습니다. 다만, 그게 전자의 의미가 아니라 후자의 의미였을 뿐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아랍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의사가 없었다. 그들은 칼과 총을 들고 생명을 위협하는 전쟁을 벌이기를 원치 않았을 뿐, 아랍인들이 저항을 포기하고 시온주의 깃발 아래 항복하는 ‘평화’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1882년에 첫 식민촌을 만들 때부터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비밀리에 점진적으로 식민화를 해서 유대 인구를 다수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1891년에 아랍인들의 저항을 처음으로 경계한 하암도, 그를 비판한 우씨쉬킨도, 그 밖의 다른 시온주의자도 아랍인과의 관계가 도마 위에 오를 때마다 식민화를 계속해 유대 인구가 다수가 되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앞서 스밀란스키가 유대인들이 강해진 다음에야 ‘평화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한 것 역시 같은 이유에서다. 주권을 얻기 전에 식민화를 하면 토착민의 저항을 야기한다고 반대한 헤르쯜과 그의 지지자들도 전쟁 없는 정복을 계획했지 아랍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지는 않았다. 그들은 토착민에게 유대 국가를 세운다는 계획을 알리거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술탄과의 ‘뒷거래’로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얻으려고 했다. ...
시온주의자들이 말하는 ‘평화’는 결코 아랍인들에게 평화가 될 수 없었다.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터전에 이민족의 국가를 건설하는 시온주의를 받아들이려면 정치적 의식이나 민족의식이 없고, 토지에 대한 애착도 없고, 유대인에 동화되는 것에 거부감도 없어야만 했다.
이제 이해가 가시나요? 어째서 친이스라엘계가 시온주의자들을 평화적이라고 옹호하는지요? 작금의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평화적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억압하고 자원을 약탈해서 전쟁이 없는 상태를 만들어왔으니까요. 다만, 팔레스타인인들이 그런 '평화'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이지요. 우리는 어떤 '평화'를 추구하고 누구를 비판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