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1917년에 영국은 시온주의자들에게 '민족의 고향'을 약속합니다. 당시 서한을 보낸 외교부장관의 이름을 따서 밸포어 선언이라고 부르며, 많은 학자들이 이를 분쟁의 시작점으로 봅니다. 밸포어 선언은 워낙 유명해서 우리나라에도 아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문제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백에 하나가 될까 말까 하다는 거죠. 대표적인 오류는 다음과 같습니다.
영국은 '유대 국가'를 약속했다.
유대인들로부터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1차 대전에서 미국의 참전을 위해서였다.
로이드 조지 수상과 밸포어 외교부장관이 종교적 이유로 약속한 것이다.
방송은 물론이고 대학교재에서도 저런 내용을 보셨을 텐데요, 1, 2번은 완전히 틀린 내용이고, 3, 4번은 부정확합니다. 밸포어 선언 과정에서 3, 4번은 부차적 요인이었고, 선언 발표 전에 이미 미국은 참전했습니다. 이 모든 건 학자들이 영국 문서를 연구한 1970년대 이전에 세간에 떠돌던 속설과 거짓주장인데 오늘날까지도 우리나라 방송과 대학교 강의실을 점령하고 있습니다. 참.... 안타깝지 않습니까? 에휴...
4장 1절은 1차 대전과 그 직후인 1919년까지를 다루며 밸포어 선언이 등장합니다만, 어디까지나 조연으로서만 다룹니다. 왜냐하면 밸포어 선언이 주목받는 것은 1차 대전 이후, 특히 1920년부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제1절의 주제는 무엇일까요? 그건 바로 '아랍의 독립'입니다. 영국은 1차 대전에서 자국 식민지의 무슬림들이 동요하는 것을 우려해 메카의 지도자 후세인에게 반란을 종용하는데, 그 과정과 내용, 특히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었는지, 그리고 1차 대전 후 독립의 꿈이 어떻게 좌절되는지를 살펴봅니다.
영국이 후세인에게 아랍 지역의 독립을 약속했을 때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었는지 여부는 오늘날까지도 논쟁 중입니다. 학부시절에 읽은 국내 서적들은 한결같이 영국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다고 짤막하게 기술하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게 국제적으로는 그렇지 않더군요. 오히려 대다수의 서구 학자들은 독립이 약속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학자들이야 뭐 이걸 제대로 공부한 사람도 없고 분석한 책을 내놓은 적도 없으니 솔직히 서구 학자들이 맞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제가 직접 서신과 관련 영국 문서들을 다 읽어보니 절대 동의할 수가 없더군요. 아무리 눈을 씻고 읽고 곱씹어봐도 팔레스타인의 독립은 약속된 게 맞았습니다. 3년 차에 두 달 정도 연구하고 그런 결론을 내렸고. 이후 3년에 걸쳐 틈틈이 제 분석이 맞는지 비판적 검토를 반복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분석이 맞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1개월을 더 투자해서 책에다가 분석을 적었습니다.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마 어렵다고 느끼셨을 겁니다. 죄송하지만, 분량 때문에 너무 압축적으로 적어서 그렇습니다. 지금 이걸로 해외 팔레스타인 전문 저널에 실으려고 영어논문을 작성 중인데 A4용지로 20페이지가 나왔습니다. 책에 적은 분량의 3-4배쯤 됩니다.
1절에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핵심 사안은 1919년의 미국의 '킹-크레인 위원회'입니다. 국내에선 이름조차 찾아볼 수 없고 해외 유수 학자들의 팔레스타인 서적에서도 간결하게 언급되고 넘어갑니다만, 분쟁의 원인과 책임 논쟁에 있어서 매우 매우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친이스라엘사관은 아랍인들이 유대인의 식민화를 반겼고, 극소수의 민족주의자들만이 시온주의에 반대했다고 기술합니다. 그런데 킹-크레인 위원회는 아랍인들이 얼마나 독립을 원하고 시온주의에 반대하는지를 '수량화'해서 보여줍니다. 또한, 아랍인들이 영국이나 프랑스의 위임통치에 반대했다는 사실도 보여주기 때문에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가 '강제통치'였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 시기는 학술적으로 위임통치기라고 부르기 때문에 저 역시도 책에서는 그렇게 적었지만, 우리가 일본통치기라고 부르지 않고 일제강점기라고 부르는 걸 생각하면, 영국강점기라고 명명하는 게 올바릅니다.
상기 내용 염두에 두고 본문 분석에 들어갑시다.
1.1. 아랍의 독립을 약속한 영국
1차 대전 이전까지 절대다수의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법. 이슬람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히자즈 지역의 아랍인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과거에는 메카의 지도자인 샤리프가 대대로 자치권을 행사해 왔는데, 정부가 이를 깨트리고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고 오스만이 독일 편에 설 것으로 예상되자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 인도와 수단의 무슬림들이 동요할 것을 우려했습니다. 오스만은 무슬림 국가들의 수장 격인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에게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약속하고 반란을 부추깁니다. 결과적으로, 후세인은 반란을 일으키지만 히자즈가 아닌 아랍 지역 전체의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아랍 민족의 독립 국가를 만들자는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의 제안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영국은 아라비아반도 너머로는 독립을 인정할 생각이 없었다. 2개월쯤 전인 1915년 3월에 러시아가 오스만의 수도인 이스탄불과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의 영토를 병합할 의사를 밝히자 프랑스와 영국은 이를 인정하는 대가로 오스만의 다른 영토에서 각자의 몫을 취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기로 합의했는데, 아랍 지역이 여기에 속했다. 프랑스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대시리아 지역에서의 권리를 요구했고 이는 이미 1912년 12월부터 고수해 온 입장이었다. 영국은 ... 아라비아반도에서는 무슬림의 독립을 인정하자고 양국에 제안했다. 이후 영국은 자신의 몫으로 요구할 아랍 영토를 정하기 위해 여러 부처의 고위 관료를 소집한 분센 위원회를 열었다. 위원회는 유전 지대인 페르시아만의 확보를 위한 이라크와, 유사시에 본국에서 이라크로 증원군을 파병하는 통로가 될 팔레스타인을 선택했다. ...
후세인은 1915년 7월 14일에 아랍 민족의 독립을 지원해 달라는 서신을 [영국의 이집트 고등판무관] 맥마흔에게 보냈고 양자는 이듬해 3월까지 총 10건의 서신을 주고받는다. 이를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이라 부른다.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독립이 인정되는 영토의 범위였다. 후세인은 다마스쿠스 의정서의 경계[즉, 아랍 전 지역]를 그대로 제시했고 영국은 일부 지역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양측은 이 문제를 전후에 협의하기로 유보하였다. 이때 팔레스타인이 독립이 유보된 지역에 속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반세기가 훨씬 넘게 학자들 간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을 여기서 다루기에는 지면이 부족합니다. 자세한 건 책을 보시고 두 가지만 기억합시다. 하나는, 팔레스타인의 독립이 약속되었음을 증명할 수 있고, 전쟁이 끝난 직후 영국 외교부가 만든 보고서에서도 팔레스타인은 아랍 독립 지역이라고 명시적으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후세인은 메르시나를 제외한 다른 어떤 아랍 지역도 포기한 적이 없고, 영국이 독립을 거부한 일부 지역은 전쟁 후에 지위를 협상하기로 합의했다는 것입니다. 즉, 팔레스타인이 독립 지역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반드시 재협상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영국은 강제적으로 점령하고 통치합니다.
1.2. 영국의 배신과 기만
맥마흔이 외교부장관의 재가를 받아 아랍의 독립을 약속하는 서한을 발송했을 때는 협상이 진실했습니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났습니다. 영국 내부에서 아랍인들에게 너무 많은 땅을 '양보'했다는 비판이 나오고 프랑스도 아랍의 독립에 반대했습니다. 외교부는 이를 진정시키지 못하고 프랑스와 아랍 지역의 미래를 다시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 결과, 아라비아 반도는 독립을 시켜주되, 이라크에서 트랜스요르단-팔레스타인 남부로 이르는 지역은 영국이, 나머지 시리아와 레바논 등은 프랑스가 통치하기로 합니다. 이게 '사이크스-피코 협정'입니다.
지도에서 눈여겨봐야 하는 것은 좌측에 있는 팔레스타인의 북부지역입니다. 프랑스와 영국 모두 이곳을 원했기 때문에 특별히 국제관리지역으로 구획되었습니다. 영국은 이게 못마땅했습니다. 중동정책의 핵심은 유전지대인 이라크와, 유사시에 이곳으로 군대를 파견할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나 다른 유럽 국가들이 팔레스타인에 영향력을 행사하면 연결망이 끊어질 우려가 있었습니다. 영국은 협약을 맺은 뒤로도 어떻게 하면 프랑스를 팔레스타인에서 쫓아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시온주의자를 끌어들이기로 합니다.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영국은 더 많은 아랍 영토를 전리품으로 얻을 수 있게 되었지만 만족하지는 않았다. 팔레스타인의 일부가 열강의 영향력 하에 놓였기 때문이다. 일부 관료들은 1916년 1월에 협정 내용을 전해 듣자마자 시온주의자들을 떠올렸다. 시온주의자들이 팔레스타인을 얻도록 돕는 대신 영국의 보호를 원한다고 선언하게 하면 프랑스를 떨쳐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나아가 친시온주의 정책이 전 세계 유대인의 지지를 얻고 미국의 참전까지 끌어낼 수 있다는 과장된 기대가 형성되었다.
이전에도 유사한 계획이 고안된 적이 있었다. 1914년 11월에 오스만이 참전한 직후부터 유대인 각료 허버트 사무엘은 동료들에게 시온주의 정책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이듬해 1월에는 팔레스타인을 병합해 유대 인구를 다수로 늘리고 장차 자치권을 부여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이때 국익으로 제시한 것 중 하나가 미국을 포함한 세계 유대 공동체의 지지였다. 사무엘은 유대인들 중에 시온주의자보다 비시온주의자가 더 많지만 그들도 이를 환영할 것으로 전망했다. 두 달 뒤에는 팔레스타인을 보호령으로 만들고 시온주의를 후원하는 계획을 공식적으로 내각에 제출했으나 공감받지 못하고 사장되었다. 그런데 1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서야 프랑스를 떨쳐낼 획기적인 방법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다.
여기서 잠시, 허버트 사무엘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당시 영국에는 사무엘을 포함해 3명의 유대인 최고위 각료가 있었습니다. 사무엘과 달리 나머지 둘은 시온주의에 적극 반대와 중립이었습니다. 유대인 사이에서도 이런 반응이니 1915년에 내각이 사무엘의 제안을 거부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러나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을 얻어낼 수단이 될 수 있다고 평가되자 사무엘은 지지를 얻고, 1920년에 팔레스타인의 최고통치자인 초대 고등판무관으로 발령받게 됩니다.
1917년에 영국은 팔레스타인으로의 진격을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밸포어 선언문을 준비합니다.
선언문은 유대 공동체 내부의 반목과 각료들의 의견 차이로 10번의 초안을 거쳐 신중하게 작성되었다. 가장 먼저 초안을 작성해 방향성을 선점하려 한 것은 18세기 중반에 설립된 이래 영국의 유대 공동체를 대변하는 기관으로 자칭해 온 영국유대인 대표위원회였다. 대표위는 동화를 지향하고 시온주의자들의 정치적 야망에 반대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다른 인구와 평등한 정치적 권리”를 향유한다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반면,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을 일절 거론하지 않은 채 “팔레스타인을 유대 민족의 고향으로 인정하고 유대 민족이 민족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했다. 이번 기회에 유대 국가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자는 주장도 나왔으나 영국이 들어줄 리가 없다는 이유로 지도부가 기각했다. 대신 이주와 경제개발을 담당할 “유대 민족의 식민 회사에 자치권을 부여”해 민족의 고향이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확보하려고 했다. 또한, 이런 “자치권의 조건과 형식”은 “시온주의자 기구의 대표”와 함께 “결정”해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는데, 유대 공동체의 대표로서 인정받으려는 목적에서였다. ...
1917년 11월 2일에 밸포어 외교부장관은 시온주의자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서신을 보내 “유대 시온주의자들의 열망에 동의하는 다음의 선언문”을 알린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작점으로 손꼽히는 밸포어 선언이다.
"영국 정부는 유대 민족을 위한 민족의 고향을 팔레스타인에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비유대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가 침해받거나 혹은 다른 지역의 유대인들이 향유하는 권리와 정치적 지위에 피해를 끼치는 일은 없도록 할 것이다."
밸포어 선언에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유대 국가가 아니라 '민족의 고향'인 점, 둘째 팔레스타인에서 살고 있는 비유대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침해하지 않기로 약속했다는 점, 셋째, 이러한 약속에 정치적 권리는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밸포어 선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이 ‘민족의 고향’으로 무엇을 의도했는지를 아는 게 중요하다. 1922년에 영국은 민족의 고향과 유대 국가는 다르고, 유대 국가를 만들 의도는 없다고 천명했다. 하지만 선언문을 작성할 당시 내각회의에서 밸포어는 “유대인들이 스스로를 구원하고 교육과 농업, 산업을 발달시켜 민족 문화와 민족적 삶의 중심지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는” 체제가 민족의 고향이며, “이는 처음부터 독립 유대 국가의 건설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고” “영국이나 미국 또는 다른 국가의 보호령의 형태”로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발전할 문제”라고 말했다. ...
즉, 민족의 고향은 유대 국가가 아니지만, 그러한 발전을 가능토록 하는 교두보 단계였다. ‘비유대 공동체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는 보호하지만 ‘정치적 권리’는 생략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다만, 이러한 생각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친시온주의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고 있었다. 정부의 공식적인 정책은 물론이고 다수의 관료들은 영국이 유대 국가를 약속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고 그러한 국가가 국익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지도 않았다.
영국이 밸포어 선언을 발표하기 하루 전날, 러시아에서 레닌이 2차 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후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폭로합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영국군과 함께 열심히 싸우던 아랍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영국은 정보를 차단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집트를 시작으로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고 후세인으로부터 설명을 요구하는 항의가 들어왔다. 영국은 어떻게 해서든 아랍권의 동요를 막아야만 했다. 1918년 1월에 데이비드 호가스 중령이 사절로 선택되어 후세인을 찾아갔다. 호가스에게 하달된 지시문은 연합국이 아랍인들에게 민족국가를 만들 완전한 자유를 주기로 결정했고, 팔레스타인에서는 “현재 인구의 경제적, 정치적 자유 둘 모두와 양립하는 선에서만” 유대인의 이주가 이루어진다고 명시했다. 즉, 밸포어 선언과는 달리 아랍인들의 ‘정치적 자유’를 명시해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재차 인정한 것이다. ...
시온주의자들도 영국과 협의 하에 아랍인을 회유하는 데 힘을 보태기로 했다. 3월에 바이츠만을 수장으로 한 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 위원회가 새로이 조직되고 이듬달부터 팔레스타인과 인근 아랍 지역을 돌아다니며 시온주의를 비정치적 운동으로 위장하며 지지를 구했다. 6월에는 [아랍 독립군을 이끄는] 파이잘을 찾아가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을 개발시키기만을 원할 뿐 유대 정부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안심시켰다.
그 뒤로도 영국은 정복지에서 피치자의 동의에 입각한 정부를 구성한다는 등 팔레스타인과 아랍 지역의 독립을 약속한 게 맞다는 성명을 계속해서 내놓습니다. 그런데도 전쟁이 끝나면 돌변합니다.
1.3. 짓밟힌 독립의 열망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주도로 열강은 국제연맹을 조직합니다. 오늘날 유엔의 전신에 해당하는 국제기구입니다. 국제연맹은 패전국의 영토를 열강이 통치하도록 하되, 주민들의 의사에 따라 해당 국가를 선정하고 장차 독립을 할 수 있도록 발전시키기로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지역의 통치권을 놓고 다퉜고, 미국은 둘을 달래며 주민들의 의사를 확인하는 조사단을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영, 프가 이를 거절하자 미국은 단독으로 '킹-크레인 위원회'를 파견합니다.
1차 대전은 아랍인들의 정치의식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전쟁으로 많은 주민이 생명과 생계를 잃고, 터전은 황폐화되었다. 전쟁이 한 해 한 해 길어질수록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고 수백 년을 이어 온 충성심은 옅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오스만을 옹호하는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후세인의 독립 민족 국가의 기치는 이제 아랍 민족의 열망이 되었다.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 역시 한 마음이었다. 영국군과 아랍 독립군이 처음 팔레스타인에 발을 디디며 이 땅에 자유를 주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소개했을 때까지만 해도 주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그러나 밸포어 선언에 적극적으로 대항해야 한다는 위협 인식이 커지고, 아랍 독립군이 다마스쿠스에 입성해 아랍 정부를 세우는 것을 보며 독립 국가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킹-크레인 위원회는 ... 6월 10일에 [팔레스타인의] 야파에 상륙했고, 이튿날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아랍인들은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선 좋든 싫든 독립을 할 수 있을 만큼 ‘문명화’되었다는 것을 서구 사회에 증명해야 하는 상황이란 걸 너무나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위원회가 도착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찾아와 청원했다. 무슬림-기독교도 협회는 각지에 사람을 보내 시온주의에 대한 반대와 시리아의 독립 등을 담은 청원서에 서명을 받아서 제출했다. 청원은 날이 갈수록 늘어났고, 단 2주 만에 260건이 접수되어 위원회를 놀라게 만들었다. ... [이후 시리아 등 다른 지역에서] 42일간 구두나 문서로 접수된 청원은 모두 1,863건이었고 91,079명이 배서했다.
위원회에 따르면, 아랍인들은 위임통치제도에 반대하고 독립을 요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연맹이 위임통치제도를 강제한다면, 식민 지배가 아닌 기술지원을 해주는 국가로서 미국을 요청했습니다.
청원에는 그 밖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고,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합치된 의견은 반시온주의였습니다. 26,324명이 배서한 260개의 청원 중 222건(85.3%)이 시온주의를 거부했고, 여기서 유대인의 청원을 제외하면 전체 청원 중 무려 90% 이상이 반대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위원회는 반시온주의는 무슬림과 기독교 두 집단 모두에서 “널리 퍼진 일반적인 의견”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반면, 시온주의에 대한 유대 공동체의 지지는 매우 낮았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시온주의 계획에 무관심하거나 적어도 적극적으로 찬성하지는 않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시온주의 계획을 요구한 7건의 청원은 팔레스타인에서 접수된 전체 청원의 2.7%로 유대 인구비(10.0%)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청원마다 배서한 인원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아랍인들은 100건이 훨씬 넘게 문서 청원까지 해가며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현한 것과는 크게 대비된다. 이는 팔레스타인 밖에서 더욱 뚜렷이 관찰된다. 비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접수된 청원은 1,603건이고 유대인들의 인구비는 1.7% 이지만 시온주의 계획을 옹호한 청원은 단 4건(0.25%)밖에 없다. ...
시온주의에 대한 위원회의 의견은 매우 부정적이었다. 위원회는 “시온주의에 우호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조사를 시작”했지만,“유대인 청원단과의 회의에서 시온주의자들이 현존하는 팔레스타인의 비유대 토착민의 토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매입해 사실상 완전히 추방하길 바란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확인”하고는 충격을 받았다. 밸포어 선언에서 약속된 민족의 고향은 유대 국가가 아니고, 그런 국가가 비유대 인구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지 않고 달성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위원회는 “유대인들이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을 정복했다는 점을 근거로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고려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아랍인들이 독립을 원했고, 시온주의에 반대했고, 또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통치에 반대했다는 사실을 밝혀낸 킹-크레인 위원회는 아랍 지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요? 정답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입니다. 미국은 조사 보고서를 발표하지 않고 덮어버립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탐욕을 막을 생각이 없었고, 그렇다고 피치자의 동의에 의거해 위임통치국가를 선정한다는 규칙을 어긴다는 사실을 공표하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다 보니 킹-크레인 위원회를 짤막하게 다뤄서 많이 아쉽습니다. 나중에 책에서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세요. 데이터가 명확히 있는 거다 보니까 독자적으로 심층 분석까지 해서 적었는데, 아마도 세계 최초가 아닐까 합니다. 나중에 이것도 정리해서 소논문 같은 걸로 낼까 싶습니다.
전 역사 연구하면서 이런 위원회의 보고서를 읽는 게 제일 흥미롭더군요. 그 시대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거고, 또 오늘날 세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진실을 보여주니까 역사가 어떤 식으로 왜곡되는지, 그게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보면서 한편으로는 소름 끼치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이 이래서 배워야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 시대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참으로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단순히 '영국이 아랍인과 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이중으로 약속해서 분쟁이 생겼다'와 같은 함축적인 글귀는 아랍인들의 원통함의 10%도 담아내지 못합니다. 분명히 독립을 문서로 약속해 놓고, 이에 위배되는 비밀협약을 맺고, 그게 들통나자 다시 독립을 약속한 게 맞다고 수차례 공식적으로 발표하고, 모병 전단지까지 뿌려놓고, 전쟁 끝나니 돌변하고... 그 뒤로도 계속해서 겉으로는 '피치자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거창한 명분을 내걸면서 실제로는 의사를 죄다 무시하고 강제통치하고.... 연구자로서 이런 걸 하나하나 읽고 있으면 제 가슴에도 울분이 쌓이는 걸 실시간으로 느낍니다.
이러한 사실은 오늘날 전쟁을 이해하는 데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마스 대원들이 어떤 심정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했는지를 가늠하기 어렵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독립 열사들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삶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에겐 딴 세상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이들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식민주의와 싸워온 150년의 역사를 배워야 합니다. 반지의 제왕이 '반지 파괴하는 이야기야'라는 한 줄로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의 삶도 '유대인들이 땅 뺏으려 드는 거 막다가 졌고, 그래서 지금도 싸우는 거야'라는 식으로 요약될 수 없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 자명한 진리조차 알지 못해서 그저 '그냥 짧게 써. 뭐가 이렇게 길어'라고 불평하지만, 한 세기 넘게 수 억명이 연관돼서 다퉈 온 분쟁의 역사가 어떻게 간결할 수가 있겠습니까. 현실을 자신의 수준으로 낮춰서 이해하려 들지 말고, 현실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의 그릇을 키우도록 노력합시다. 뭐, 이 글을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에게는 별로 필요없는 말이겠지만요.
추가 : 참. '독서가이드(해제)'에서는 제가 아직 알리지 않았더군요.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이 작년에 우리 정부 출판문화진흥원이 선정한 '우수출판콘텐츠'의 영광을 누린 데 이어 올해는 대한출판문화협회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가장 지혜로운 책'으로 뽑혔습니다. 2관왕은 정말로 드문 영예입니다. 그만큼 가치 있는 글이니 앞으로도 브런치에서 끝까지 함께하실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 결론까지 7편 남았습니다.
추가 : 431쪽 후세인-맥마흔 서신 협상 부분에 중의적으로 읽히는 잘못된 부분이 있어 정정합니다. 관련 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