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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Apr 24. 2024

해제| 4장 2절 - 외로운 투쟁의 시작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지난주에 4장 1절에서는 1차 대전 중에 영국이 아랍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배신한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2절에서는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강제로 통치한 직후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를 다룹니다.


1917-18년에 영국의 강제점령이 시작되기 이전까지 시온주의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그야말로 온건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언론으로 시온주의를 규탄하고 이주와 토지 매매 규제를 정부에 청원한 게 거의 전부였습니다. 일부 추방당한 소작농을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유대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으나 30여 년 간을 다 합쳐도 수십 건에 그칩니다. 식민화를 당한 다른 나라 다른 지역에서는 대규모 무장투쟁과 봉기가 발발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이를 두고 친이스라엘 사관은 대다수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식민화에 찬성하고 환영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물리적 저항이 없었다는 게 정말로 식민화를 찬성한 근거로 볼 수 있는 것일까요? 서구 학자들이 예로 드는 사례들은 모두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점령한 곳들입니다. 즉, 주권의 박탈이 현실화된 경우입니다. 반면, 팔레스타인은 그동안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았기 때문에 주민들에게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정부가 열강의 눈치를 보느라 미적거리지만, 시온주의의 위협이 커지면 반드시 불법이주민들을 모조리 쫓아버릴 거라고. 그런데 오스만이 무너지고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게 되자 그제야 주민들이 정신을 차립니다. 1920년에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부가 밸포어 선언을 실행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자 소요가 발생해 대규모 유혈사태가 일어납니다.


아랍인들은 국가를 잃어버렸고,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을 위시한 유럽 국가들을 등에 업었다. 바야흐로 위협이 실체를 갖게 된 것이다. 이제는 유럽의 침략으로부터 고향을 지키기 위해 반드시 행동을 취해야만 할 때였다.



2.1. 첫 번째 대규모 소요


첫 번째 소요는 나비 무사 소요라고 불립니다. 우선 용어부터 점검하지요. '소요'라는 말이 생소하신 분들이 있으실 텐데요, 이는 영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용한 영어단어 disturbance를 제가 번역한 것으로, 안정되고 평화롭던 상태가 깨짐을 의미합니다. disturbance의 대표적인 예가 민중의 폭동(riot)이며, 많은 학자들, 특히 친이스라엘 학자들이 disturbance 대신 riot을 즐겨 사용합니다. 아시다시피 riot이나 폭동은 부정적인 의미가 강합니다. 그래서 저는 disturbance의 번역어로 소요를 선택했고,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여러 사람이 모여 폭행이나 협박 또는 파괴 행위를 함으로써 공공질서를 문란하게 함. 또는 그런 행위"를 의미합니다.


그럼 '나비 무사' 소요는 뭘까요? 나비 무사 축제에서 발생한 소요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는데요, 나비 무사는 아랍어로 예언자 모세를 의미합니다. 네, 성경에 나오는 바로 그 모세입니다. 이슬람은 성경을 무함마드 시대 이전의 선지자들이 남긴 기록으로 존중하고 대부분의 유대교/기독교 성인을 추앙합니다. 다만 성경의 내용온전히 전하지 못하였다고 믿으며, 이를 바로잡은 무함마드가 받은 신의 계시를 기록한 꾸란이라고 가르칩니다.


성경에서 모세는 팔레스타인으로 들어오기 전에 죽었지만, 꾸란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에서 사망했습니다. 우리 시대의 역사학자들과 고고학자들은 성경의 출애굽 자체가 사실이 아니고 모세가 실존 인물도 아니라고 보기 때문에 어느 게 옳다 그르다를 논하는 건 무의미하지만, 여하튼 후대의 이슬람 전승에 따르면 모세는 여리고 인근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래서 매년 4월경에 열리는 나비 무사 축제에 무슬림들은 여리고로 가서 모세의 묘지를 참배한 후 예루살렘에서 다 같이 모여서 축제를 즐깁니다.


나비 무사 축제의 유래는 흥미롭습니다. 이 축제는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점령한 이후에 처음 시작된 것으로 확인되는데, 학자들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견제하기 위해 만든 이슬람 축제라고 봅니다. 4월경에 유대교는 유월절, 기독교는 부활절 축제가 있습니다. 세 종교가 어울려 사는 예루살렘에서 무슬림들은 다른 두 종교의 축제에 끼어서 같이 어울려 놀고 하다 보니 개종의 유혹을 느끼곤 했나 봅니다. 그래서 오스만 제국이 뒤늦게 무슬림들에게도 4월에 즐길거리를 만들어준 거지요.


취지만 보면 나비 무사 축제는 종교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입니다. 무슬림들이 다른 두 종교의 축제에 어울려 논 것처럼, 기독교도와 유대인들도 나비 무사 축제에 함께 어울렸습니다. 특히,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중요한 인물이다 보니 무덤에서 참배하고 돌아오는 무슬림을 위해 노래공연도 하고 그랬답니다. 모세가 팔레스타인에서 죽었는지, 무덤의 위치가 어디인지 같은 걸로 시비를 다투지 않았던 거지요.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을 참 보고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튼, 그래서 나비 무사 축제는 무슬림-유대인 간의 친목을 돈돈히 하는 기간입니다. 그런데 영국이 유대 민족의 고향을 세우겠다고 하자 긴장이 커집니다. 축제 전부터 유혈사태가 일어날 거라는 우려가 제기되었습니다.


지난해에 무슬림 지도자들은 축제로 모인 군중에게 독립과 반시온주의의 중요성을 연설하며 정치적 교육의 장을 만들었다. 유대인들은 올해에 유혈 사태까지 일어날 것으로 우려했다. 벤구리온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대 공동체는 처음으로 아랍인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해 유대인들은 땅을 개발하고 이웃과 평화롭게 살 목적으로 이주해오고 있으며 이를 막을 수는 없으니 유대인들이 일궈낼 경제적 이익을 함께 누리자고 말했다. 자보틴스키는 퇴역 군인과 청년들을 모아 지하군사조직인 ‘하가나(Haganah, 방어)’를 결성했다. 3월 말에는 그 수가 5-600명으로 늘어났고 감람산에서 공개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예루살렘 거리를 행진했다. 많은 시온주의자들은 여전히 ‘아랍인들은 강한 자만을 존중한다.’는 오리엔탈리즘에 빠져 있었고 이런 도발적인 행동이 아랍인들의 폭력을 예방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축제 셋째 날, 무슬림 군중이 예루살렘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중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깁니다. 유대인이 무슬림을 밀쳐 넘어뜨린 후 침을 뱉었다거나, 일단의 유대인 무리가 아랍인을 공격했다는 등 확실치는 않지만 무언가 긴장을 일으킨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아랍인들은 (어쩌면 군중 속에 있었을 선동가의 영향으로) 갑자기 흥분해서 유대인을 공격하고 유대인 상점돌을 던지는 등 폭동을 일으킵니다.


군사정부는 즉시 군대를 투입해 질서를 확보했다. 사태는 이내 잦아든 것처럼 보였고, 이튿날 새벽에 1개 소대만 남기고 시내 중심지에서 군을 철수시켰다. 그러나 날이 밝자 아랍인들은 또다시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다. 군사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군이 통제하는 중에도 소요는 며칠간 더 이어져 일주일을 꼬박 채운 뒤에야 완전히 진정되었다.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은 많은 아랍인들이 유대인 이웃을 지켜주려고 나섰으나, 이 기간 동안 아랍인들에 의해 총 3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고 209명이 다쳤고, 2명이 강간당했다. 사상자의 대부분은 노인과 여성, 어린이들이었다. 그 밖에도 인도인 경찰을 아랍인으로 오인하고 총을 쏜 유대인 2명이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한편, 아랍인들은 4명의 사망자와 26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집계되었으나, 치료를 받지 않고 경찰을 피해 달아나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경미한 부상자들도 많았다. 유대인들의 반격은 거의 없었다.


소요가 정리된 후 영국은 팔린 위원회를 조직해 소요의 원인을 분석합니다.


위원회는 아랍인과 유대인 간의 인종적 반감이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형성된 것이 아니라 최근에 갑작스럽게 만들어졌다고 지적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무슬림, 기독교도, 유대교도 세 종파는 완벽한 우호 관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1840년의 이브라힘 파샤의 시기 이후로 유대 인구에 대한 어떤 심각한 공격도 없었다.” 그런 오랜 평화를 깨트린 것은 사실상 영국 정부였다. 세계대전 중에 아랍인들은 오스만과 싸우는 조건으로 영국으로부터 일부 지역의 독립을 약속을 받았다. 이때 팔레스타인은 독립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독립을 약속받은 것으로 ‘오해’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은 오스만에 대한 애정을 버리고 영국군과 함께 싸웠고, 영국이 “전쟁 중에 모든 종류의 선전을 이용해 이를 부추긴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발표한 밸포어 선언은 “모든 문제의 시작점”이 되었다.


팔린 위원회는 아랍인들이 어떻게 해서 시온주의자들에게 반감을 가지게 되는가를 정치와 경제 영역에서 설명합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시온주의자들이 런던의 외교부에 영향력을 행사해 팔레스타인 임시 군사정부의 종교 간 균형 잡힌 통치를 방해한 점입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할 군사정부는 시온주의자들에게 휘둘려 상황을 악화시켰다. 인구의 90%를 차지하는 토착민은 어떠한 대표기구도 인정받지 못한 반면, 영국 정부로부터 공식기구로 인정받은 시온주의자 위원회는 모든 부처의 업무에 간섭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리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군사정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는 외교부를 통해 원하는 바를 얻어냈다.


그 결과로, 유대인들은 순수 상업거래에서조차 정부의 도움을 받고, 공개적으로 군사훈련을 하고 독자적인 우편과 공중보건 체계를 운용하고, 시온주의자 위원회가 선별한 후보만을 경찰로 채용해 당국의 기밀자료를 넘기는 첩보원으로 전락하는 걸 방치하고, 히브리어가 아랍어와 영어와 함께 공용어로 지정되고, 상당한 수의 불법 이주자가 유입되는 등의 일이 일어났다. 군사정부가 소요에 대한 책임으로 예루살렘 시장인 무사 카짐 후세이니를 해임시키기로 결정했을 때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예루살렘 유대 의회 수장이 해임장을 보내버렸다. 그러므로 아랍인들이 군사정부의 편향적 조치에 대해 불평하고, 밸포어 선언에서 토착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도록 하겠다고 보장한 문구는 이미 “사문화”되었다고 간주하는 건 당연했다.


팔레스타인 군사정부는 열강이 팔레스타인의 통치방식을 결정할 때까지 "현상유지" 원칙을 부여받은 임시기구였습니다. 그래서 오스만 시기의 질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는데 시온주의자들은 이에 반대하며 당장 유대인의 이주를 대규모로 늘리고 토지 매입 규제를 없애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렇다고 시온주의자들이 언제나 현상유지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 싶으면 쉽사리 태세를 전환했다. 위원회는 농업융자 제도를 예시로 들었다. 오스만 시기에 농민들은 파종기에 대출하여 수확기에 갚는 농업융자를 널리 이용했다. 군사정부가 이를 부활시키자 농민들은 만족했는데 시온주의자들이 반대하고 나섰다. 자신들이 운영하는 앵글로-팔레스타인 은행에서 융자를 받지 않았다는 점과, 농민들이 경작하면 토지 가치가 오르기 때문에 현상유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였다. 시온주의자들은 외교부를 움직여 기어코 신규 융자를 막아버리고야 말았다. 이를 본 아랍인들은 토지를 팔게 만들기 위해 농민을 빈곤에 빠트린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농업융자는 많은 빈곤한 농민들의 버팀줄이 되는 제도였습니다. 오스만은 그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재정이 파탄난 상황에서도 추가세금을 거두면서까지 이를 운용했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이 시기에 잠시 도입했다가 몇 년 안 가 완전히 중단시킵니다. 공식적으로는 농민들이 너무 가난해서 빚을 못 갚아서라고는 하는데, 실질적으로는 시온주의자들의 반대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영국이 농민을 지원할 생각이 있었다면 오스만처럼 추가 세금을 거둬서 제도를 운영했을 겁니다.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파종기에 씨를 돈이 없어서 연이율 30%의 사채를 쓰게 되고 10여 년 만에 빛더미에 오르게 됩니다. 아랍인들의 경제적 부흥을 위해, 그리고 평화로운 이웃으로 이주해 온다는 시온주의자들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그리고 왜 아랍인들이 분개하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이상의 분석을 토대로 위원회는 시온주의자들의 책임을 크게 물었다. 그들은 인내심 없이 당장 목표를 이루려고 도덕적으로 무분별하게 행동하고 당국을 입맛에 맞게 조종하려 들다 아랍인과의 갈등을 크게 키워서 현재의 위기를 만들어냈다. 군사정부는 소요 이전까지는 상황을 잘 통제해 왔으나 소요에 대한 대처는 미흡한 점들이 있었고, 외교부는 군사정부에 간섭해 정책을 방해한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아랍인에게는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았다. “토착민들은 (독립의) 소망이 좌절돼 낙담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공황에 빠지고, 시온주의자들의 호전적인 태도로 인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반감이) 악화되고, 당국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엔 시온주의자 기구 앞에 무력해 보여 절망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소요가 그저 선동에 의한 것이라는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은 사실을 곡해하는 것이고 “팔레스타인의 현재 상황은 극도로 위험”하다는 경고로 보고서를 끝마쳤다.


팔린 위원회가 보고서를 제출하자 영국은 시온주의자들에게 공람한 뒤 비밀에 부치기로 합의합니다. 또한, 위원회의 경고를 무시하고 오히려 밸포어 선언의 이행을 앞당기기 위해 임시 군사정부를 끝내고 민정을 시작합니다. 최고 통치자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받은 것은 영국 내각에서 유대 국가를 가장 먼저 소리 높였던 유대인 각료 허버트 사무엘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인구의 90%를 구성하는 토착민들은 이런 정책의사결정에서 철저히 배제됩니다.


2.2. 야파 소요로 드러난 격렬한 반시온주의


1921년에 식민부장관 윈스턴 처칠은 아랍 지역의 재편을 위해 이집트로 왔다가 팔레스타인에 잠시 들릅니다. 그는 독립을 요구하는 아랍인들에게 자치는 오직 점진적으로만 인정할 것이며, “완전히 달성되기 전에 여기 있는 우리 모두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우리의 자손과 손주도 죽을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얼마 후 두 번째 소요가 일어난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번에 소요가 발생한 곳은 야파였습니다. 야파는 팔레스타인 중서부의 중요 항구도시로, 유대인들이 유럽에서 이주해 오는 주요 경로였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야파에 정착했고 또 20세기 초부터는 인근에 유대인의 도시 텔아비브를 지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경제 수도라고 불리고 벤구리온 공항이 위치한 도시지요. 이스라엘은 야파를 텔아비브에 병합시켜서 오늘날에는 야파(=야포)가 텔아비브의 구역 중 하나로 전락했습니다.


아무튼, 야파에서 소요가 일어난 계기는 다소 .... 황당?합니다. 유대인 중에는 소수의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아랍인과 유대인 사회주의자 모두로부터 배척받았습니다. 노동절을 기념해 공산주의자들이 시위를 일으키자 아랍인과 사회주의자들이 몰려와 아랍인 <-> 유대인 공산주의자 <-> 유대인 사회주의자 구도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그런데 경찰이 공산주의자들을 쫓아내자 아랍인 <-> 유대인 사회주의자의 대치 구도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경찰이 공포탄을 쏘자, 시위 현장으로부터 좀 떨어진 곳에 있던 아랍인들이 총성에 깜짝 놀라고 흥분해서 유대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소요는 [야파의] 만쉬야 구역에서 도시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유대 인구가 더 많이 사는 일부 동네에서는 유대인들이 반격에 나섰으나, 대부분은 아랍인들이 우위를 점거했다. 중앙광장과 시장 사이에서는 4-5천 명의 아랍인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과격하게 충돌한 곳은 갓 이주해 온 유대인들이 체류하는 이주자 수용소였다. 많은 아랍인들이 이주자에 대한 반감으로 이곳에 몰려와 돌을 던졌다.


수용소에는 백여 명의 이민자들이 있었는데, 그들 역시 돌을 던지며 저항하다가 급기야 폭탄까지 던졌다. 아랍인 한 명이 죽고, 여럿이 다쳤다. 유혈사태로 분노한 아랍인들은 문을 강제로 뚫고 들어가 그곳을 지키던 유대인 남성들을 때려죽였다. 여성들은 가벼운 폭행만 당한 뒤 풀려났고 이웃 아랍 주민들이 데려가 보호해 주었다. 이후 아랍인들은 수용소 내부로 들어가 약탈했으나, 건물 상층에 있는 병실 등은 침입하지 않고 돌아갔다. 덕분에 건물 안에 있던 대부분의 유대인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곳에서만 무려 13명의 유대인이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주자 수용소는 시온주의의 상징적인 시설물입니다. 자연히 아랍인들의 반감이 집중된 곳이었는데, 유대인들의 저항으로 아랍인 명이 사망했는데도 '몰살'하지 않았다는 것은 소요의 성격을 잘 보여줍니다. 아랍인들은 집단적으로 조직되지 않은 상태에서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었을 뿐, 구체적인 행동방침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피해자들을 이웃 아랍 주민들이 돌봐준 것도 주목해야 합니다. 이런 모습은 위임통치기 30년뿐만 아니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발견됩니다. 일례로, 이스라엘과 전국적으로 투쟁을 벌이던 인티파다 중에 식민촌의 유대인 아이가 길을 잃고 팔레스타인 마을로 들어오자 주민들은 부모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를 돌려보냅니다. 이처럼 분쟁이 있다고 해서 모든 집단 구성원이 똑같이 행동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야파 소요에는 또 한 가지 특이점이 있습니다. 바로 최초로 어린아이가 학살당했다는 것입니다. 범인은 시온주의자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뚜렷한 정치적 목표를 가지고 행동하는 과격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피해자의 성별이나 나이 같은 걸 구분하지 않고 살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10여 년 후 공공장소에서의 폭탄 테러를 시작하고 널리 사용한 것도 시온주의자들입니다. 야파 소요는 이런 만행의 시발점입니다.


그날 밤은 더 이상의 피해 없이 고요히 지나갔다. 그러나 날이 밝자마자 전날의 복수를 결심한 유대인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랍인이 사는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문을 열고 나오자 총으로 쏴 죽이고 아기를 다치게 했다. 또 다른 유대인 무리는 아랍인 주택의 문을 부수고 들어와 남성에게 총을 쏘고 폭행했다. 이를 본 어린 딸이 놀라서 아빠를 구하러 달려오자 도끼로 그녀의 머리를 찍어 갈라 버렸다. 남은 가족들도 이어서 폭행을 당했다. (영국 공식 보고서 내용에서 발췌함)


아랍인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영국군은 거리로 나온 군중을 곧장 해산시켰지만,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충돌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셋째 날에는 결국 계엄령을 선포해 질서를 회복했다. 3일간의 소요로 야파에서는 43명의 유대인이 죽고 134명이 다쳤다. 아랍인은 13명의 사망자와 49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이날을 끝으로 야파에서 더 이상의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야파 소요’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야파에서 많은 아랍인이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은 큰 파장을 일으켰다. 피해자 수가 과장되게 전해지고, 식민촌이 무기를 모으고 있다거나 인근 아랍 마을을 공격하고, 아랍인 노동자를 감금하고 있다는 등의 거짓 소문이 널리 퍼졌다. 유대인과의 충돌로 여러 형제자매들이 죽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랍인들은 “어떤 소문도 믿기 어렵지 않았다.”


야파에서 소요가 잦아든 셋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 아랍인들은 다섯 곳의 식민촌을 습격해 약탈했다. 아랍인들이 몰려오는 것을 사전에 감지한 유대인들이 몸을 피하거나 영국군이 긴급히 출동해 막아낸 덕분에 유대인 사상자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랍 측 인명피해는 무려 50명을 넘었다. 1주일 가까이 계속된 소요로 약 68명의 아랍인과 47명의 유대인이 눈을 감았다. 부상자도 각각 73명과 146명이 나왔다.


소요가 끝나고 해이크래프트 위원회가 사건을 조사합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번에도 아랍인들이 시온주의에 찬성하는데 단지 영국을 싫어해서 유대인을 공격한 것이라고 속이려 들었으나, 위원회는 믿지 않았습니다.


위원회는 속지 않았다. 그들이 직접 보고 들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은 너무나 참되고 만연하고 강렬했다.” 이런 반감은 지도자의 선동으로 주입된 것이 아니라 주민들에게 이미 내재된 감정이었다. 농민들은 유럽에서 생산된 시온주의 서적이나 신문을 읽고 논의하고 툴카렘처럼 “작은 도시의 주민도 영국의 지방 도시민보다 정치에 관심이 많다.” 그러므로 “시온주의의 목적과 유대 이민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민족적, 물질적 이해를 위협한다는 생각은 아랍인들에게 거의 보편적으로 퍼져 있고 특정 계층에 한정되지 않는다.” 특정 종교에 국한된 것도 아니었다. 이슬람, 동방정교회, 천주교, 마론교, 합동 동방천주교, 성공회교의 대표들은 자발적으로 위원회를 찾아와 같은 목소리를 냈다. 즉, “사실상 모든 비유대 공동체가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아랍인들은 영국의 친시온주의 정책에 대해서 불평했습니다.


위원회는 이런 불만에 대해 정책의 옳고 그름을 논하지는 않았다. 대신 비판의 화살을 전적으로 시온주의자들에게 돌렸다. 팔레스타인에서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내재한 반유대주의는 없”고 아랍 지식인들은 유대인이 이주해 와서 토지를 발전시키는 것을 환영하는 반면, 시온주의자들은 아랍인에게도 경제적 번영을 가져오겠다는 신념을 실천하지 않았다. 정부의 특혜를 받으면서도 시온주의자 위원회는 아랍인들을 회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십 년간 식민촌에서 일해온 아랍인 노동자들을 해고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등 “강렬한 불신만을 불어넣었다.”...


시온주의자 위원회의 의장대행을 맡은 에데르는 팔레스타인에 오직 하나의 민족의 고향만 있을 수 있고, 유대인들은 아랍인과 평등한 관계를 가질 게 아니라 우월적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대인에게만 무장이 허락되는 차별적 조치가 오히려 아랍-유대 관계를 개선할 수 있고, 고등판무관은 시온주의자 기구가 후보를 추천하거나 임명 거부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


"간부급 시온주의자들의 이런 태도는 (아랍의) 불만을 계속해서 만들어내고 있는 원인 중 하나이므로 무시할 수 없다. 이는 팔레스타인을 사람이 거의 살지 않고 전통이나 민족이 없는 ‘버려지고 유기된 땅’으로 보고 지역 주민들의 반대 없이 정치적 실험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습관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런 관념은... (영국이) 공인한 시온주의 정책의 정신과는 크게 모순된다."


즉, 팔린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해이크래프트 위원회 역시 아랍인들의 책임은 묻지 않고 시온주의자들의 잘못을 원인으로 지적했습니다. 1년 전의 나비 무사 소요와 달라진 점은, 수많은 시신과 상흔에서 드러나는 깊어진 반감이었습니다. 또한, 위원회는 인종적 반감이 토착 (아랍) 유대인과 새롭게 이주해 온 자들에 대한 구분마저 사라지게 만들었다고 지적했습니다. 시온주의자와의 갈등이 아랍-유대 간의 민족적 갈등으로 발전했다는 것이지요.


두 차례의 소요는, 특히 야파 소요는 시온주의 문제가 팔레스타인에서 결코 잠재울 수 없는 거대한 불만과 분노를 야기한다는 것을 증명했다. 누가 보아도 아랍인과 시온주의자들은 한 운명을 같이 할 수 없는 게 명확했고 민족 간의 갈등으로 격화될 우려가 컸다. 다가올 재앙을 막으려면 반드시 변화가 필요했다. 소요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난 6월 3일에 사무엘은 식민부와 협의 하에 “유대 국가를 세우겠다는 의도를 함축적으로 부인”하는 연설을 한다.


이에 따르면, 밸포어 선언이 의미하는 바는 “세계 곳곳에 흩어졌으나 마음만은 언제나 팔레스타인을 향한 유대 민족이 고향을 가질 수 있게 하고, 정해진 수와 현 주민들의 이해에 부합하는 범위 내에서 일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와서 모든 거주민을 이롭게 할 수 있도록 자원과 노력으로 땅을 개발하는 것이다.” “영국은 ... 주민들이 그들의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이해에 상충된다고 생각할 만한 정책을 절대 부과하지 않는다.”


사무엘의 연설의 핵심은 마지막 줄에 있습니다. 잘 보시면, '정치적' 이해에 상충되는 걸 부과하지 않는다고 말했지요? 즉, 유대 국가를 부정한 것입니다. 영국은 그간 밸포어 선언에서 말하는 '유대 민족의 고향'이 유대 국가인지 뭔지 어떤 대답도 내놓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식민부와 상의한 후에 문구를 정해서 저렇게 말했고, 이는 영국이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유대 국가를 부인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따라서 야파 소요는 영국의 친시온주의 정책에 제동을 거는 데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2.3. 펜은 칼보다 약했다.


아랍 지도자들은 정치적으로 통제되지 않은 폭력인 소요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요가 일어나고 곧장 대회를 열어 폭력 사용을 규탄하고 영국과 협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로 합니다. 무사 카짐 후세이니를 필두로 한 대표단이 선정되고 1921년에 런던으로 건너가 1년 동안 정부 관계자와 현지 언론 등을 상대로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려고 노력합니다.


대표단은 주민이 선출한 의회와 내각제 형태의 민족 정부의 수립, 민족의 고향 정책의 폐기, 유대 이주 중단 등을 공식적으로 요구했고 식민부와 논의합니다.


회담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영국은 어떠한 형태로든 민주적인 정부를 용인할 의사가 없었다.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체제는 곧 시온주의 정책의 중단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아랍인들은 민주적인 정부가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양측의 팽팽한 입장에 대한 학자들의 서술 방식입니다. 제가 본 대부분의 서구 학자들은 아랍인들이 고집을 부린다는 식으로 기술합니다. 저는 반대로 영국이 고집을 부린다고 적었고요. 여러분이 보시기엔 어떤 게 올바르다고 생각하십니까? 이후로도 협상 문제가 나올 때마다 같은 프레임이 계속해서 적용됩니다. 아랍인들이 독립이나 자치권을 요구하거나 시온주의에 대해 반대하면 그게 극단주의적이고 비타협적 태도라고 수식합니다.


한편, 1922년에 처칠은 팔레스타인 헌법 초안을 대표단에게 공유합니다. 헌법의 전문에는 밸포어 선언이 기재되어 있고 이러한 정신에 따른 통치가 곳곳의 조항에 반영되었습니다. 즉, 토착민보다 시온주의의 이익을 실현하는 통치 체제였습니다. 대표단이 그 부당함에 항의하는 서신을 보내자 처칠은 답신을 보내 반박했고, 이를 언론에 공개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처칠의 논리는 거짓과 왜곡으로 가득했고, 이를 꿰뚫어 본 대표단에 의해 모조리 재반박당합니다. 공개 논박이다 보니 처칠은 곧장 움츠러들었고 반박을 포기한 채 힘의 논리를 앞세웁니다.


저는 대표단과 처칠이 주고받은 서신들이 정말로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영국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았기 때문에 학자들의 관심을 받지는 못했으나, 소위 문명국가의 장관이 야만적인 아랍 지도자들한테 논리적으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영국 식민 정책의 부당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대표단은 영국이 만든 팔레스타인 헌법이 민주주의적이지 못하고 상위법인 국제연맹 규약에도 위반됨을 지적했습니다.


[헌법] 초안에 따르면 의회는 고등판무관과 그가 임명한 2명의 의원, 10명의 정부 관료, 12명의 선출직 의원으로 구성되고 고등판무관이 캐스팅보트를 행사할 수 있다. 즉, 고등판무관이 이끄는 정부가 과반의 표를 장악한다. 또한, 의사정족수가 의석의 절반도 못 미치는 10명이라서 관료들만 모여서 의결하는 것이 가능하다. ... 대표단은 이처럼 권력분립의 원칙을 철저히 어기는 초월적 행정부 수반을 영국 관료가 맡는다는 것은 ‘독립국가로 존재하는 게 잠정적으로 인정될 수 있는 발전 수준에 이르렀다.’고 정의한 위임통치규약 22조를 위배하고 팔레스타인을 “최하위 식민지”로 취급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처칠은 고등판무관이 임명한 위원이 정부 입법안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다는 비현실적인 말로 방어를 시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한다면 임명직 의원을 제외시켜서 '아랍 의원과 유대 의원이 만장일치하면 정부안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구조'를 제안합니다. 이 역시도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또한, 의사정족수가 10명이라서 관리들만 참석해도 의결이 가능한 구조로 만든 것도 단순히 그럴 경우는 아마 없을 테니 괜찮다는 헛소리를 합니다.


결정적으로, 처칠은 팔레스타인에 대한 처우가 부당하지는 않다고 주장하면서 일부 식민지는 입법부가 전혀 없는 반면 팔레스타인에서는 의원의 절반 이하만이라도 선출직으로 뽑으니 “최하위 식민지”는 아니며 “헌법 초안으로 향유하게 될 팔레스타인의 지위는 대다수의 식민지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은 공식적으로 식민지가 아니었습니다. 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선진국이 도와주는 '위임통치'였습니다. 그러니 대표단이 이런 오류들을 하나하나 지적하자 처칠은 말문이 막히고 꼬리를 말게 된 것입니다.


아무튼, 대표단과의 논쟁에서 지고 난 뒤 처칠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정책의 방향성을 '백서'로서 발표합니다. 백서는 특정 사안에 대한 기구의 입장을 간결하게 알리는 안내문으로, 일반적으로 정부가 국민들에게 정책을 알리는 문서를 일컫습니다. 처칠의 이름을 딴 '처칠 백서'는 앞서 사무엘이 말했던 유대 국가를 더한층 명시적으로 부인하고, 점차적으로 자치권을 인정하겠다고 알립니다.


(밸포어 선언으로) 기대하는 목적이 완전히 유대적인 팔레스타인을 만드는 것이라는 식의 비공식적인 발언들이 나오고 있다. ... 그러나 영국 정부는 그런 기대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목표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아랍 대표단이 걱정하는 것과 같이 팔레스타인에서 아랍 인구나 언어, 문화가 종속되거나 사라질 만한 일은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다. 밸포어 선언은 팔레스타인 전체가 유대 민족의 고향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고향이 팔레스타인 안에 건설되어야 한다고 보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서는 밸포어 선언을 고수했고, “시온주의 정책이 팔레스타인의 개발과 번영의 미래가 달린 협력의 정신을 기르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표단이 이를 비판하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이후 영국은 행정부 수반인 고등판무관이 절대적인 권력을 지닌 의회를 선출하는 총선을 실시합니다. 식물 의회에 참여했다가 위임통치와 시온주의 정책에 동의하는 허수아비가 되는 것을 우려한 아랍인들은 선거 파업조직적으로 실시했고 선거는 불발로 끝납니다. 영국은 국제사회에 체면을 구겼고, 아랍인들의 참여 없이 식민 정부를 구성해 강제로 통치합니다.





2절의 제목은 '외로운 투쟁의 시작'입니다. 이 글에서는 분량 때문에 관련 내용을 담지 못했습니다만, 열강이 아랍 지역을 분할시켜 버리는 바람에 두 차례의 소요와 대표단의 외교협상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나 홀로 투쟁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인구 1백만의 작은 지역이다 보니 영국이나 시온주의자들에게 어떤 위협도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외부의 지원을 기대했다. 1922년 9월에 튀르키예[오스만 제국의 후신]가 그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을 때는 튀르키예에 대표단을 파견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튀르키예인들은 아랍인들의 ‘배신’을 잊지 않았고 영국의 반발 등을 우려해 거절했다. 바로 그 ‘배신’을 종용했던 후세인은 도움을 주기는커녕 히자즈 왕국의 국경을 조율하는 대가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인정하는 협약을 체결하려 했다.


다른 아랍 지역도 도움을 주기는 마땅치 않았습니다.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은 영국의 영향권 아래 있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를 상대로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아랍인들에게는 참으로 암울한 시기였지요. 다만, 다른 지역들은 30여 년 안에 독립을 쟁취합니다. 오직 팔레스타인만 시온주의자들 때문에 독립에 실패하고 오늘날까지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시온주의가 팔레스타인의 번영과 협력의 정신을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한 처칠 백서에 대해 영국은 언제쯤 반성할 수 있을까요?


2절은 많은 사건을 다루다 보니 글이 길어졌네요. 그래도 딱 두 가지만 더 언급하고 끝내겠습니다. 하나는 유대 국가를 부인하는 영국의 태도입니다. 사무엘의 연설과 처칠 백서는 동시대 주민들과 영국 관료들은 물론 후대의 학자들이 보기에도 유대국가를 부인한 것으로 해석되지만, '명시적'으로 유대 국가를 부인하지는 않고 간접적으로 돌려 말했습니다. 왜 유대 국가를 직접 거론해서 말하지 않았을까요?


알려진 정답은 없습니다. 아마도 두 가지가 주요 이유였을 듯합니다. 첫째로 시온주의자들의 반발을 우려해서였을 것입니다. 일례로, 2차 대전을 앞두고 1939년에 아랍 독립국가를 세우겠다고 영국이 새로운 백서를 발표하자 시온주의자들이 테러에 나섭니다. 둘째로, 유대 국가의 가능성을 남겨두고 싶어서였을 겁니다. 간접적 부인과 직접적 부인은 정치적 부담의 크기가 다릅니다. 훗날, 처칠은 자신의 백서가 유대 국가를 세우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고 뻔뻔하게 말합니다. 제5장에서 살펴볼 1937년의 필 위원회는 이 발언을 근거로 유대 국가를 세우는 게 정책 변화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한편, '유대 국가'를 부인한 사무엘의 연설과 처칠 백서가 야파 소요의 대응으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오늘날까지 시온주의와 싸워온 150년의 역사에서 단 한 번도 평화적인 협상으로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낸 적이 없었습니다. 변화는 오직 물리적 투쟁으로만 만들어졌고 그 최초가 야파 소요였습니다. 지금도 전쟁이 나자 언론이 관심을 가지고 국제사회가 팔레스타인 독립 국가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다시 냅니다. '평화롭던 시기'에는 잠잠하다가 말이지요.


우리가 잘 아는 명언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경구를 상기한다면, 팔레스타인인들이 왜 무장투쟁을 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가자지구 전쟁이 하루라도 빨리 휴전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전쟁이 끝나면 또다시 식민주의에 대한 관심이 묻혀버릴까 봐 두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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