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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y 08. 2024

해제| 5장 - 우리가 외면하는 테러리즘의 불편한 진실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드디어 마지막 장입니다. 5장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파트입니다. 아랍인들의 무장투쟁과 시온주의자들의 테러가 시작돼 너무나도 많은 인명이 무익하게 죽어나가기 때문입니다. 제 책을 읽고 브런치 글도 늘 읽어주시는 송서응 선생님께서는 '시온주의자들이 미쳐 날뛴다'라고 표현하셨는데, 이게 사실 딱 들어맞습니다. 유대 국가를 건국할 순간이 무르익고 군사력을 확보하게 되자 정말.... 날뜁니다. 시온주의가 비록 아랍인의 추방을 처음부터 계획했지만 군사적으로 인종청소를 저질러도 된다고 합리화할 만큼 사악한 운동은 아니었는데, 아랍인과의 갈등이 고조되고 저항이 거세지자 수단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세간에는 유대인은 평화를 추구했는데 아랍인들이 폭력적이라서 분쟁이 생겼다고만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제5장에서는 아랍인들의 무장투쟁이 정당한지를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앞선 제4장에서는 아랍 사회가 시온주의의 식민화로 잠식되어가고 있는데, 영국 정부가 아랍인들을 탄압해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게 막은 상황임을 배웠습니다. 공동체가 붕괴되고 고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아랍인들에게는 어떤 선택권이 있었을까요? 추방당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고향에서 유대인이 주인이 되는 유대 국가가 세워질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만 했을까요? 여러분이 아랍인이었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무엇이 올바르다고 말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절 : 무기를 들어야만 했던 이유

시기 : 1930-1939년

주제 : 아랍 대항쟁과 무장투쟁

핵심 내용

아랍인들이 무장투쟁을 시작한 이유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유대 국가


2절 : 잘못은 유럽이 하고 책임은 아랍이 지다.

시기 : 1939-1948년

주제 : 아랍 대항쟁과 무장투쟁

핵심 내용

시온주의자들의 테러에 대한 유럽의 반응

홀로코스트가 팔레스타인에 끼친 영향

인종청소 -> 전쟁 발발


3절 : 분쟁이 계속되는 이유

시기 : 1948-현재

주제 : 분쟁이 계속되는 이유

핵심 내용

난민이 투쟁에 앞장서는 이유

테러리즘이 시작된 배경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

평화협상의 전개




우리나라는 비서구 국가에 대한 편견과 무지가 심각하지요.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게 바로 테러리즘입니다. 우리는 테러가 무조건 나쁘고 인간으로서 저질러서는 안 될 사악한 행동으로 전제합니다만, 정작 우리 선조들의 항일 독립운동도 테러라고 불렸고, 실제로 테러라는 단어의 사전적 정의에 들어맞는다는 사실을 모르지요.


2023년 1월 현재,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영웅’이 나오자 일본 누리꾼들이 한국의 테러리스트 찬양을 비판한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언론은 직접적인 논평은 피하면서도 “역사교육 못 받은 탓”이라는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의 발언을 인용해 비판적인 의식을 드러냈다. 무력으로 항거하는 방식을 논쟁거리로 생각하는 기사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폄하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본 누리꾼을 극우세력이라고 단정 지었다. 마치 정치적 목적이 아니라면 무장투쟁을 나쁘게 보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 우리는 어째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폭력은 테러라 부르고 비난하는 것일까?


5장을 퇴고하던 당시 뮤지컬 기반의 영화 '영웅'이 뉴스를 장식했습니다. 일본인들이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는데요, 어떤 뉴스도 이를 제대로 분석하지 않아 아쉬웠습니다.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옹호하려면 테러리스트라고 부른 걸 비판할 게 아니라, 행동의 원인을 설명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사전적 정의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살해는 테러가 맞기 때문입니다.


테러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변천해 온 단어다. 2022-23년 현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자국 침략을 ‘테러’라고 부르짖는 것과는 달리 과거에는 국가적 폭력을 테러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20세기까지 세계 질서는 국가중심적이었고, 국가는 폭력의 사용이 ‘유일하게 공인’된 단체로 정의되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국가가 아닌 집단이나 개인이 저지르는 폭력은 자동적으로 불법적이고 부당한 것으로 인식했고 그러한 폭력의 목적이 정치적일 때 테러라고 비난했다. 즉, 폭력의 정당성을 판가름하는 기준은 엄밀히 말해서 도덕성이 아니었다.


19세기 이래로 테러리즘이라는 단어는 세계 곳곳의 역사에서 등장하고 대부분은 식민지 주민들의 항거에 적용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은 독립 운동을 매우 사악하고 끔찍한 짓거리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립을 일궈낸 다음에 서구권에 편입되자 이러한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21세기 현재도 식민 지배를 받으며 저항하는 사람들을 무비판적으로 테러리스트라고 부르고 조롱하면서 우리 선조들을 욕보이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분쟁이 계속되는 이유는 이런 무지몽매함과 매우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정해진 프레임에 따라 세뇌된 채 세상을 바라보니 어떠한 긍정적인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팔레스타인인들의 독립운동을 테러라고 부르고 비판하는데, 일본이 어떻게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숭고하다고 간주하겠습니까? 당연히 테러라고만 인식하지요.


세상 모든 일은 남이 붙여준 단어만 가지고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합니다. 오늘날 무슬림 테러리즘은 서구 국가들의 식민 지배와 내정 간섭에 대한 항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즉, 우리가 일본에 항거한 것과 동기가 같습니다. 다만 우리나라의 독립 투쟁과 달리 무슬림 테러리즘은 민간인을 공격한다는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무장투쟁의 정당성은 어떻게 판별하는 게 옳을까? 흔히 테러의 부당함을 강조할 때 민간인의 피해를 거론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이 9·11 테러의 동기를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고 나서는 이유도 3천여 명의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들 역시 민간인을 대상으로 많은 공격을 행했다. 특히 폭탄 테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희생자를 만들어 많은 지탄을 받는다. 비교적 최근인 2003년 8월에도 하마스의 대원이 버스에서 폭탄을 터트려 23명이나 죽였고 격렬하게 비난받았다.


그런데 민간인 피해가 정말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면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보다 적어도 수십 배 이상 많은 민간인을 학살해 왔는데도 비판받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버스나 시장 등 공공장소에서 고성능 폭탄을 터트려 어린아이들마저 무차별로 학살하는 테러는 시온주의자들이 먼저 시작했고 숱하게 선보인 일들이었다. ... 1982년에는 레바논에서 3천 명 이상의 비저항 비무장 난민을 무참히 학살했다. 이는 9·11 테러의 사망자 수치와 같은데도 비난은 약했고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잊혔다.


관련해서 책에 적지 못한 조금 민감한 내용을 말하고 싶습니다. 사실, 우리 독립 운동가들도 민간인을 학살한 사례가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례에 그치니까 논외로 두었습니다. 다만, 왜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민간인을 목표물로 삼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당연히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착한 분들이라서 그렇지'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다면, 지금까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공부한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우선, 주위에 일본인 민간인은 거의 없었고 이들을 일거에 죽일 만큼 효과적인 고성능 폭탄을 보유하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민간인을 죽인다고 해서 일본 정부에 피해를 입히거나 정책을 재고하게 만들 수 있는 효과가 조금도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시대의 일본에서 시민 수십수백 명의 목숨은 고위 관료 한 명만 못했습니다.


이는 동시대 영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36년에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무장투쟁으로 수십 명의 영국 경찰과 군인을 죽였을 때 영국 정부는 차분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 고위직 공무원 한 명이 살해당하자 즉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섭니다. 또 다른 예로, 2차 대전 중에 처칠 총리는 유대 국가를 비밀리에 지지하며 내각의 의견을 모으고 이를 승인했습니다. 그런데 1944년에 중동지역주재공사이면서 처칠의 친우이기도 한 모인(Moyne)이 시온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분개하며 유대 국가 안을 곧장 취소했습니다.


오늘날 무슬림 테러리즘이 민간인을 목표로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과거와는 달리 개개인의 목숨값이 많이 올랐기 때문입니다. 굳이 힘들게 고위 관료를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정치적 변화'를 끌어낼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특히, 팔레스타인의 경우에는 '인구 전쟁'이 분쟁의 핵심이라서 더욱 그렇습니다. 유대 인구가 조금이라도 살고 있는 땅은 얼마나 더 많은 아랍인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든지간에 유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게 영국이나 미국, 유엔의 논리였기 때문에 유대인 한 명 한 명이 그야말로 '테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런 인구 전쟁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어서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은 출산율이 비교적 높은 편입니다.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할까요. 아마 어떤 경우에도 민간인 공격은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을 테고 저 역시도 이를 지지합니다만, 사실 굉장히 논쟁적인 주제입니다. 이 한 가지 주제만 가지고도 책 한 권은 쓸 수 있을 만큼 따져봐야 할 쟁점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로 민간인 학살은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별로 없습니다. 그저 남이 하면 안 되지만, 우리가 하는 것은 괜찮다는 내로남불주의자들만 가득할 뿐이지요.


우리 사회를 돌아봐도 그렇듯이 폭력의 정당성을 논할 때 세상은 공정한 기준을 들이대지 않는다. 팔레스타인의 테러는 적은 인명 피해만 입혀도 호들갑을 떨며 언론과 책에서 회자되지만, 이스라엘의 테러는 그보다 곱절의 살상을 해도 대단찮은 일로 치부되고 소수의 기억 속에만 남는다. 이 같은 이중잣대에 대한 변명으로 이스라엘은 자국의 모든 행위는 ‘보복’이라서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대부분의 서구 국가들이 이를 옹호한다. 그러나 앞서 보았듯이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의 국가적 폭력에 대한 보복으로 테러를 했다. 그렇다면 누가 보복을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다음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에 관해 지인과 나눈 실제 대화다.


지인 : 테러는 어쨌든 나쁜 짓이다.

필자 : 동의한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을 공격하고 죽이는 것도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지인 : 팔레스타인인들이 이스라엘인을 죽였으니 정당한 보복이다.

필자 : 그 팔레스타인인들의 가족이나 친지가 이스라엘에 의해 죽었기 때문에 그들 역시 보복한 것이지 않은가.

지인 : (말없이 노려봄)


제 지인의 태도를 보시고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여러분은 자신의 집단적 이익에서 벗어나 도덕적인 판단이 가능한 분이신가요? 그렇다면 베트남전 당시 우리 군의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23년 2월 7일, 우리 법원은 베트남전 당시 우리 군이 민간인을 학살했고 정부가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일부 언론은 우리가 일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했으나 뉴스 댓글난에서 확인되는 여론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민간인을 위협 요소로써 제거해야 마땅했다든지, 베트남 정부가 사과나 배상이 불필요하다는데 우리가 나서서 할 필요가 있냐는 등의 이유에서다. 또한, 2월 17일에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학살을 부인하며 법원 판결을 비판했다.


생각보다 복잡한 문제가 되지요? 제가 무려 8년이란 시간을 들여서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다룬 것은 단순히 팔레스타인인들을 돕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팔레스타인이란 소재를 가지고 우리 사회의 성숙한 발전을 돕는 게 더 큰 목적이었습니다. 요약만 선보이는 브런치 글에서는 이를 별로 드러내지 못했으나, 책을 열심히 읽으신 분들이라면 이런 의도를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5장은 이런 고민이 가장 많이 필요한 주제입니다. 특히 지금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에 대한 실마리를 줄 수 있습니다. 그럼 다음주부터 본문 분석에 들어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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