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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y 15. 2024

해제| 5장 1절 - 무기를 들어야만 했던 이유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우리 시대에 팔레스타인하면 폭력 집단의 대명사 급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그런데 그런 팔레스타인인들이 식민화에 저항하기 위해 무장투쟁을 선택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일까요? 장장 55년입니다. 그것도 평화적인 수단을 모두 다 써본 다음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정도가 아니라 가슴까지 불이 옮겨 붙은 다음에 선택한 수단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가슴까지 불이 붙으면 어떻게 되나요? 심각한 화상을 입고 죽을 확률이 대단히 높지요. 네, 그게 팔레스타인에서 실제로 일어난 역사입니다.


시온주의가 대두한 1880년대부터 1920년대 말까지 아랍인들의 저항운동은 언제나 제한적인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얼마나 시온주의에 강하게 반대하는지’를 정부와 시온주의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는데도 단 한 번도 시온주의자들을 전면적으로 공격해 궤멸시키려는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단지 그런 위협이 잠재하니 자발적으로 포기하도록 권했다. 그래서 항쟁은 언론이나 청원, 시위, 불매운동과 같은 평화적인 수단에 의존했고, 소요를 비롯해 때때로 가해진 폭력은 정치적으로 지원받지 못하고 단지 ‘강렬한 반감’을 증명하는 사례로만 활용되었다.


그러나 반세기 동안의 모든 노력이 허사로 돌아가자 투쟁 노선은 재고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너무나 오랜 기다림 끝에 시온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그들의 뒤에는 거대한 식민 제국이 방패가 되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아랍인들은 영국을 상대로 싸우기를 두려워했으나 고향을 지키기 위해서는 다른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1. 중대한 기로에 서다.


1920년대 동안 영국은 아랍 정치인들을 통제함으로써 그 밑에 있는 대중을 통제했습니다. 그런데 서쪽벽 소요 이후 영국에 대한 반감이 급증하면서 청년들이 기성 정치인에게 반기를 들고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1931년에 나블루스에서 벌어진 시위는 이러한 변화를 가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영국은 이런 변화를 인식했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넘겨버렸습니다.


이런 와중에 시온주의 정책의 핵심인 이주는 날개 돋친 듯이 날아올랐다. 1929-31년 동안 5,000명을 맴돌던 이주자 수는 1932년부터 9,553명으로 몸집을 불리더니 1933년에는 30,327명으로 급증했다. 거기에다 1932-33년 동안 22,400명이 불법적으로 이주해 온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주가 급증한 배경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로, 미국발 대공황으로 인한 세계 경제 침체였다. 미국 등이 [이주의] 빗장을 걸어 잠근 한편, 팔레스타인은 대공황의 영향을 일찍 받았지만 빠르게 회복한 덕분에 매력적인 이주지로 부상했다. ...


또 다른 중요한 요인은 1933년 1월 히틀러의 독일 총리 임명과 반유대주의 정당인 나치의 부상이었다. 독일에는 약 50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고 거의 모두가 스스로를 유대교를 믿는 애국적인 독일인으로 생각했다. 시온주의자는 대략적으로 10%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경제적 차별이 심해지자 견디지 못하고 많은 유대인이 독일을 탈출했고 1939년까지 약 6만 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온다. 그중 3분의 1 이상이 자본가였는데, 이는 시온주의자들이 나치 정부와 맺은 협약 때문이었다. ...


독일은 1931년부터 해외로 이주하는 사람들의 국내자산을 동결시키고 있었는데, 유대인 기구는 1933년 8월 25일에 독일 정부와 이전협약(Ha'avarah agreement)을 체결해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때는 독일 상품을 구매해 가는 방식으로 자산 일부를 이전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시온주의자들은 그 보답으로, 바로 하루 전날 프라하(Prague)에서 열리고 있던 18차 시온주의자 대회에서 ...[대독일 유대인] 불매운동을 240대 43이라는 압도적인 차이로 부결시켰다. 덕분에 세계 유대 공동체의 불매운동은 약화되고 독일의 팔레스타인 수출액은 두 배가량으로 늘어났다. 협약은 독일이 1939년 9월에 2차 대전을 일으키면서 파기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이 나치와 야합한 이전 협약은 정말로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인데도 유대 공동체 내부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는 사안입니다. 이전 협약은 유대인들의 이주의 자유를 제약하고 팔레스타인에서 분쟁을 인위적으로 심화시킨 행동입니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이라는 활로를 뚫어준 것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그 대가로 지불한 것은 '반유대주의 국가'에 대한 불매운동을 저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시온주의자들이 반유대주의와 맞서 싸우기로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됐을까요? 2차 대전이나 홀로코스트를 막지는 못하더라도 피해를 줄일 수는 있었지 않을까요. 시온주의자들의 이 결정으로 많은 유대인들이 피를 흘리게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유대 이주가 급증하자 팔레스타인의 정치 지도자들과 청년들은 함께 시위에 나섭니다. 그러나 영국은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해마다 이주자 수를 늘립니다. 시온주의에 대한 반감이 끝을 모르고 고조되는 와중에 1935년의 일명 '시멘트 통 사건'이 갈등을 폭발시킵니다.


1935년 10월에 시온주의자들이 라이플 800정과 탄알 50만 개를 시멘트 통으로 위장해 밀수입하다가 사고로 우연히 적발되었다. 아랍인들의 불안과 분노는, 시온주의자들의 반발을 우려한 영국이 밀수입한 군수품이 더 있는지 수색조차 제대로 하지 않아 더욱 커졌다. 영국의 감시로 활동을 중단했던 하이파의 비밀결사단체는 목숨을 걸고 항전에 나서기로 했다. 11월 12일에 지도자인 카삼과 26명의 대원은 농민들의 무장봉기를 조직하려고 제닌으로 가던 중 경찰과 맞닥뜨려 교전을 벌였고, 이후 출동한 영국군에 패배해 카삼과 대원 2명이 사망했다. 주민들은 그들을 순례자로 추앙했고 장례식은 대규모 시위로 변했다.


(카삼은 무장투쟁의 선구자로 기려지는 인물이며, 하마스의 군사집단기구 알카삼 여단이 바로 여기서 유래되었습니다. 카삼의 알은 영어의 정관사 the와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랍 지도자들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요. 네, 이번에도 무장투쟁이 아닌, 영국과 협상에만 매달렸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경이롭게 평화적이라고 해야 하나 잘 모르겠습니다. 아랍 지도자들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영국을 상대로 무장투쟁을 한다고 승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어쩌다 독립을 얻어내더라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자기 자신과 가족들도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결정을 내리기란 쉽지 않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대부분의 많은 나라들이 무장투쟁을 식민 지배 초기부터 저항 운동의 수단으로 삼았던 것과 비교하면, 그리고 무장투쟁을 일찍 시작했더라면 독립을 달성했을 것이라는 후대 학자들의 주장을 고려하면, 비폭력운동으로만 독립을 달성하려고 했던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결정이라고 생각합니다. 평화적으로 투쟁한다 해서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요. 아랍인들이 폭력적이라서 분쟁이 일어났다는 이스라엘의 주장은 여전히 잘 먹히고 있잖습니까. (친이스라엘 사관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보면 아마 폭력 그 자체, 폭력의 신, 악마 등등으로 묘사해도 부족하겠지요.)


그런 팔레스타인에서 55년 만에 무장투쟁을 일으킨 것은 민중이었습니다. 1936년에는 유대 인구가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게 되었던 데다가, 이주가 계속되면 늦어도 10년 안에 유대 인구가 다수 인구로 부상하게 될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향을 잃게 되리란 걸 모두가 알았기 때문에 거국적 저항 운동이 시작됩니다. 지도자들도 마침내 힘을 보태기로 합니다.


1.2. 갈등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유대 국가


1936-39년에 100만 팔레스타인인들이 일으킨 독립운동은 중동 지역 최대의 저항운동이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아랍의 대반란(the Great Arab Revolt)으로 부르지만, 저는 이를 대항쟁이라고 의역했습니다. 대항쟁은 두 단계로 나뉩니다. 첫 번째 시기는 1936년 봄부터 가을까지, 두 번째는 1937년 가을부터 1939년 여름까지입니다. 번째 시기에는 무장투쟁보다 파업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파업은 아랍 사회의 생활규율이 되었다. 전국의 가게가 문을 걸어 잠그고 운송업이 중지했다. 학교도 파업에 동참하고 학생들이 나서서 거리를 순찰하며 파업을 감시했다.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자들은 언론에 이름이 실리고, 학대와 폭행을 당했다. 생계가 어려운 자들에게는 식량이 배급되었고, 주로 부유층과 공직자들로부터 자발적으로나 반강제적으로 기금을 모집했다. 여성들도 귀금속을 내다 팔아 보탰다. 언론은 민족적 연대를 형성하고 파업을 독려했다. ...


영국의 완고한 거부주의는 항쟁의 열기를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파업이 강화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세 번째 단계로 무장투쟁이 본격화되었다. 각지에서 청년들이 무장단체를 조직해 대인살상 공격을 시작했고, 파괴 공작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 6월에 들어서는 농민들도 가세하면서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언론은 처음에는 우려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점차 항쟁의 한 형태로 받아들이고 자유의 투사들로 칭송했다. ...


영국은 고심했다. 데이비드 옴스비 고어(David Ormsby-Gore) 식민부장관과 워홉은 강경하게 대응하다가는 더 큰 저항을 야기할 뿐이라고 생각했고 아랍인들의 요구대로 이주를 중단시키길 원했다. 그러나 6월에 하원에서는 팔레스타인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고, 바이츠만은 영국이 유화책을 선택하면 유대인들이 등을 돌릴 것이라며 위협했다. 내각은 다시 한번 후자의 손을 잡았다. 9월에 영국은 추가 병력을 파견하고 전면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아랍고등위원회는 놀라서 아랍 국가들의 중재가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나 영국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사력에 밀린 팔레스타인 지도부는 결국 투쟁을 멈추기로 하고, 영국은 '필 위원회'를 파견해 이번 사태의 원인을 파악하고 대책을 수립합니다. 그 대책은 바로 팔레스타인을 분할하고 그 일부에서 유대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습니다.


위원회는 대항쟁을 위임통치정부에 대한 “반란”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이전의 소요들과 마찬가지로 유대 민족의 고향에 대한 반감과 공포, 그리고 민족정부가 수립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원인이었다. 위원회는 특히 후자가 중요한 동기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불만을 해소하려면 위임통치를 종료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한 선결 조건인 자치정부의 발전이 아랍과 유대 양자에 대한 영국의 이율적인 의무로 인해 “교착상태”에 빠진 상황이었다. ...


위원회는 유대인의 이주로 아랍인들이 전반적으로 물질적 혜택을 얻었다는 종래의 입장을 옹호했다. 그러나 아랍과 유대는 언어, 종교, 문화, 생활, 생각, 행동이 다르고, 각각 자신들만의 독립 국가를 세우고 싶어 하는 민족적 열망이 너무 크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회유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동안 아랍인들이 꾸준히 제기해 온 문제 인식을 20년 만에야 수용한 것이다. 그러나 위원회가 도달한 결론은 아랍인들과 완전히 달랐다. 위원회의 관점에서는 어느 인종도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 게 정당하지 않고, 따라서 팔레스타인을 분단해 각자 통치할 것을 제안했다. 증오와 유혈을 감당하면서까지 정치적 통합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국경을 새로 그어 평화와 친선 관계를 만드는 것이 보다 도덕적이며,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묘사했다. ...


아랍인들은 팔레스타인 전체 토지의 77.2%를 소유한 반면 유대인들은 5%만 소유했으나 유대 국가로 지정된 영토는 그 4배에 가까운 19.1%였다. 특히, 핵심 수출 상품인 감귤류 과수원은 무려 88.5%가 유대 국가에 포

함되었는데, 그중에서 36.6%는 아랍인들의 소유였다. 유대 국가로 지정된 영토에서 살고 있는 유대와 아랍 인구비는 50.9 대 49.1로 사실상 같았다. 한편, 트랜스요르단에 병합되는 아랍 지역은 팔레스타인 전체의 67.3%를 차지했으나 그중에서 60%는 브엘세바 지구의 사막이었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의 비율은 고작 1.5%였다.


분할안은 여러모로 불공평하고 비도덕적이었으나,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유대인들이 아랍인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지만, 아랍인들이 유대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상관없다는 논리입니다. 이는 이후에 제기되는 모든 분할안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는 논리입니다.


영국 정부는 필 위원회의 권고안을 승인하고 백서를 발표해 유대 국가의 장점을 설파합니다.


아랍인들은 민족의 독립을 달성할 수 있으며 ... 마침내 유대인의 지배에 대한 공포와 성지가 유대인의 통제를 받게 될지 모른다는 걱정에서 해방될 것이다. 아랍 국가는 영국 정부와 유대 국가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분할은 유대 민족의 고향의 건설을 보장하고 미래에 아랍인의 지배를 받게 될 가능성도 없애 준다. 유대 민족의 고향은 유대 국가로 전환되고 이주에 관한 모든 통제권을 지닌다. 이곳의 시민들은 다른 국가의 시민들이 누리는 권리와 유사한 지위를 획득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마침내 ‘소수 인구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시온주의의 주요 목표가 달성된다.


정말로 유대 국가는 이런 이점이 있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을 만들어낸 것이 누구였지요?


위원회가 분할이 필요하다고 본 상황이나 이점은 팔레스타인을 강제점령한 영국 정부가 토착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집행한 정책으로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팔레스타인의 유대 공동체가 아랍 공동체와 언어, 문화적으로 갑자기 달라진 것은 단기간에 유럽 유대인들이 대규모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고, 위원회는 그들이 영국의 지원 덕분에 이주해 왔다고 스스로 말했다. 아랍인들의 반대와 부인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유대 이주가 가져올 경제적 번영이 그들을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일방적으로 밀어붙였지만, 경제적 유화 효과는 정치적 열망을 상쇄하지 못했다. 따라서 위원회는 민족적 “반감을 만들어냈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도 위임통치”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


분할안은 아무리 긍정적으로 해석하더라도 아랍인들의 정치적 열망을 무시하고 시온주의를 육성했던 ‘과오’를 바로잡기 위해 고향의 일부를 포기하도록 희생을 강요하는 부당한 폭력에 불과했다. 심지어 위원회에 따르면 지난 역사는 과오가 아니라 계획이었다. 그동안 영국은 민족의 고향이 유대 국가를 의미하지 않았다고 극구 부정했으나, 위원회는 밸포어 선언 당시에 유대 국가의 가능성이 열려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공표했다. ...


아랍인들이 못마땅해하면서도 유대인의 이주와 위임통치를 오랫동안 감내하고 있었던 것은 적어도 ‘유대 국가’는 없다는 공식적인 약속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제 15년의 세월이 흘러 유대 공동체가 아랍 사회를 실질적으로 위협할 만큼 성장하자 필 위원회는 갈등이 불가피하니 유대 국가를 만드는 정당성이 생겼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옴스비 고어(Ormsby Gore) 식민부장관은 한 발 더 나아가 분할안이 받아들여져 유대 국가가 건설되어야만 밸포어 선언의 의무가 종료된다고 말했다. 만약 대항쟁이 없었더라면 이는 유대 인구가 팔레스타인에서 다수가 된 후에 나왔을 것이고, 그때는 지금보다도 유대 국가에 배정될 영토가 넓어질 뿐만 아니라 어쩌면 팔레스타인 전체가 유대 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위원회가 제시한 분할안에서 유대 국가로 편성된 지역은 아랍인보다 유대 인구가 고작 1만 명 많았을 뿐이다.


1.3. 중동 최대의 저항운동이 남긴 명암


영국의 백서가 발표되자 아랍인들은 당연히 무장투쟁을 재개합니다. 영국도 이를 예상했기 때문에 즉시 탄압에 나섰습니다. 영국은 특히 지도부를 대거 잡아들이고 와해시켰습니다. 최고지도자 아민 후세이니는 가까스로 해외로 도망갔고 무장투쟁을 멀리서나마 지휘했으나, 당연히 영향력은 이전만 못했습니다. 무장투쟁은 2년 가까이 계속되는데, 지도부의 조율 없이 각각의 단체가 각자도생 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시온주의자들은 공공장소에서 대형폭탄을 터트려 남녀노소를 무차별 학살하는 테러를 처음으로 도입합니다.


유대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 7월 6일과 25일에 하이파의 시장에서 폭탄을 터트려 74명의 아랍인을 죽이고 129명을 부상 입혔다. 같은 달, 예루살렘에서도 세 차례의 폭탄 테러로 18명의 아랍인을 죽이고 60명을 다치게 했다. 지난 한 해 동안 아랍인들이 죽인 유대인이 32명이었는데 무려 그 세 배의 인명피해가 한 달 만에 발생했으니 얼마나 충격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을지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집트에서 [영국의] 지원군이 도착하고 대대적인 수색 작업을 벌였는데도 8월에는 무장투쟁이 최고조에 달하게 된다.


시온주의자들의 테러 못지않게 영국도 극악무했습니다.


일부 군인과 경찰들은 법으로 허용되지 않는 수준의 잔인한 처벌과 잔학행위를 자행해 무질서를 만들고 공포감을 조성했다. 흔하게는 마을이나 도심에서 무차별사격을 가해 행인들을 죽였다. 헤브론에서 살던 한 영국인 의사는 자신조차도 군인들과 조우하면 무작정 도망쳐야 했다고 일기에 남겼다. 아랍인을 체포하면 저항군의 사격이나 지뢰를 피하기 위해 차량과 기차에 매달아 인간방패로 사용하거나, 각종 무기로 폭행하고, 고환을 줄로 묶거나 머리털과 손톱을 뽑고, 전기충격 등의 고문을 가했다. 어느 군인은 막사로 끌려온 아랍인이 기둥에 묶인 채로 두 눈알이 모두 뽑혀 뺨과 입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장면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


가장 극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은 영국군과 [유대인] 하가나 대원이 함께 편성된 특수야간부대였다.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특수부대는 아랍인들을 사실상 맹목적으로 학살하며 공황을 불러일으켰다. 가령 성인 남성들을 줄 세운 뒤 숨겨둔 총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며 15번째 혹은 8번째 순번마다 죽이거나, 마을에 출입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혹은 마을 안에서 무작위로 총을 난사했다. 마을 내 모든 성인 남성들을 붙잡아 채찍질하거나, 기름을 부은 흙을 토할 때까지 먹이는 엽기적인 학대도 저질렀다.


영국은 무력으로 항쟁을 진압한 뒤 유대 국가를 갑자기 취소합니다. 아랍인들을 너무 많이 죽인 반성했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유럽에서 아랍인들의 구세주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바로 히틀러입니다. 독일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몰랐기 때문에 영국은 서둘러 아랍권의 불만을 잠재우려 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더 이상 위협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아랍권 전체에서 민심의 분노는 하늘을 찔러 대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백서를 발표해 10년 뒤에 팔레스타인을 독립시켜 주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만, 그때 가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영국이 임의로 기간을 늦출 수 있다는 단서를 삽입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습니다.


백서는 대항쟁이 거둔 승리라고 볼 수 있을까? ... 백서는 아랍인들의 저항 그 자체보다는 유럽에 임박한 전운이라는 상황적 요인에 크게 기인했다. 유럽의 문제가 해결되고 난 뒤에도 백서가 집행되리라고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따라서 아랍인들은 역사적 교훈을 살려 존재하지도 않는 영국의 신의 따위를 믿을 게 아니라 유럽이 어지러운 이때 무장투쟁을 반드시 계속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오랜 항쟁과 영국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아랍의 정치, 경제, 사회는 모두 크게 쇠퇴했고, 사회 내부적으로 반목이 극에 달했다. ...


세계 역사에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을지도 모를 반제국주의, 반식민주의 투쟁의 결말은 그야말로 비극적이었다. 1백만 팔레스타인인들들은 저항할 힘을 모두 잃었고 이것이야말로 영국이 시온주의자들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팔레스타인의 운명은 사실상 이때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기의 역사를 연구하며 제가 가장 중점적으로 본 것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영국의 유대 국가 정당화입니다. 위에서도 살짝 언급했지만,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만 해댑니다. 8년 동안 역사 연구하면서 가장 충격받은 부분입니다. "내가 이 사태를 만들었지만, 너희가 손해 보고 끝내면 문제가 해결되는 거니까 받아들여라"라는 말을 저리도 뻔뻔하게 말한다는 게 참... 믿기지가 않습니다. 책을 읽어보신 분들은 제 심정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하게 본 것은 대항쟁이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끼친 영향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시기에 아랍인들이 팔레스타인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장 우선시하는 팔레스타인 민족을 형성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항쟁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묘사되곤 하지만, 저는 부정적인 영향이 더 크다고 봅니다. 용기 있는 청년 수천 명이 학살당하고, 그 몇십 배 되는 주민들이 영국과 시온주의자들로부터 집단 처벌을 받아 너무나도 고생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이때 이후로 무장투쟁의 기력을 상실합니다. 1967년 이후 소수의 난민들이 무장투쟁을 외로이 했던 나날을 제외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이 민족으로서 다시 용감히 부활해 자유와 권리를 요구하게 되는 것은 무려 반 세기가 지난 1987년부터입니다.


마지막으로, 시온주의자들의 폭탄테러가 중요합니다. 이전의 소요와 대항쟁, 그리고 그 외 간간히 발생한 아랍인들의 유대인 살해/학살은 성인 남성으로 거의 한정되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의 공격으로 죽은 아랍인들도 몇몇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성인 남성이었고요. 그런데 1937년에 폭탄 테러를 도입한 이후로는 이 규칙이 깨집니다. 아랍인들도 뒤늦게 폭탄 테러를 사용했으나 성능이 좋지 않아 큰 규모의 피해는 입히지 못했습니다. 즉, 여전히 유대인 어린이나 여성의 사망률은 극히 낮았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에 들어서 하마스 등이 50년 전에 시온주의자들의 폭탄 테러와 비슷한 수준으로 인명 피해를 입히자 유대인들과 서방세계가 경악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이런 잔혹무도한 짓을 저지를 수 있냐고.... 참... 놀랍지요? 하아...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만 글을 줄입니다.


추신 : 6/27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이 단독이 아니라 2인 합동이라고 뒤늦게 안내 받았습니다. 다른 연사 한 분이 섭외가 늦어져 일단 저 혼자만 명단에 올려서 예약 신청을 받은 거라고 하네요. 저와 함께 강연을 하실 분은 우크라이나 전쟁 취재를 다녀오시고 책을 쓰신 JTBC 김민관 기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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