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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y 01. 2024

해제| 4장 3절 - 실패로 끝난 영국의 실험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통치와 관련해 세간에 잘못 알려진 사실 중에는 영국이 유대 국가의 건국을 위해 맹렬히 노력했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4장 1절에서 다룬 밸포어 선언을 발표한 이유에서 알 수 있듯이,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직접 통치하기 위해 시온주의를 구실로 사용했을 뿐, 유대 국가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직 소수의 관료들 기독교 메시아주의나 유대 국가가 장기적으로 가져올 국익을 높이 평가해 유대 국가를 지지했습니다.


상당수의 관료들은 아랍인들의 반대 때문에 밸포어 선언의 실행을 머뭇거렸습니다. 친시온주의 관료들은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시온주의가 가져올 경제적 이익이 거대하고 식민화가 성공하면 아랍인들이 만족해서 저항은 점차적으로 약해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받아들여졌고, 1923년에 로잔느 조약을 비준해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하기로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토착 주민의 권리를 보호하되 이방인을 위한 민족의 고향을 만들겠다는 이중약속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기만이었다. 영국은 소요를 겪으며 통치의 어려움을 다소나마 가늠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1923년에 결국 시온주의 정책을 강행하기로 한 데는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온주의자들이 항상 주장하는 것처럼 민족의 고향으로 경제가 발전한다면 민족적, 정치적 의식이 부족한 아랍인들은 충분히 만족하고 순응하리라 본 것이다. 기실 시온주의 정책은 바로 이 가설을 확인하는 실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923년부터 1929년까지 팔레스타인은 고요했습니다. 두 차례의 소요는 독립을 달성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영국으로부터 유대 국가는 계획에 없고 점진적 자치정부의 이행을 약속받았기 때문에 아랍인들은 언론 활동과 같은 평화적인 투쟁만 벌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식민화가 경제적 성공을 불러와 아랍인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이 안정적으로 진행됩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3.1. 폭풍전야의 실험


1923년부터 1929년 사이에 팔레스타인이 정치적 안정을 맞이한 중요한 까닭은 아랍인들의 내부 정치 투쟁이었습니다. 영국으로부터 신임을 얻어야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정치 구조 때문에 지도자들은 즉각적인 독립을 원하는 주민들의 불만을 통제하며 영국의 환심을 샀습니다. 또한, 시온주의에 대적하기보다는 상대 진영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데에만 관심을 쏟아부었습니다.


아랍 정치의 내부 투쟁은 시온주의자들에게 시의적절한 호기가 되었다. 1924년에 폴란드 정부는 물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경제적 규제를 강화했다. 그러자 많은 중산층 유대인들이 해외로 이주했다. 그런데 때마침 미국이 국적별로 이민 할당량을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폴란드 국적자의 연간 이주 인원은 31,146명에서 5,982명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갈 곳을 잃은 이주자 중 일부는 팔레스타인을 향했다. 1923년에 7,421명이던 이주자는 1924년에 12,856명으로 빠르게 증가했고, 1925년에는 33,801명까지 올라가 최고치를 기록했다. 대부분의 이주자는 텔아비브에 정착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이 유대인만의 도시는 1920년에도 고작 2천 명만 수용하고 있었지만, 5년 뒤에는 인구수가 4만 명으로 급증했다. 이런 놀라운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랍 지도자들은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다. ...


급격한 이주 증가는 사실상 처음부터 예고된 정책 실패였다. 처칠 백서는 ‘경제적 수용 능력’을 구체적으로 정의하지 않아 구멍을 만들었다. 1921년 6월부터 이주 법령은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큰 틀에서는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눠서 이주자를 심사했다. 첫 번째는 충분한 자산이나 수입이 있는 경우, 두 번째는 생계를 보장할 친인척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경우였다. 둘 중 하나에 해당하는 자는 건강과 인격에 문제가 없는 한 제한 없이 이주를 받아들였다. 즉, 생계수단만 확보되면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수용 능력과는 무관하다고 가정한 것이다. 따라서 부유한 사람이 이주를 희망하면 인구는 무한대로 증식이 가능했고 1924-26년의 이주자 중 31.3%가 그러했다.


오스만 시기와 영국강점기 시기의 이주자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부유층의 존재입니다. 유럽에서 박해를 피해 이주한 유대인들이 고려하는 제1 요소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지 여부였습니다. 오스만 시기에는 식민 활동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경제 활동이 제한적이었고 선택지가 많았던 부유층은 팔레스타인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스만 시기 30년 동안 시온주의자들의 재정은 그야말로 빈약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강점기에는 모든게 합법화되고 영국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생기자 부유층의 선호도가 높아지게 됩니다. 특히 미국을 비롯해 여러 유럽 국가들이 유대인 이주를 통제했기 때문에 때로는 팔레스타인이 유일한 선택지가 되었습니다.


부유층의 이주는 팔레스타인 유대 경제에 활력을 가져왔고 호황기를 이룩했습니다. 그러면 아랍인들은 낙수효과를 누렸을까요?


토지를 판 지주와 농민은 당연히 큰 이익을 보았고, 전반적으로도 유대 경제의 성장은 많은 아랍인에게 수입을 증대할 좋은 기회로 다가왔을 것이다.  ... 1920년대에는 상호 의존도가 높아서 유대인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일자리가 아랍인에게 많이 주어졌고, 생필품이나 자재 등의 판매도 늘어났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악영향을 끼치는 이유로도 작용했다. 동종 분야에서의 경쟁이 심화된 것이다. ... 역사학자 로저 오웬(Roger Owen)은 유대 경제의 영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유대인의 경제 활동이 어느 정도로 아랍 산업에 기회를 제공하고 동시에 상당한 장벽이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전자의 사례로는 담배나 밀가루와 같은 특정 아랍 생산품에 대한 유대인의 시장이 커진 것과 루텐베르그 컨세션(팔레스타인 전기 회사)을 들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상당히 더 많은 자본이 준비되고 잘 조직된 유대 산업과의 경쟁이 아랍 기업들의 핵심적인 진로를 막아버리거나 비누의 사례에서처럼 전통적인 시장의 좁은 한구석에서만 존재하게끔 만들어버렸다."


이러한 문제로 인해 유대 경제가 아랍 경제에 끼친 영향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그리고 그 수준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기는 어렵다. 하지만 유대 경제의 성장이 분쟁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말할 수는 있다. 순전히 경제적이고 단기적인 영역에서만 한정해서 보자면, 유대인의 이주는 아랍 경제 전반에 성장을 가져왔지만 그러한 긍정적인 영향은 크지 않거나 적어도 시온주의 문제가 야기한 정치, 사회적인 악영향을 덮을 만큼은 되지 못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소작농의 추방이다.


소작농의 추방은 오스만 시기부터 식민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식민촌이 하나 지어질 때마다 수백 명이 모여 사는 아랍 마을 여러 개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습니다. 추방당한 소작농의 일부는 식민촌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뿔뿔히 흩어지면서 마을 공동체가 붕괴했습니다. 상당수는 도시에서 막노동자로 일하며 판자촌에서 살았습니다. 이들이 시온주의자에게 품은 불만은 극심했고 훗날 1930년대에 무장투쟁이 시작되었을 때 선두에 서게 됩니다.


대부분의 시온주의자는 아랍인과의 진실한 평화를 꿈꾸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호황기에도 식민 활동은 유대인의 이익만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유대인의 돈은 오로지 유대인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신념은 매우 강력했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중반에 농촌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랍 아이들은 겨우 13.2%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아랍인들이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기 싫어해서가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모든 마을이 교육 시설이 부족하다고 불평한다.” 반면, 유대 사회는 해외의 지원과 이주자들이 가지고 온 자금 덕분에 자체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복지를 누렸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녔다. 그러므로 정부는 당연히 사각지대에 있는 아랍 아이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하는 게 옳지만, 그러지 않고 인구수에 따라 두 공동체에 균등하게 교육 예산을 책정하였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소득이 많은 자신들이 1인당 세금을 더 많이 내는데 정부가 똑같은 복지를 제공한다고 빈번히 불평했다.


시온주의자들도, 영국 정부도 아랍인들의 발전이나 권리 보호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유대 경제가 호황기를 누릴 때도 아랍인들의 불만을 삭힐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1926년 하반기부터 유대 경제가 불황에 들어서자 아랍 경제는 심각한 피해를 입습니다. 유대 경제 영역에서 일하던 많은 아랍인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영국 정부는 아랍인 실업자는 내버려두고 유대인 실업자들에게만 공공사업 일자리를 우선적으로 내주었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쌓이고 쌓여 결국 1929년에 폭발해버립니다.


3.2. 민족 분쟁의 분수령, 서쪽벽 소요


1929년의 소요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시온주의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유대인의 이주로 아랍 경제가 악화되고 소작농이 추방되자 사회적 반감을 확산시켰고, 이주와 토지 매입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자치정부에 대한 열망을 더욱 심화시켰다. ... 지도자들이 내부 권력 다툼에 빠져 이를 정치적로 해소해주지 못하는 사이 무슬림들은 민의를 표출할 다른 통로를 찾았다. 바로 서쪽벽에 대한 종교적 권리였다.


분량상 서쪽벽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핵심만 말하자면, 오스만 시기에 유대인들은 성전산의 서쪽벽(=이슬람 성지인 하람 알샤리프의 서쪽벽) 앞에서 기도드릴 공간을 허가받았고, 17세기부터 공동기도를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19세기 말부터 서쪽벽에 대한 더 큰 소유권을 행사하려 들자 무슬림들이 반발하게 됩니다. 그러한 갈등이 쌓이고 쌓여 1929년에 소요가 일어납니다.


불과 1주일 동안 133명의 유대인이 죽고 339명이 다쳤다. 아랍인들도 확인된 사망자 수만 해도 116명이나 되고, 부상자는 232명이었다. ...


서쪽벽 소요는 팔레스타인에서 아랍과 유대 두 민족의 경계를 두드러지게 만드는 분수령이 되었다. 아랍인들에게선 더 이상 폭력을 규탄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소요가 발생했을 때 무사 카짐과 아민, 라기브 등의 지도자들은 거리두기에 나섰으나, 영국군에 진압된 이후에도 대중의 열기가 가라앉질 않자 공동전선을 펼쳐 민중의 대변자로 나섰다. 아랍집행위는 가해자를 변론하고, 가족들을 위한 성금을 모금하고, 사형수를 의사로 기렸다. 사망자의 다수가 시온주의자들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애도는 없었다. 소요를 유대 공동체가 끼친 해악에 대한 정당한 저항의식의 발현으로 보기로 한 것이다. 영국이 유대 공동체를 시온주의자 기구의 기치 아래 하나로 통합시킨 부작용이었다.


소요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 영국은 쇼 위원회를 조직해 파견합니다.


쇼 위원회에 따르면, 성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분명 종교적으로 신실한 많은 무슬림을 충동하고 갈등을 키웠지만, 소요를 일으킨 동기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랍인들은 유대인에게 종속당하고 종국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쫓겨나게 되는 미래를 염려하고 있었다. 만석 기차에 새로운 사람이 올라타면 누군가는 내려야 하듯이, 이주가 계속되면 토지와 일자리를 잃고 고향을 떠나게 된다고 본 것이다. 이런 불안과 불만은 한계에 직면해 소요의 형태로 결국 폭발했고 서쪽벽은 “인종적 자부심과 야망의 상징”으로서 이를 점화한 계기에 불과했다. ... 즉, 소요의 근본적인 원인은 아랍인들의 “정치적, 민족적 열망의 좌절”과 “경제적 미래에 대한 불안”이 상호작용으로 낳은 “폭력적인 인종적 감정”이었다.


위원회는 구체적으로 유대 이주와 토지 갈등, 그리고 자치 권한에 대한 불만이 소요에 긴밀하게 영향을 끼쳤다고 보았다. 우선, 유대 인구는 현재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고 있었다. 만약 앞으로 연간 1만 5천 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이주해 온다면 1970년 이전에 아랍 인구를 초과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시온주의자 집행위의 의장 해리 자허(Harry Sacher)는 유대 이주에 어떤 제한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며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이 다수 인구가 되는 결과”를 소망한다고 솔직히 말했다.


이주가 계속되면 팔레스타인에서 추방당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도 토지 문제를 들여다보면 합당했다. 식민화는 에스드라엘론 평원과 해안가의 비옥한 토지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농민들로부터 사들인 땅은 거의 없고 90% 이상이 지주, 특히 부재지주들이 소작을 맡겨놓은 땅이 대부분이었다. ... 토지 문제는 경작 가능한 유휴지가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굉장히 심각했다. 위원회가 조사할 당시에 와디 엘 하와레스 지역에서는 소작농들이 터전을 잃고 갈 곳이 없어 전전하고 있었다. 유대민족기금이 부재지주로부터 3만 두넘의 토지를 매입한 후 1,200명의 소작농과 그 가족들까지 도합 6천 명에게 1929년 10월 1일까지 나가라고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자치권을 요구하는 정치적 열망 역시 소요를 일으키는 데 영향을 끼쳤다. ... 위원회가 보기에도 “절대다수의 민족은 정부와 소통할 수 있는 공인된 채널이 없는 반면 다른 소수 인종은 정부와 긴밀하고 공식적인 관계를 가지고 자기 이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작금의 상황은 아랍인들이 자치권을 요구할 동기가 충분하다고 할만했다. ...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쇼 위원회는 앞선 두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밸포어 선언과 이에 근거한 시온주의 정책으로 갈등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 그러나 앞선 두 위원회가 시온주의자들의 태도를 날카롭게 비판한 반면, 쇼 위원회는 영국의 모호한 정책이 그런 빌미를 주고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했다는 차이가 있었다. 야파 소요 이후로 충분히 정책을 개선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는데도 더 심각한 유혈사태가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영국의 잘못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는 시온주의자들의 행동이 개선되길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영국 스스로 비유대 인구의 권리를 보호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로잡아야 했다. 문제는 과연 그런 의지가 영국에 있느냐였다.


3.3. 유대 이주에 제동을 걸다.


쇼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에서 더 이상 유대인의 식민 활동을 받아들일 토지가 없고, 이 때문에 농촌이 심각한 붕괴 위협에 처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영국은 홉-심슨 위원회를 파견해 이주자를 수용할 추가적인 토지가 있는지를 조사하였고, 위원회는 매우 부정적인 의견을 내놓습니다.


유대인 소유지가 아닌 모든 경작지를 아랍 농민들이 균등하게 나눠가진다고 가정해도 5.5인으로 구성된 한 가구당 91.9두넘만을 가질 수 있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농업으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130두넘이 필요한데 이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위원회는 104개의 표본 마을에서 살고 있는 23,537가구(약 13만 명, 농촌 인구의 27%)의 경제 실태에 대한 연구 결과를 인용해 농촌의 실정을 보다 자세히 설명했다. 표본 마을에서 토지를 소유한 가구는 총 16,633가구(70.6%)이며, 그중 11,156가구(47.4%)는 120두넘 이하를 가지고 있어 농사만으로는 수입이 부족했다. 그래서 단 한 가구도 예외 없이 농사와 병행할 수 있는 다른 일자리를 구했다. 120두넘 이상 240두넘 이하를 소유한 3,251가구(13.8%) 중에서도 절반 이상은 추가적인 생계수단을 찾았다. 토지가 전혀 없는 6,940가구(29.5%)는 마을 안팎에서 노동을 했는데, 상당수가 농사를 짓다가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었다.


위원회는 확인 가능한 모든 정보가 아랍 농민들이 “극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한다.403) 표본 마을에서 가구당 평균 토지 소유 면적은 75두넘인데 여기서 거둔 연평균 수입은 48팔레스타인 파운드(£P, 이하 파운드)였다. 이중 생산비로 16.5파운드, 세금으로 5.1파운드를 지불하고 남는 순소득은 26.4파운드다. 만약 소작농이라면 소작료(30%)도 내야 해서 15파운드만 수중에 남는다. 그런데 6인 가구의 생활비가 26파운드니 사실상 농사만 지어서는 생계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다. ... 조사 결과 가구당 평균 27파운드의 빚이 있었고, 대출 이자(30%)로만 8파운드 이상을 갚아야 해서 생계는 해가 갈수록 악화되는 실정이었다.


위원회는 현재 경작 가능한 유휴지가 없기 때문에 이주를 일시적으로 크게 제한하고, 관개지 확장과 경작법 개선 등으로 농촌의 개발을 도모할 것을 권고합니다.


내각은 위원회의 권고안을 대체로 수용했다. 앞으로 5년간 토지 판매를 규제하고, 이주자는 유대인들이 이미 매입한 토지에서 수용 가능한 인원으로 제한하기로 했다. 토지가 없는 아랍 농민은 시온주의 정책으로 추방당한 경우에 한해 영국의 국고를 보태서라도 지원해 주기로 했다. 또한, 1922년의 의회안을 부활시키기로 했다. 이러한 결정은 시온주의 정책을 취소하지는 않지만 완급을 상당히 조절했고, 실질적으로 처칠 백서의 노선에 제동을 건 것과 다름없었다. 10월에 식민부장관 패스필드는 새로운 백서를 발표해 정책의 변경을 알렸다. ...


엄밀히 말해서 패스필드 백서는 처칠 백서의 원칙을 재확인하고 실행으로 옮기겠다는 선언에 불과했다. 자치권을 조금이라도 개선한 것도 아니고 민족의 고향을 취소하지도 않았다. 단지 경제적 수용 능력이 포화상태에 달하는 ‘상황적 변화’가 확인되었으니 식민화의 속도를 늦추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처칠 백서와 패스필드 백서는 글로 드러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전자는 유대인이 다수 인구가 될 때까지 이주를 계속해도 될 정도로 경제적 수용력이 충분히 크다고 가정한 반면, 후자는 이를 부정했기 때문에 가까운 미래에 이주가 중단될 것을 간접적으로 예고했다.


이때 영국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고 맙니다. 시온주의자들이 거세게 항하자 4개월만에 백서를 사실상 취소해버린 것입니다. 이로써 아랍인들은 영국이 시온주의를 멈춰줄 거라는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게 됩니다.


팔레스타인의 1920년대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실험 기간이었다. 실험 주제는 정치적, 민족적 의식이 미약한 아랍인들을 식민화의 경제적 성장으로 만족시킬 수 있는가였다. 기대와는 달리 시온주의자들을 이용한 대리 식민주의는 아랍인의 불만을 완화시키지 못했고, 쇼 위원회와 홉 심슨 위원회는 식민화를 계속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렸다. 패스필드 백서는 실험의 종료를 선고했다. 이대로 시온주의 정책에 제동이 걸렸다면 팔레스타인은 오늘날과 같은 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온주의자들의 정치적, 외교적 압박에 영국은 굴복했고, 맥도날드 서한을 통해 시온주의 정책의 재개를 선언했다. 이상 실험은 없었다. 이제는 기정사실이 된 아랍인들의 거센 저항을 막아내야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제4장의 결말에서는 영국의 잘못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비판하였습니다. 영국이나 학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하고 비뚤어지게 묘사해서 두둔하는지도 적나라하게 보여드렸고요. 한번쯤은 꼭 읽어봐주셨으면 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는 딱 한 가지 쟁점만 짚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영국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시온주의는 비약적으로 성장합니다. 폭력으로부터 상당히 잘 보호받았고, 토지나 이주에 대한 규제가 사실상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친이스라엘계에서는 영국이 아랍인들의 편에 서서 시온주의를 탄압했고, 유대인들은 그런 와중에도 힘겹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말합니다. 대체 어떤 이유에서일까요?


친이스라엘계가 내놓는 근거는 이렇습니다. 오스만 시기부터 사실상의 소유권을 인정받고 수십 수백년간 아랍인들이 경작 중인 국유지를 유대인에게 내놓지 않았고, 무제한적 이주를 허용하지 않았고, 소요와 연관된 아랍인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았고, 세금의 상당수를 영국을 위해, 그리고 일부는 아랍인을 위해 썼다는 점 등입니다.


즉, 친이스라엘계는 아랍인들에게 어떠한 조그마한 권리도 있다고 상정하지 않고, 오로지 시온주의자들의 희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일은 그릇되었다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토착민인 아랍인들이 가진 권리가 시온주의자보다 크면 크지 적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밸포어 선언은 분명 토착민의 시민적, 종교적 권리의 보호를 약속했고, 소요를 조사한 세 위원회는 이 점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온주의자들은 토착민의 권리는 기껏해야 부차적인 거고 민족의 고향만이 밸포어 선언의 주된 목적이기 때문에 이에 위배되는 모든 것은 무시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오늘날까지도 친이스라엘계는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영국은 이를 어떻게 보았을까요? 홉-심슨 위원회의 보고서 이후 발표된 1930년의 백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백서는 비유대 인구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민족의 고향이 건설되어야 한다는 원칙과, 경제적 수용 능력에 따른 이주, 유대인 기구의 권한을 조언자 역할로 제한한다는 처칠 백서와 헌장의 원칙이 그동안 충실하게 집행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리고 헌장에서 중요한 것은 유대 민족의 고향이며 비유대 인구의 권리 보호는 부차적인 것이라는 시온주의자들의 해석은 “완전히 잘못”된 것으로 부정했다. 두 의무는 동등한 무게를 지니며, 양립 불가능한 것이 아니지만 이를 실행하는 것은 “어렵고 까다로운 과업”이었다.


적어도 이때까지 영국은 형식적으로나마 공정한 통치자 혹은 중재자로서의 모양새는 갖추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제기된 시온주의자들의 항의에 굴복해 백서를 뒤엎으면서 이를 포기했기 때문에 아랍인들이 무장투쟁, 즉 '테러'에 나서게 됩니다.


아랍인들은 이제 남은 수단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에 공감대를 이루게 된다. 즉, 힘으로 빼앗긴 권리는 힘으로만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적이고 온건한 방법으로는 식민주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할 때 폭력의 사용은 정당화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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