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글자수 제한으로 제목이 조금 잘렸네요. <5장 2절 : 잘못은 유럽이 하고 책임은 아랍이 지다>는 분쟁의 역사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 국가라는 진정한 목표를 밝히고 이를 위해 테러로 투쟁하고, 유럽 국가들은 홀로코스트를 방관해 놓고선 갑자기 유대인들을 위한답시고 유대 국가를 세우기로 결의하고, 이에 힘입어 시온주의자들은 숙원이었던 인종청소를 자행합니다. 지금 이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분쟁의 역사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사실상 행위자로서 존재하지 않고 객체(NPC)로 전락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한 가지 매우 놀랍고 흥미로운 사실은 팔레스타인 문제가 언제나 유럽을 중심으로 흘러왔다는 점이다. 시온주의가 시작된 것은 유럽인들의 박해와 유럽식 민족주의 때문이었고, 이를 지지하는 이들도 유럽 유대인과 유럽 기독교도들이었다. 1914년에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팔레스타인과 다른 아랍 지역에 독립을 약속해 아랍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한편 유대 민족의 고향을 약속해 시온주의자들에게 힘을 실어준 것도 역시 유럽 국가인 영국이었다. 전후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지역으로 만든 것도 국제연맹이란 껍데기를 쓴 유럽의 열강들이었고, 시온주의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정부가 아닌 런던의 정부였다.
일련의 과정에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이 영향력을 끼치거나 일구어낸 성과는 미미했다. 즉, 팔레스타인은 적어도 정치적 관점에서는 ‘버려진 땅’으로 간주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36-39년의 대항쟁으로 아랍인들이 저항할 힘을 소진해 버리자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유럽인들의 구상에서 토착민의 존재는 더욱더 흐려지고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새로운 변수가 정치적 의제를 장악한다.
2차 대전도, 홀로코스트도 아랍인들과는 무관합니다. 그런데 5장 1절에서 보셨듯이 영국은 2차 대전을 준비한답시고 갑자기 팔레스타인의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이를 취소합니다. 유엔총회에서 국제사회는 홀로코스트로 유대인들이 피해를 입었으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를 허용하고 유대 국가를 만들어주기로 합니다. 참으로 어이가 없지요. 누가 봐도 불합리하다보니 일부 친이스라엘 학자들은 홀로코스트와 이스라엘의 탄생이 무관하다고 주장하는데, 정말로 무관한지 확인해 보지요.
2.1. 사라진 팔레스타인인들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부터 시작된 2차 대전은 팔레스타인의 정치를 외부에 완전히 종속시켰다. 맥도날드 백서 이후 시온주의자들은 대영 투쟁을 결심했으나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영국에 협력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벤구리온은 “백서가 없는 것처럼 영국군을 지원해야 하고, 전쟁이 없는 것처럼 백서에 투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후자는 불법이주자 조직에 그쳤고 실제로는 전자에 집중했다. 폭탄 테러로 이미 영국과 피를 보고 있던 수정주의자들 역시 투쟁을 멈추기로 약속했다. 1차 대전이 밸포어 선언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을 누구도 잊지 않았다.
시온주의자들은 유대인 군단을 창설하고 전공을 세울 기회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러나 아랍권의 반발을 의식한 영국은 미적거렸고, 시온주의자들은 다른 협력자를 모색합니다. 이게 결과적으로 '신의 한 수'가 됩니다.
영국의 소극적인 태도를 보고 실망한 시온주의자들은 새로운 후원자를 찾았다. 바로 전후에 국제적 발언권이 강력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미국이었다. 1942년 5월, 벤구리온과 바이츠만 등의 시온주의자들은 뉴욕의 빌트모어 호텔에 모여서 전쟁이 끝나면 “팔레스타인에 새로운 민주주의 세계 구조에 통합된 유대 영연방국가가 건설돼야 한다.”는 빌트모어 강령을 결의했다. 1897년에 바젤에서 헤르쯜과 초기 시온주의자들이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던 유대 국가라는 목표를 드디어 천명하고, 필 위원회의 제안 이후로 끊임없이 논의되던 분할에 반대하고 팔레스타인 전체에서의 국가 수립 노선으로 공식적으로 복귀한 것이다.
홀로코스트가 알려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습니다. 유대인들이 상당한 규모로 학살당하고 있다는 소식에 시온주의자들은 슬퍼하면서도 기뻐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의 필요성을 입증해 주리라고 믿은 겁니다. 그런데 살상 규모가 너무나도 커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킬 유대인이 남아 있지 않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그제야 깜짝 놀라 유대인을 구출하자고 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독일이 그동안 자국과 점령지에서 유대인을 대규모로 학살해 왔다는 놀라운 소식이 세상에 알려진다. 영국을 포함한 각국의 정부는 이를 일찍부터 알았지만 대중에 공개하지 않고 비밀로 부쳤다.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전력을 낭비하거나 유대인을 위한 전쟁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서 분란이 생기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독일과 몸값을 협상해서 구해달라는 요청도 전쟁자금으로 쓰이게 될까 봐 거부했다. 유대인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세져서 아랍권의 반감을 사는 것도 우려스러웠다. 그러나 진실을 언제까지고 계속 감출 수는 없었다. ...
학살에 대한 증거와 정보가 널리 퍼지자 연합국은 어쩔 수 없이 1942년 12월 17일에 히틀러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책으로 추방이 아닌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있다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제야 시온주의자들도 화들짝 놀라서 각국 정부의 대응을 호소했다.
영국과 미국 등 연합국이 홀로코스트 정보를 은폐한 것은 학자들에 의해서 상세히 밝혀졌고, 당시에도 상당한 의심을 샀습니다. 이는 결국 전후에 유대인들에게 무언가를 해주는 제스처를 취해야 할 필요성을 높였을 겁니다.
한편, 전쟁이 유리해지자 영국 총리 처칠은 독립을 취소하고 유대 국가를 만드는 계획을 세웁니다. 1943년 1월에 내각은 이에 동의했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에 일부 시온주의자들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대영 투쟁을 전격적으로 재개했고, 처칠의 친구이자 고위관료인 모인을 암살합니다. 처칠은 분개했고 유대 국가안을 곧장 취소했습니다. 영국에 있어서 팔레스타인의 독립이나 유대 국가 같은 건 결국 이토록 보잘것없는 사안에 불과했던 것이죠.
이로써 영국과 시온주의자들 간의 긴밀한 협력 관계는 사실상 종지부를 찍게 된다. 비록 주류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환심을 되찾고자 독일이 항복하는 1945년 5월까지 유대인 간의 동족살해를 계속했지만, 벤구리온은 배후에서 이르군과 레히와 협력전선을 구축해 영국에 칼을 들이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시온주의자들이 영국을 대적하기로 결심한 가장 중요한 배경은 유대 국가를 서둘러 건설하려는 조바심이나 영국의 태도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판단 따위가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이 간과하는 듯하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의 정치적 실종이야말로 진짜 이유였다. 만약 아랍인들이 대항쟁 이전처럼 커다란 위협으로 남아 있었다면 침략자인 영국과 시온주의자들은 어쩔 수 없이 불편한 동맹을 이어가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착민의 저항이 무력화되었기 때문에 양자의 이해를 연결해 줄 고리는 사라졌고 남은 것은 팔레스타인의 지배자를 가릴 힘겨루기뿐이었다.
2.2. 유엔총회에서 유대 국가가 승인된 이유
1944년 10월에 시리아, 트랜스요르단, 이라크, 레바논, 이집트 5개국 대표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아랍연맹(Arab League)을 만들기로 합의하고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특별한 결의를 남겼는데, 아랍인들이 당시 상황을 어떻게 느꼈는지를 알 수 있다. “유럽의 독재 국가들에 의해 유럽의 유대인에게 가해진 고통에 누구보다도 슬픔을 느낀다. 그러나 이 유대인들의 문제가 시온주의와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게 부정의한 짓을 해서 유럽 유대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보다 더 큰 부정의하고 폭력적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이 자명한 사실은 안타깝게도 조금도 존중받지 못했다. 땅의 권리가 토착민에게 있다는 당연한 원칙이 유럽 밖에서는 적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유럽인들의 철칙 때문이었다. 애당초 토착민의 권리나 정의가 유럽인들로부터 존중의 대상으로 간주되었더라면 시온주의도, 위임통치라는 강제지배도 없었을 것이다.
독일의 항복 직후부터 시온주의자들은 10만 명의 유대인을 즉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영국은 아랍권의 반발을 우려해 거절했으나 미국이 강력하게 지지하고 나섭니다. 전쟁으로 국력이 쇠퇴하고 미국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진 영국은 미국의 심기를 거스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합동조사위원회를 설립해 같이 조사도 해봤다가, 좋은 결론이 안 나자 1947년에 최종적으로 유엔에 공을 넘깁니다.
이 과정에서 시온주의자들의 테러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유대인 테러리스트를 아랍인처럼 학살했다가는 정치적 후폭풍이 휘말릴 게 뻔했기 때문에 영국은 사실상 진압을 포기했고 그래서 시온주의자들의 테러는 나날이 과감해졌습니다. 특히 1946년 7월에는 정부 청사로 이용하고 있던 킹 데이비드 호텔의 별관을 폭파시켜 91명을 죽였습니다. 그중에는 유대인도 17명이나 있었으나, 시온주의자들은 필요한 희생으로 간주했습니다.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낳은 이 폭탄 테러는 극단주의 단체가 단독으로 실행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세월이 흘러 내부 문서가 공개되자 이스라엘 학자들은 주류 시온주의자들이 함께 작전을 세웠던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유엔은 열강과 아랍 국가를 제외한 11개국이 참여하는 유엔특별조사위원회(UNSCOP)를 만들어 해법을 강구합니다. 자세한 내용을 여기서 모두 다루기는 어렵고, 몇 가지 쟁점만 언급하겠습니다.
아랍인들의 의견이 하나로 통합된 반면, 팔레스타인과 해외 유대 공동체의 의견은 분화되어 있었다. 일부는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원했고, 일부는 팔레스타인을 분할하되 충분히 넓은 영토를 지닌 유대 국가를 주장했다. 유대 국가 자체에 반대하는 소수 의견도 있었다. 팔레스타인 내 사회주의 단체와 공산당은 민주적이고 평등한 두 민족 국가나 연방제를 주장했고, 미국의 유대교 의회는 유대 국가가 팔레스타인 내외의 평화와 안보에 위협을 일으키고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렇지만,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를 대변하는 공식 정치기관이자 다수의 지지를 받는 유대인 기구의 입장은 팔레스타인 전체를 유대 국가로 만드는 것이었다. ...
위원회는 밸포어 선언과 헌장이 팔레스타인에서 유대 인구가 다수가 되고 유대 국가를 건국할 기회를 부여했다는 시온주의자들의 해석에 동의했다. 하지만 제4장에서 살펴봤듯이 영국 정부는 1922년 6월에 처칠 백서를 발표해 유대 국가를 공식적으로 부정했고 국제연맹이 헌장을 승인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만이었다. 당연히 헌장에 기재된 민족의 고향 역시 유대 국가를 부정하는 것으로 읽을 수밖에 없다.
민족의 고향이 국가로 발전할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로이드 조지나 밸포어 등 소수의 공직자들이 내각이나 국민의 동의 없이 시온주의자들과 밀실에서 나눈 이야기였고, 헌장이 채택된 지 15년이나 지나서 필 위원회에 의해서 공개되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위원회는 아무런 정당성도 없고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도 않은 암중의 기만적인 의도를 반영해 위임통치헌장을 읽는 게 올바르다고 지지했다. ...
위원회는 유럽의 유대 실향민 문제도 고려했다. 유럽에는 아직까지 많은 실향민들이 열악한 처지에 있었고, 25만 명의 유대인은 수용소에서 살고 있었다. 유럽의 유대인 문제를 팔레스타인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지만, 많은 실향민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오길 희망한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일부 위원들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유대인 수용소를 찾아가 100명의 실향민을 인터뷰했고 그곳에 있는 “사실상 거의 모든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으로 가기를 희망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게다가 다른 나라에서 이주를 허용하더라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거나 불법 이주를 해서라도 가겠다고 말할 정도로 단호한 의사를 지닌 이들의 수가 무려 75-80%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실향민들은 그곳이 “우리 땅”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여기에는 홀로코스트의 기억과 같은 자발적 요인 외에도 “의심할 여지없는 선전의 요소"가 개입되어 있었다. 수용소에서 여러 시온주의 단체들이 시온주의 사상을 가르치고, “팔레스타인 – 유대 민족을 위한 유대 국가”라 적힌 포스터나 팔레스타인의 국경보다 넓은 지역에 이주해 오는 유대인들의 그림이 그려진 포스터를 붙여 놓고 있었던 것이다. 위원회가 예를 든 39세 폴란드 유대인과의 질의응답은 자발적 요인과 의도적인 사상 주입이 상호작용하고 있는 것을 잘 보여준다.
질문 : 폴란드로 돌아가고 싶은가요?
대답 : 아니요. 아버지와 형제자매들이 모두 거기서 살해당했습니다. 반유대주의도 심해지고 있고, 포그롬도 빈번해질 거예요.
질문 : 다른 나라로 이주하고 싶습니까?
대답 : 네. 그러나 오직 우리 땅인 팔레스타인으로 만요.
질문 : 왜 그런가요?
대답 : 수용소에 있었을 때 오직 우리 땅인 팔레스타인에 내 미래가 있다고 깨달았어요. 그리고 그게 내가 살아남고 싶었던 이유였어요. 그 외에 내 삶은 의미가 없었죠. 내가 팔레스타인에 갈 수 없다면 죽어버렸을 거예요.
질문 : 전쟁 이전에 팔레스타인 이주를 신청한 적이 있나요?
대답 : 아니요.
질문 : 전쟁 이전에 팔레스타인을 우리 땅이라고 생각했나요?
대답 : 나는 자유롭고 (경제적으로) 잘 살 수 있는 곳에서 살 거라고 항상 생각해 왔어요.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깨달았죠. 팔레스타인 외에는 어떤 곳에서도 그게 가능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요.
위원회는 이들이 생각을 바꿀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잘 모르고 있었고 아랍인과의 불화 없이 평화롭게 협력하며 사는 곳으로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정치사회의 현실을 알게 된다면 선호도가 낮아질 게 틀림없었다. 또한, 실향민에 대한 지원이 시작되어도 이주 희망자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지만 위원회는 시온주의자들이 선량하고 가여운 실향민을 속이려 들지 말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리거나, 박해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이 있거나 방조한 유럽 국가들과 미국이 실향민을 서둘러서 지원해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이들의 부정의한 행동이 야기하는 모든 책임과 의무는 아랍인들이 짊어지는 게 마땅하다고 보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결국 위원회는 팔레스타인의 60%에서 유대 국가를 만드는 분할안을 다수의견으로 제출했고, 유엔총회는 미국과 소련의 입김으로 이를 수락합니다. 다만, 아랍권의 반발을 의식해 유대 영토를 55%로 줄였습니다. 아래 지도에서 초록이 아랍 국가 영토, 파란색이 유대 국가, 빨간색이 국제사회가 관리하는 예루살렘시입니다.
2.3. 인종청소와 나크바
시온주의는 단순히 국가를 건설하는 사상이 아니었다. 영국이 영국적인 만큼 유대적인 ‘유대’ 국가가 목표였다. 아랍 인구를 제거하는 것은 1880년대에 팔레스타인에 첫발을 디딜 때부터 많은 시온주의자들이 고민해 온 주제였다. 그러나 마땅히 실현 가능한 방법이 없고 또한 국가의 기반이 될 인구를 유럽에서 데려오고 식민촌을 건설해야 한다는 당면한 목표에 주력하느라 간헐적으로만 논의했고, 반드시 필요한 것인지도 어느 정도는 논쟁의 여지를 열어 두었다.
그러다 1937년에 필 위원회가 강제 이주를 입에 올린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유대 국가가 눈앞에서 아른거리자 시온주의 지도부는 자발적으로든 군사력을 동원한 강제적인 방법으로든 추방은 반드시 필요하다는데 합의를 이루었고 내부적으로 빈번히 논의했다. 1947년의 유엔의 분할안은 쐐기를 박았다. 유대인들에게 광활한 영토를 넘겨주다 보니 비등한 수의 아랍인이 유대 국가에 포함되어 ‘유대’ 국가로서의 정체성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명분과 수단이었는데 팔레스타인 전쟁은 이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유엔총회에서 유대 국가를 세우기로 결정이 나자 아랍인들은 당연히 시위를 일으켰고, 유대인 상점가를 습격하고 약탈했습니다. 시온주의자들은 즉각 총기와 폭탄 테러로 '보복'했습니다. 아랍 지도부는 1936-39년 대항쟁 때 이미 거의 와해된 상태였기 때문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와중에 시온주의자들은 마을을 하나둘씩 파괴해서 주민들이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게끔 만들었습니다. 이게 잘 먹히자 4월부터 '달레트 군사작전'을 실시해 전격적으로 마을 파괴에 나섭니다.
홀로코스트가 사람을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 땅에서 비유대인을 제거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즉, 죽여도 되지만 추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대량살상은 국제사회의 제재를 촉구할 게 뻔했기 때문에 마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국경 밖으로 끌고가 쫓아냈습니다. 다만,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학살도 저지르곤 했습니다.
국제사회가 손을 놓은 사이 벤구리온은 4월 첫째 날부터 달레트 계획을 실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데이르 야신(Deir Yassin)은 가장 먼저 공격당한 마을 중 하나였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5km 정도 떨어진 이곳 주민들은 이전부터 식민촌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분할안 채택 이후에는 하가나와 불가침협정까지 맺었다. 그런데도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작전 대상에 포함되었다. 하가나는 협정을 위반했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눈 속임용으로 청부살인을 지시했다.
4월 9일 새벽, 하가나로부터 무장과 엄호사격을 지원받는 이르군과 레히의 대원들이 마을을 습격해 수십 명을 사살했다. 이후 살아남은 주민들을 한 곳에 끌어모은 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학살했는데 그 수가 무려 170-193명에 달했다. 그중 30명은 심지어 아기였다. 당시 가까스로 살아남은 12살짜리 아이는 경찰에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유대인들이 우리 가족에게 벽에 기대서 일렬로 줄을 서라고 명령한 다음에 총을 쏘았어요. 전 옆구리에 맞았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부모님 뒤에 숨어 있던 덕분에 살았어요. (4살짜리) 여동생 카드리는 머리에 총을 맞았고, (8살) 여동생 사메는 뺨에, (7살) 남동생 무함마드는 가슴에 맞았어요. 그렇지만 벽에 기대고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죽었어요. 아빠랑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 그리고 조카들도요."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하가나의 팔마흐 대원은 학살을 자행한 뒤 25명가량의 남자들을 포로로 잡아 화물트럭에 싣고 예루살렘 거리를 돌아다니며 개선 행진을 벌인 뒤 사살했다고 보고했다. 학살이 벌어진 직후 데이르 야신에 도착한 하가나의 정보장교는 “그렇게 많은 시체는 이전까지 본 적이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 150여 구가량의 시체를 본 것 같다고 증언했다.
사건 다음날 현장을 조사한 작전장교는 집에서 사살당한 여성과 아이들의 시체를 보았고, “나는 많은 전쟁을 경험했지만 데이르 야신의 광경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었고 그래서 그날의 일을 잊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매장지를 감독한 청년부대 지휘관은 “전적으로 야만적이었다. 몇몇을 제외하면 모든 사망자가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였다. 우리가 본 시신은 모두 부당한 희생자였고 누구도 손에 무기를 쥐고 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생존자들을 심문한 영국 관리는 학살과 더불어 강간과 약탈도 있었다고 보고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유대인들에 의해서 많은 성적 잔학행위가 자행되었다. 많은 여학생이 강간당한 뒤에 도륙당했다. 나이 든 여성들 역시 희롱당했다. 한 어린 소녀는 말 그대로 두 쪽으로 몸이 갈라졌다. 많은 영유아도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 여성들은 팔과 손에 차고 있던 팔찌와 반지를 뺏기고, 귀걸이를 빼내다 귀가 잘린 여성들도 있었다."
데이르 야신의 학살의 소식은 팔레스타인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많은 주민들이 피란길에 올랐습니다. 4월 말까지 200여 개의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고 25-30만 명의 주민이 난민이 됩니다. 아랍권에서 분노의 목소리가 치솟았고 아랍 국가들은 마침내 구원군을 파견하기로 합니다. 5월 14일에 이스라엘이 건국되고 이날을 끝으로 영국이 공식적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통치를 종료하게 되자, 바로 그다음 날에 아랍 국대가 국경을 넘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게 바로 제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전쟁에서 아랍 국가들은 패배했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땅의 78%를 차지합니다. 나머지 22%가 바로 오늘날의 서안과 가자지구입니다.
이스라엘 정부와 친이스라엘사관은 아랍인들에게 평화롭게 살자고 제안했는데 이들이 거절하고 아랍 국가의 명령에 따라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었기 때문에 난민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인종청소를 인정하지만,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했고 멸망시키려 했기 때문에 안보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선택이라고 두둔합니다. 그러나 보시다시피 전쟁 이전에 200개 이상의 마을이 파괴되고 30만 명이 난민읻 되었습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기록으로도 생생히 남아 있으나, 오늘날 유대인들 중에 이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지난 역사를 복기해 볼까요. 아. 그런데 힘드네요. 감정이 복받쳐 올라서 더 못 적겠습니다. 5장의 결말(선택하지 않은 선택)의 핵심내용으로 갈음하겠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를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방법은 있다. 그리고 간단하다. 피해자인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참으라고 말하지 말고 가해자인 이스라엘에게 식민 지배를 끝내라고 정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지금까지 받고 있다면 무장투쟁을 멈췄을 것인가? 시온주의자들을 마주한 188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한 세기가 넘게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단 한 번도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자신들의 고향에서 유대 국가를 세우겠다는데 그걸 동의할지 거부할지가 선택의 문제일까?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이 강제적으로 지배한다고 해서 고향을 포기한다는 선택지가 생겨났을까? 유엔에서 유대 국가를 만들겠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따를지 말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이스라엘이 서안과 가자지구마저도 강제로 점령하고 식민 지배로 옥죈다고 해서 투쟁을 멈춰야 하는 것일까? 세상의 그 어떤 민족이나 집단도 이 같은 상황에 부닥쳤을 때 팔레스타인인과 다른 ‘선택’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팔레스타인인들은 지난 한 세기 넘게 외길을 걸어왔을 뿐 스스로 현재를 ‘선택’한 적이 없다.
반면, 이스라엘의 오늘은 시온주의자들의 선택으로 만들어졌다. 시온주의가 목표로 삼은 대의는 유럽 유대인의 구원과 민족 문화의 발전이었고 유대 국가는 이를 위한 과정이자 수단이었다. 분명 민족 국가의 건설은 이를 가능케 할 수 있지만 ‘유일한’ 방법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반유대주의를 없애기 위해 모국에 충실하자고 주장했고, 실제로 그렇게 해서 시민으로 받아들여졌다.
오늘날 유럽에서 반유대주의는 사실상 종식되었다. 차별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과거와 같은 학살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고 무슬림이나 아랍인, 흑인, 아시아인 등에 대한 편견보다는 덜하다. 이는 이스라엘의 건국으로 달성한 업적이 아니라 홀로코스트 이후 기독교권의 역사적 반성과 성찰이 있었던 덕분이다. 유대 문화의 발전 역시 민족 국가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법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인정받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에서나 가능했고 미국을 포함해 여러 나라의 유대 공동체는 과거에도 지금도 유대 문화를 발전시키고 있다. 이스라엘은 분명 유대 문화의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지만 필수조건은 아니었다.
19세기 말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사라지도록 맞서 싸울 것인지 아니면 이에 편승해 유대 국가를 건국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다수는 전자를, 시온주의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버려진 땅이라고 상상했던 팔레스타인에 아랍인들이 오래전부터 정착해서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미국이나 다른 땅을 찾을지 아니면 아랍인들로부터 땅을 빼앗을지를 논의했고 시온주의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아랍인들이 자신들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저항할 뜻을 밝혔을 때 시온주의자들은 솔직하게 고백하고 평화적인 해결책을 함께 논의할 것인지 아니면 거짓으로 일관하고 기만할 것인지를 놓고 또 후자를 택했다. 그래도 아랍인들이 속지 않자 유대 국가를 포기하고 토착민과 평화롭게 지낼 것인지 아니면 식민화를 점진적으로 확대하고 유럽 열강의 도움을 받아 강제로 지배할 기회를 노릴 것인지를 고민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이번에도 후자를 택했다.
민족의 고향을 약속한 영국의 강제 지배가 시작되고 아랍인들이 소요를 일으켰을 때 시온주의자들은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늘 하던 거짓말을 진실로 만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고 식민화를 계속하며 기회를 노렸다. 결국 참지 못한 아랍인들이 대항쟁을 일으키자 시온주의자들은 평화보다는 맞서 싸우기를 택했다. 영국이 2차 대전을 앞두고 시온주의 정책을 중단하기로 했을 때도 유대 국가를 포기하기보다는 테러를 일으켜 영국인과 아랍인들을 죽이기로 선택했다. 유엔총회에서 분할안을 표결할 때는 회원국의 자유로운 투표에 맞기지 않고 미국을 조종해 다른 회원국들을 강압적으로 굴복시켰다.
그 결과로 내전이 발발하자 미국이 제안한 신탁통치안을 거부하고 아랍인들을 학살하고 추방해 난민을 만들어 냈다. 팔레스타인 전쟁이 끝나고 유엔이 난민의 귀환을 인정하고 아랍 국가들과 평화를 맺으라고 권고했을 때도 이를 거부했고 영토를 넓힐 전쟁을 획책했다. 마침내 팔레스타인의 모든 땅을 손에 넣었을 때는 아랍인들에게 평등한 권리를 주고 갈등을 진정시키기보다는 식민 지배로 억압하고 수탈해서 국가 발전의 제물로 삼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으로 유대인 국민들이 목숨을 잃게 되는 어려움에 부닥쳐서도 억압을 중단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을 죽여서 손과 입을 막으려 했다. 이런 사실들이 국내외 학자들과 언론에 의해 공개된 후로도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기보다는 진실을 숨기기로 선택했다.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서 테러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병원에서 환자가 아프다고 몸부림을 치면 팔다리를 잘라버리는 게 아니라 병을 치료하듯이, 테러리스트를 양산하는 악의 근원인 시온주의를 제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유대인이 다수 인구를 차지하고 지배적 위치에 서는 유대 국가를 추구하는 시온주의가 살아 숨 쉬는 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평화는 없다. 두 나라를 통합해 모든 아랍인과 유대인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하나의 국가를 만들 수도 없고, 두 개의 독립 국가를 존속하되 난민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해법도 택할 수 없다. 점령 중인 서안지구에 불법적으로 건설한 정착촌도 철수할 리 없고, 각종 자원의 약탈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부당함을 호소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을 멈추기 위해 인권 탄압도 계속할 것이다.
2023년 10월 7일 하마스의 공격과 그로 인해 촉발된 이번 가자지구 전쟁에 대해서 고민할 때 가장 도움이 되는 글귀라고 생각합니다.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이 글을 읽어도 뭔 소린가 하겠지만, 책이나 브런치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100%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추신 : 유대 국가를 만들라고 권고한 유엔특별조사위원회의의 보고서(150-200쪽 분량)를 한국어로 완전번역하고, 주장의 옳고 그름을 하나하나 따지는 책을 쓸 계획입니다. 빠르면 내년, 늦으면 내후년에 선보일 듯합니다. 세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를 이해하는데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