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이날이 왔군요. 마지막 내용입니다. 제5장 3절은 이스라엘 건국 이후부터 오늘날(정확히는 2차 인티파다)까지 반 세기가 넘는 역사를 특정 사안 중심으로 간추려 설명합니다. 이 시기의 역사는 시중에 있는 다른 서적에서도 소개되고 있고, 제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저보다 상세하게 다룬 책들도 더러 있습니다. 다만, 저는 1차 사료를 연구해서 쓰다 보니 제 글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내용도 몇 개 있긴 합니다. (대표적으로 UNRWA의 역사)
1948년 이스라엘의 인종청소와 그로 인한 75만 팔레스타인 난민의 탄생은 오늘날의 분쟁을 고착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만약 이스라엘이 뒤늦게라도 난민의 귀환을 인정하고 갈등을 봉합하려고 시도했더라면, 갈등은 점차적으로 잦아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평화에 반대하고 갈등을 의도적으로 키웠습니다. 이스라엘의 충격적인 만행과 진실을 들여다봅시다.
3.1. 난민 문제의 반영구화
1947년에 분할안을 가결한 국제사회는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1948년 전쟁을 보고도 일시적인 불행 정도로만 생각했다. 이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것은 아마도 이스라엘이 전쟁이 끝나고도 난민의 귀환을 반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제야 시온주의가 어떤 사상인지를 가늠하게 된 유엔은 1949년에 난민 문제를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처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난민의 65%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35%는 레바논과 시리아, 요르단, 이집트와 이라크에 분포되어 있었는데 아랍 국가들은 난민을 경제적으로 흡수할 역량이 없었다. 유엔은 구호 활동을 당분간 계속하되, 난민에게 일할 기회를 제공하고 아랍 국가들의 생산 역량을 증가시켜 난민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목적으로 UNRWA가 설립되고, 기존에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가 담당하던 구호 활동이 이관되었다.
<사진 : 전쟁 직후 천막촌과 동굴, 공공시설 등에서 생활 중인 팔레스타인인들. 출처는 UNRWA>
이번 전쟁으로 UNRWA가 많이 이슈가 되었지요? UNRWA는 팔레스타인 난민과 역사를 같이 하는 대단히 중요한 기구입니다.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은 왜 아랍 국가들이 난민을 받아들이지 않냐고 묻곤 하는데, UNRWA의 설립 배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습니다.
주거환경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는 생필품의 궁핍이었다. 난민들이 피란길에 가져온 몇 안 되는 옷과 집기류는 팔아버렸거나 못 쓰는 수준이 되어버렸다. UNRWA가 도로 건설이나 조림업 등의 일자리를 제공하자 난민들은 신발도 없이 일하러 나왔다. UNRWA는 식량과 이불, 의류 등의 생필품도 지급했지만, 한반도에서 발발한 6·25 전쟁으로 구호품의 가격이 급등해 버려 공급에 차질을 겪었다. 난민들이 피란처로 삼은 지역들은 대부분 미개발지라서 경제 활동의 기회가 없는 곳이었다. UNRWA는 이런 곳에서 영구적이거나 반영구적인 수용소를 건설하면 자립할 수 없게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만 사용할 목적으로 천막촌을 조성했는데 불행하게도 폭풍우가 불어와 수많은 천막이 파괴되었다. 1951년 12월에는 단 9일 만에 5,120개의 천막이 파괴되어 56,000명이 새로운 피란처를 찾아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6·25 전쟁의 여파로 천막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다. .... 상황이 이렇게 되자 UNRWA는 어쩔 수 없이 경제적 기회가 제한된 곳에서도 가옥을 건설했다.
난민들은 주거환경이 개선되면 재정착한 것으로 간주되어 고향으로 돌아갈 권리를 잃게 될까 봐 걱정했다. UNRWA는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것이 정치적 권리인 귀환권을 훼손하지 않으며 오히려 난민 생활에 도움이 될 거라고 설득했고, 난민 생활이 8년 차에 접어든 1955년이 되어서야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1967년까지 많은 주거지가 시멘트나 콘크리트 등의 자재를 사용해 새로 지어지거나 보수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임시적인 피란처라는 인식 때문에 적절한 도시 계획이 동반되지 않았고 난민촌은 도시 슬럼가와 같은 열악한 모습이 되어갔다. ...
1950년에 통과된 유엔총회 결의안 393호는 난민들이 “귀환이나 재정착을 통해 중동 지역의 경제생활에 재통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귀환을 완강히 금지했고, 아랍 국가들도 재정착에 반대했다. 후자의 결정에는 난민을 대규모로 수용할 경우 생겨나는 안보나 경제적 부담, 사회적 불안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것은 난민의 귀환권이 가지는 정치적 상징성이었다.
이스라엘의 건국과 그로 인한 나크바는 팔레스타인인뿐만 아니라 외세의 지배를 경험한 대부분의 아랍인들이 공유하는 아픔이었다. 따라서 난민의 귀환은 유럽 제국주의에 희생당한 억압의 역사로부터 아랍 민족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는다는 상징성을 안고 있었다. 아랍 연맹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정체성을 지키고 귀환권을 보호한다는 목적에서 시민권을 발급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 결과로 난민들은 체류국에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오직 서안지구를 병합할 욕심을 품은 요르단만 난민들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이 있거나 하면 인근 마을을 공격해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비판이 제기되면 ‘안보’를 변명거리로 내놓았고요. 하지만 실상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 명분을 만들려고 일부러 갈등을 키운 것이었습니다.
1948년 전쟁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둔 이래 이스라엘의 수뇌부는 군사적 성공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들은 다시 전쟁을 일으켜 영토를 확장하길 원했고 그러려면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얻는 게 필수적이었다. ... 수뇌부는 [미국 주도의 이집트 평화] 회담을 거부할 구실을 조작하기 위해 1955년 2월에 가자지구를 침공해 37명을 죽이고 30명을 부상 입혔다. 학살을 마친 뒤 이스라엘 정부는 아랍군이 기습해 왔고, 이들을 추격한 끝에 가자지구에서 사살한 것이라고 거짓 해명했다. 작전을 주도한 것은 퇴임 총리인 벤구리온과 국방부 장관 모세 다얀이었고, 현직 총리인 모세 샤레트는 반대했었다. 샤레트는 이 작전으로 “우리가 고립되고 안보가 위험하다고 절박하게 외치고 있는 인상이 만들어질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우리가 대량 학살을 저지르는 피에 굶주린 침략자다.”라고 일기에 고백했다.
이스라엘은 1956년에 영국, 프랑스와 함께 가자지구와 이집트를 침략합니다. 그러나 영프의 성장을 경계한 미국과 소련이 반대하자 빼앗은 영토를 되돌려주고 철수했습니다. 1967년에 이스라엘은 단독으로 주변 아랍 국가들을 선제공격했고, 서안과 가자지구, 이집트 시나이반도, 시리아 골란 고원을 점령합니다.
1967년 전쟁 직후 유엔안보리는 “정의롭고 지속가능한 평화의 정착”을 위해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 242호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형식적인 대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미국 주도의 서방세계는 이스라엘에 어떠한 제재도 가하지 않았다. ... 팔레스타인인들은 더 이상 아랍 국가들로부터 한 줌의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난민의 귀환권에 대해 장황한 이야기를 하고 서안과 가자지구의의 점령이 불법이라 외치기만 할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국제사회도 믿을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활로를 찾기 위해서 스스로 나서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깨달았다. 팔레스타인의 해방은 팔레스타인인만이 가져올 수 있다는 파타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해방운동(PLO)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져오지만 1982년 레바논 전쟁 때 이스라엘에 대패합니다. 아랍권의 정치적 지주를 자처하던 소련은 미국에 경고했고, 미국은 PLO가 레바논에서 안전하게 철수하고 남겨진 민간인도 보호해주기로 약속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같은 편인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를 투입해 민간인 3천 명을 학살합니다. 19년 뒤 9.11 테러와 같은 수의 사망자가 발생했으나 미국은 물론이고 서구권의 어느 국가도 이스라엘을 공격해 응징해야 한다는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아랍 국가들도 PLO가 약화되자 외면하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으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 서안과 가자지구에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나면서 사태는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주민들은 왜 봉기했을까요?
3.3. 재개된 인종청소
1967년 전쟁으로 서안과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시온주의의 본질에 대해서 고민해야 했다. 점령지에는 백만 명이 훨씬 넘는 팔레스타인인이 살고 있었다. 만약 영토를 병합하면 주민들에게 시민권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랍 인구가 늘어나 유대 국가의 정체성을 위협하게 된다. 1948년 전쟁 때 기껏 인종청소를 해서 쫓아냈는데 이제 와서 이들을 끌어안을 이유는 없었다. 그러니 답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인종청소를 재개하는 것이다.
점령 직후 이스라엘은 10-20만 명의 주민들을 버스에 태워 요르단 국경 너머로 옮겨버렸습니다. 이때 추방당한 난민들을 '1967년 난민'이라고 부르며, 팔레스타인 국가가 건설된 지금도 국경을 통제하는 이스라엘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점령 이듬해부터는 본격적으로 서안과 가자지구의 유대화에 돌입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로부터 땅과 물을 빼앗고 유대인 식민촌(=정착촌)을 지었고, 저항하는 주민들을 학살하고 고문했습니다. 땅이나 고문 이야기는 다른 포스팅에서 적었으니 여기서는 경제적 악화에 대해서만 살짝 언급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식민지의 경제 체제를 본국에 종속적으로 만들었다. 1986년을 기준으로 서안과 가자지구는 미국 바로 다음 가는 수출 시장이었다. 당시 점령지의 인구는 고작 150만 명이었다. 반면, 점령지에서 이스라엘로의 수출길은 막기 위해 보조금을 지급하는 등 무역장벽을 높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점령지의 산업이 성장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자연히 주민들은 고향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고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 경제로 발을 들이밀어야만 했다. 건국 이전에 그랬듯이 이스라엘은 이들을 싼값에 고용해 막 부렸다. 팔레스타인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유대인의 40%에 그쳤고, 쓰레기 수거 등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일거리 위주로 주어졌다. 근로 조건은 매우 열악했다. 이스라엘에서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매일 검문소를 드나들며 수시간 걸리는 출퇴근을 감수해야 했다. 점령지로 돌아가지 않고 주차장 등에서 몰래 자다가 발각될 경우에는 체포되었다. 또한, 노동조합의 가입이 금지되고, 연금, 실업수당, 산재보상 등을 받지 못하는데도 소득의 30%를 사회보장세로 강제징수당하고, 능력에 관계없이 비숙련직으로만 고용되었다.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는 주민들의 삶을 괴롭고 비침하게 만들었고,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독립 국가를 열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1987년에 대규모 민중 봉기가 일어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일으킨 민중봉기를 일컫어 인티파다라고 부릅니다. 1993년에 시작된 오슬로 평화협상 이전까지의 시기를 1차 인티파다라고 부르고, 협상이 결렬된 2000년부터 2004-5년까지를 2차 인티파다로 분류합니다. 언론에는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폭력 시위나 폭탄 테러가 많이 보도됐지만, 적어도 1차 시기에는납세 거부, 상점 파업, 불매 운동, 이스라엘 기업 근로 중단 등 비폭력 시민불봉종 운동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역할을 했습니다.
인티파다의 목적은 1967년 이전의 국경선인 서안과 가자지구를 영토로 하는 독립 팔레스타인 국가의 창설과 난민의 귀환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이스라엘 타도를 목표로 삼았던 해방기구(PLO)는 주민들의 요구에 부응해 이스라엘에 평화협상을 요청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부하다가 국내외 여론에 밀려 마침내 협상테이블에 앉게 됩니다. 양 측은 단계적으로 합의점을 찾기로 하고, 우선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설립합니다. 그런데인티파다의 시작과 함께 만들어진 하마스는 이런 협상 따위로 평화가 달성될 리 없다고 믿고 이스라엘에 무장투쟁을 계속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를 빌미로 삼아 협상을 거부하고 지연시켰습니다.
평화협상이 진전이 없자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2000년에 마지막 중재안을 내놓습니다. 서안지구를 3등분하고 동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사해 인근 지역 등을 제외하는 안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측은 당연히 거부했고, 서구 국가들은 어떻게 이토록 좋은 조건을 거부하냐고 비난했습니다. 당시 협상에 참여한 미국 정부 관계자에 따르면, 팔레스타인 측이 거부한 본질적인 이유는 난민의 귀환권을 인정하지 않아서였던 거라고 합니다.
<빌 클린턴이 제시한 국경선. 서안지구를 3등분하고 상당수의 영토, 특히 요르단강과 사해와 인접한 지역을 모두 제외시켰다. 가자지구까지 고려하면 팔레스타인은 4등분되는 셈이다>
그들은 [미국과 이스라엘] 모든 팔레스타인 땅이 이스라엘의 정당한 소유물이고 0%를 가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대체 얼마나 많은 땅을 양보해 줘야 만족하겠냐는 시각으로 보았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그들이 천년 넘게 살아온 ‘역사적 팔레스타인’의 100%에서 이미 78%를 양보했고 유엔총회 결의안 242, 338호에 따른 것인데 어떻게 더 양보할 수 있겠냐는 입장이었다. 친이스라엘 학자들은 힘이 곧 정의인 세상에서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가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며 비난하며 ‘거부주의’란 용어로 낙인을 찍었다.
협상이 결렬되자 남은 것은 서안과 가자지구를 주권 없이 애매하게 다스리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뿐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서안지구의 60%, 즉, 팔레스타인의 50% 땅이 여전히 이스라엘의 직접 지배로 남아 있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인티파다를 재개했으나 수년에 걸친 노력에도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늘날에 이르게 됩니다.
위에서 UNRWA가 지금과 같은 콘크리트 난민촌을 만든 배경에 6.25 전쟁이 있다는 사실을 보셨지요? 연구 1년차에 UNRWA의 연례보고서를 하나하나 읽다가 발견하고 엄청 흥분했었습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이걸 아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러나 이내 안타까움이 치솟아 올랐습니다.식민주의로 인해 동시대에 같은 고통을 겪은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해서 우리는 이제 잘 살게 됐으니 너희는 식민주의에 저항하지 말라고 욕하고 있으니... 당시 느꼈던 이런저런 감정들이 8년 동안이나 책을 붙잡고 있게 만들어준 주요 이유 중 하나이지요.
이전에도 적었던 것 같지만, 팔레스타인 문제로 세계가 갑론을박하는 이유는 정치나 종교 때문이 아닙니다. 진실을 아느냐 모르냐의 문제입니다. 이스라엘의 선전만 믿고 세뇌된 사람들 혹은 무관심한 사람들과, 역사적 기록을 찾아 읽고 진실을 아는 사람들의 투쟁입니다. 이번 전쟁 발발 직후 하버드 대학에서부터 시위가 시작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배우고 공부한 자들만이 올바른 목소리를 낼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대학의 존재 이유가 돈 많이 버는 직장 구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이런 면모에서는 아직 한참이나 뒤떨어져 있지요.
이런 현실을 알기에 제 글을 읽어봐 주시는 분들이 대단히 훌륭하시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함께하는 동료로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제가 이토록 공을 들여 팔레스타인인들의 현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만 글로 담아낼 수 있는 현실의 조각은 언제나 제한적입니다. 이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사실 현지에서 조금 살아본 필자도 팔레스타인인들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지는 못한다. 단지 보거나 들은 이야기로 단편적으로만 가늠할 뿐이다. 친구들의 초대를 받아 비르젯대학교에서 열린 학교개방일(Open Day)에 참석한 적이 있었다. 우리나라 대학축제와는 비교가 안 되는 작은 규모지만, 연예인과 가수를 초빙해 관람하는 축제가 아닌 하나부터 열까지 학생들이 주연인 축제였다. 지역 주민들도 와서 참관했다. 친구들을 따라 들어간 어느 강의실에서는 학생들이 장기자랑을 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강남스타일을 부른 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맨 마지막 학생의 장기자랑은 한국인 관점에서는 매우 엉뚱한 것이었다. 바로 자작시 낭송이었다. 더욱 당황스러운 것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친구가 저 학생이 시를 정말 잘 짓는다고 설명하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주위에서도 사람들이 흥분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길지 않은 시 낭송 중간중간에 학생들이 흥분해서 소리를 질렀다. 낭송이 끝나자 가장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고 몇몇 학생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랍어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해도 이 시가 저항시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도 유명한 저항시들이 있다. 필자는 시를 즐기지 않지만 학창 시절에 한용운 선생님의 「임의 침묵」은 좋아했다. 일제강점기의 아픔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이 시는 선조들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가슴에 와닿게 해 주었다. 그런데 이런 저항시들을 읽으며 슬퍼서 괴로워하거나 눈물을 흘린 적은 없다. 만약 그랬다면 주변에서 다들 이상하게 쳐다봤을 것이다. 팔레스타인에서는 다르다. 우리는 저항시를 읽으며 간접적인 체험을 할 뿐이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은 지금도 직접 겪고 있다. 그러니 식민지배의 아픔을 노래하는 우리의 목소리는 그들에 비하면 한없이 작고 나약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제3자로서 팔레스타인인들의 처지를 동정하고 이스라엘에 느끼는 분노는, 피해자들의 감정과 그 깊이가 다릅니다. 무장투쟁을 볼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고, 특히 이번 하마스의 1천여 명의 학살을 규탄하지만, 무장투쟁을 막으려고 하기보다는 무장투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만들어주는 게 올바른 접근법이라고 믿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적은 5장의 결론(723-735쪽)은 꼭 한 번쯤은 읽어봐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