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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Jun 05. 2024

해제| 닫는 글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저는 팔레스타인을 하나의 소재로 삼아 세상을 올바르게 바라보는 시각을 설명하는 책을 쓰는 게 목표였습니다. 전쟁이 한창인 와중에 적절한 소리는 아니겠지만, 세상에 불행한 사람들은 팔레스타인에만 있지 않습니다. 가난한 나라도 많고, 그래서 비참하게 죽는 사람들도 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빈곤으로 죽는 사람들이 있고요. 그런데도 제가 8년이나 들여 이 책을 써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팔레스타인 문제야말로 우리나라나 소위 선진국인 서구권 국민들에게 결핍된 능력을 기르는 좋은 소재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은 바로 공정함입니다.


닫는 글은 이러한 기획 의도를 설명하는 내용으로 구성했습니다. 책을 안 읽어본 사람도 흥미롭게 읽을 만할 겁니다. 그래서 전문을 올릴까 고민도 했는데, 글이 길고 또 의도한 방향으로 읽히지 않을 우려도 있어서 부분 발췌했습니다.


참고로, 닫는 글 중 일부 문단은 편집 과정의 실수로 최종 원고가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1쇄에는 조금 부적절하게 표현된 내용이 있고, 2쇄에서 이를 '살짝만' 가다듬었습니다. (판을 유지하고 쇄를 달리할 때는 내용을 변경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만들어두었던 최종 원고는 앞으로 2-3년 개정판 살려낼 예정입니다.



글을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 무엇인지를 가리는 일이었다. 오래전 일이니 진실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학자들이 ‘보여주는 역사’는 저마다 달랐고 같은 사건을 정반대로 이야기하는 경우도 흔했다. 그래서 지식이 턱없이 부족했던 1-3년 차에는 너무나 막막해서 쓰는 걸 포기하고 싶은 소주제들이 많았다. 그래도 짧게는 며칠, 길게는 수주 간 계속해서 교차 검증하고 고민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진실이 보였고 결국에는 모두 적어낼 수 있었다. ‘실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나중에는 아무리 이견이 심한 주제가 나와도 걱정을 접어 두고 도전했다. 후세인-맥마흔 서신협상이 가장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는데 대략 3개월 정도가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


역사와 관련된 이견은 대개 사료나 가치관의 차이로 인해 생겨난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인류는 가치관의 보편성을 상당히 구축했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사료가 원인이다. 어떤 주장을 할 때 자신에게 유리한 사료만을 취하고 반증이 될 법한 것은 감추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예를 들어, 많은 친이스라엘 학자들은 시온주의자들이 아랍인을 추방할 의도를 드러내거나 계획을 세웠던 기록을 철저하게 감춘다. 그러면 독자는 팔레스타인 난민이 전쟁으로 우발적으로 발생한 결과라고 믿게 된다.  ...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처음 집었을 때 분량을 보고 읽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이를 잘 알지만 그래도 집필 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최대한 압축적으로 쓰려고 정말로 공들였다. 실제로 해외 학자들이 쓴 명저에 비하면 이 글은 분량으로나 깊이로나 매우 간결하고 쉬운 편이다. 그런데도 여러 독자들에게 어렵게 느껴졌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는 우리가 중동에 대해 알고 있는 기본 상식이 전무한 수준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논쟁적인 지식을 검증하는 비판적 독서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이다. 우리는 학교에서 비판적 독서가 중요하다고 배운다. 그러나 비판적 독서는 독자만의 숙제가 아니다. 저자가 비판적 독서를 가능케 하는 글을 써내야 한다. ...


짧게 잘 요약된 글은 지식을 명료하게 전달한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이 올바른지를 비판적으로 사고하기에는 적합지 않다. 비판적 독서는 창의적 독서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서는 먼저 저자가 주장에 대한 근거를 충분히 제시해야만 하고, 나아가 이견이 존재한다면 이에 관해서도 설명하고 재반박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글은 필연적으로 길어지기 마련이다. 이-팔 분 쟁에 관한 해외 학자들의 명저가 깨알 같은 글씨에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300쪽 내외의 얇은 책도 많지만, 이들은 특정 주제나 시기에 국한된 내용만을 다룬다. 비교하자면, 이 책은 일반적인 종합서적의 20-30% 정도로 축약되었다. 그래서 수백 개에 달하는 논쟁적인 소주제들을 하나하나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판단의 근거가 되어줄 만한 사료를 가능한 한 많이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


세상의 모든 역사는 이견이 존재하는 법이지만 그런 논쟁이 현재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별다른 근거 없이 저자의 주장만 담은 짧은 교양서적으로 나와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분쟁의 역사는 이견이 첨예할 뿐만 아니라 현재의 문제에 직결되어 있다. 그래서 요약된 글은 단순히 가치가 떨어질 뿐만 아니라 분쟁을 확산시키는 불씨가 되기 십상이다. 독자가 저자의 주장을 검증하지 못한 채 진실로 받아들이고 해당 진영에 서게 되기 때문이다. 설령 저자가 사실을 올바르게 말했다 하더라도 충분한 근거를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반대입장의 글을 보게 되면 진실을 ‘의견’으로 인식하게 되고 가해자의 죄를 묻기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분쟁에 대한 지식을 올바르게 접하려면 전문 서적과 비판적 사고가 필수적인데 우리나라는 아직 이런 문화가 발달하지 못했다.


요즘 들어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자는 주장이 자주 보인다. 비록 고래로부터 전해오는 좋은 말이지만, 최근에는 ‘타인의 주장을 반박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잘못 변질된 듯하다. 상대의 생각을 존중한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가릴 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높게 평가하는 것이지 ‘내 생각도 맞고, 네 생각도 맞아.’라고 넘겨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은 나쁜 행동이 절대 아니다. 인간이 이룩한 모든 발전은 바로 그러한 갈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자기주장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정답을 찾아가는 올바른 토론은 인류를 성숙하게 만드는 긍정적인 문화다. 그런데 요즘에는 자신의 ‘생각’이 부정당하는 걸 ‘자신’이 부정당한다고 받아들여서인지 지나치게 불쾌하게 여긴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은 존중받아 마땅하다.’라는 자기 방어막을 내세우는 듯하다.


인간의 교류는 필연적으로 서로 다른 생각의 충돌 속에서 올바름을 찾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가 위태로워진다. 주변에 술 몇 잔 마시고 운전하는 것 정도는 괜찮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말리지 않게 되고, 학창 시절에 폭행이나 왕따를 주도한 가해자가 방송에 나와서 피해자가 원인 제공을 한 것이라고 변명하면 비판할 수 없게 되고, 성폭행 가해자는 피해자가 동의한 줄 알고 저질렀다고 말하면 혐의를 벗을 수 있는 세상이 돼버린다. 물론, 이런 세상이 정말로 도래할 날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자는 주장은 자신이 얻을 이익이 없거나 피해를 보지 않는 경우에만 사용하는 비겁한 변명이기 때문이다. 가령,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나 팔레스타인인들의 테러를 이야기하면 유대인들도 뭐 그럴 수 있는 거고 팔레스타인인들도 그럴 수 있는 거겠지 하고 흘려버린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지배를 이야기할 때는 일본인들의 생각은 전혀 ‘존중’하지 않고 사과를 ‘강요’한다.


우리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정말로 ‘존중’해야 하는 영역은 가치관이다. 가치관은 어떤 게 올바른지를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가치관에 대해서도 검증하는 것이 바람직할 때가 많다. 가치관의 차이에 따른 이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의 이익을 옹호하려고 내세운 변명인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시온주의자들은 사적 계약의 자유를 옹호하며 토지 매매에 정부나 제3자가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수많은 유대인 농장주를 협박해 아랍인 노동자를 해고하게 만든 행태에서 잘 드러나듯이 시온주의자들은 누구보다도 이런 가치관을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또 다른 예를 들자면, 이스라엘은 1947년의 유엔의 결정이 건국의 정당성을 담보해 준다고 주장한다. 당사자들 간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국제사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일견 존중할 만한 가치관처럼 보이겠지만, 바로 그 유엔이 난민의 귀환을 요구하고 서안과 가자지구의 점령과 정착촌 건설을 불법으로 규정했는데도 이스라엘은 반세기가 훨씬 넘도록 지키지 않고 있다.


분쟁과 관련된 논쟁을 검증할 때 가장 유의해야 하는 점은 대상으로 삼는 집단이 올바르게 설정되었는지다. 집단의 일부에 대한 비판이 집단 전체를 겨냥하게 되면 갈등이 확산하기 쉽다. ...


이-팔 분쟁이 계속되는 사정도 그러하다. 오래된 분쟁이기에 무언가 대단한 이유가 있을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단순하다. 편협한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집단의 대결로 구도가 변하면서 논박은 사라졌다. 시온주의는 처음에 아랍인의 존재나 저항을 숨기고 평화적인 운동으로 선전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 시온주의자도 시온주의가 아랍인들에게 번영을 가져다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랍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무찌르는 이야기만 한다. 시온주의자들이 어떤 의도로 식민화를 시도했는지를 보여주는 수많은 기록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반성이나 성찰도 찾아볼 수 없다. 아랍인들에게 유대 국가라는 정치적 목표를 감추고 이는 반유대주의자의 음모라고 변명하던 시온주의자들의 기만은 친이스라엘 서적에서 “전략”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묘사되고 있다.


분쟁의 본질이 잊히면서 아랍과 유대 간의 민족적 대결 구도는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팔레스타인인들이 투쟁하는 상대는 유대인이 아니라 시온주의자이며, 이는 심지어 하마스조차도 (실제와는 다르지만 적어도) 공개적으로 내걸고 있는 기치다. 그러니 시온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유대인은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자유로워야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비판받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역으로 팔레스타인인을 증오하고 이스라엘의 식민 지배를 옹호하게 된다. ...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찾아오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시온주의를 직시하는 것밖에 없다. 각국 정상들은 국경선을 제시하기 이전에 시온주의자들이 어떤 의도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왔고 어떻게 해서 성장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난민들이 자발적으로 떠난 게 아니라 추방당한 것이고 이스라엘이 꾸준히 식민 지배를 하며 인권을 철저히 유린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널리 알려야 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과거와 현실을 바로 볼 수 있게 만든 다음에야 정치체제와 영토적 경계, 난민의 귀환권을 논하는 수순이 뒤따라야 한다. ....


유대 사회 내부의 노력만으로는 앞으로도 변화를 일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연대가 필요하다. ... 이스라엘은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만약 세계가 이목을 집중하고 역사적 사실을 ‘진실’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식민 지배에 대한 내부의 저항을 크게 키울 수 있다. ...


분쟁의 종식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없을까? 이 책을 쓰는 동안 한국의 문화는 세계 정상의 반열에 올랐다. 영화 기생충과 방탄소년단, 손흥민 선수 등이 세계적으로 인기라는 뉴스가 나오면 문화강국을 꿈꾸셨던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라는 댓글이 달리고 수많은 공감을 받는다.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나도 부끄럽고 안타깝다. 김구 선생님이 소망하신 발전된 문화는 예술문화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을 총칭한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김구 선생님께서 바라시던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당신께서 문화강국의 꿈을 밝힌 『나의 소원』을 보라. ...


대한민국은 경제 선진국이 되었고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지만 우리는 여전히 남들의 고통에 무심하다. 김구 선생님이 과연 이런 모습을 보고 기뻐하실까? 심지어 식민 지배를 받고 도움을 호소하는 피해자를 외면할뿐만 아니라 도리어 가해자로 몰고 있는데도? 우리가 저승에서 당신을 뵙는다면 호통치실 것이다. 무엇이 두려워서 정의를 외면했느냐고. 이래서야 세계의 다른 민족들에게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던 자신들이 어떻게 편히 눈감을 수 있냐고. 김구 선생님이 “다른 나라야 식민 지배를 받든 말든 알 바 아니지.”라고 말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


또 한 가지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가 팔레스타인인들의 무장투쟁을 옹호해도 괜찮은 지다. ‘테러리즘’은 우리 사회에서 비판의 대상이지 분석의 대상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테러리스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역지사지해 보자고 말하는 순간 매도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팔레스타인의 억울한 역사와 식민 지배의 현실을 알려도 그런 ‘사연팔이’는 주변의 동의를 쉽게 얻지 못한다. 정말로 부끄럽지만, 필자도 머리로는 무장투쟁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합리화시킬 수 있어도 심적으로는 저항감이 크다. 팔레스타인인에게 친지를 잃은 이스라엘의 유가족에게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식민 지배를 중단해야지. 왜 침묵하고 있었어? 너희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을 괴롭히고 더 많이 죽이고 있어서 벌 받은 거잖아!”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독자들은 자신만의 가치관에 따라 우리가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게 옳을지 고민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최소한 반식민주의의 정신을 지키는 것에서부터 국민적 공감대를 이루자고 제언하겠다. 누군가에겐 외국인의 생명이나 인권, 국제평화 따위는 하등 가치 없는 것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일본에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에 일말의 진정성이라도 실으려면 다른 국가들과의 손익계산을 떠나 식민주의 그 자체만큼은 비판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수의 극단주의적 유대인들이 시온주의라는 민족주의-식민주의 사상을 추종하며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지금도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식민 지배하고 있다. 이 사실을 소리 내서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식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나라가 비판하는 것은 일본이 우리에게 입힌 피해지 식민주의가 절대 아니다. 양자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본을 제외한 어떤 식민주의 국가에도 반성을 촉구하지 않고 이 주제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 주변 사람들에게 팔레스타인이 식민 지배를 받고 있다고 설명을 해줘도 대부분이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무심한 반응을 보인다. 식민 지배에 대한 분노나 연민 같은 건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해서 무얼 어쩌겠냐는 냉소를 머금거나 종교적인 이유로 식민주의를 두둔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기에 더해 앞으로는 상업적인 이유로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테니 전망은 어둡기만 하다.


그러니 우리 사회가 변화하려면 독자 여러분의 역할이 중요하다. 팔레스타인의 역사가 어땠는지, 갈등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논쟁이 되는 사안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식민 지배는 종식돼야 마땅하다고 말해서는 되려 우리 사회 내부의 갈등만 부추길 뿐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이런 수준의 책을 읽을 능력을 갖추길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깨어 있는 여러분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


마지막으로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분쟁의 참상 때문에 무분별한 분노나 비난으로 빠져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유대인은 진실을 모른다. 그리고 외면하고 싶어 한다. 이런 양심 없는 놈들을 봤냐고 꾸짖고 싶겠지만, 사실은 이게 어느 나라 어느 국민에게나 평범하고 일반적인 반응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유럽인들은 몇백 년을 행했던 식민 지배도 여태껏 사과하지 않고 식민 지배를 땅을 개발해 준 역사로 인지한다. 못 배운 사람들만 그러는 게 아니라 대학을 나온 식자층도 그런다. 또한, 여전히 많은 학자들이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가 정당하다고 옹호한다.


우리가 도통 이해할 수 없다며 혀를 내두르는 일본인의 행동도 사실은 그저 평범할 뿐이다. 일본인들은 학교에서 식민 지배를 했다는 외연적인 사실은 배우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게 한국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 지를 생각해 보는 기회는 없다. 오히려 식민 지배 덕분에 조선이 산업화에 성공했다고 배우니 배은망덕하다고 여기기 쉽다. 일본에도 인권을 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많지만, 불편한 진실을 파헤쳐 사회적 반발을 마주하기보다는 팔레스타인인들처럼 지금 현재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더 큰 것은 당연하다. ...


혹시 이런 편협한 인식과 행동이 식민 지배의 경험이 있는 국가들에서만 발견되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2023년 2월 7일, 우리 법원은 베트남전 당시 우리 군이 민간인을 학살했고 정부가 배상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일부 언론은 우리가 일본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라며 자랑스러워했으나 스 댓글난에서 확인되는 여론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민간인과 군인의 구별이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모든 민간인을 위협 요소로써 제거해야 마땅했다든지, 베트남 정부가 사과나 배상이 불필요하다는데 우리가 나서서 할 필요가 있냐는 등의 이유에서다. 또한, 2월 17일에 국방부 장관은 국회에서 학살을 부인하며 법원 판결을 비판했다.


필자는 베트남전을 연구하지 않았으니 주제넘게 정답이 무엇인지를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우리 사회가 이런 문제를 공론화하기보다는 이익 등을 앞세워 논의를 거부하려는 닫힌 사회라는 점은 지적하고 싶다. 해당 판결문에 따르면 생존자와 우리 군인 등을 포함한 19명의 사건 관계자들이 학살을 증언했다. 그러니 진상 파악을 위한 노력이 추가로 필요하지만, 일반 국민은 물론이거니와 국회나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대응도 보이지 않는다. 또한, 댓글의 여론이 주장하는 것처럼 학살에 대한 사과나 피해보상이 필요 없다고 보기도 어렵다. 민간인과 군인의 식별이 어려운 전쟁은 베트남전이 유일하지도 않고 국제법은 그런 이유로 학살이 정당화된다고 보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를 옹호한다면,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저지른 우리 국민의 학살도 정당화될 우려가 크다. 베트남 정부가 요구하지 않으니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나 사과는 필요 없다는 주장은, 우리 정부가 요구하지 않으면 일본이 위안부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 대해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말이 된다.


이처럼 자국이 행한 잘못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려는 태도는 세계 어디에서나 흔한 일이다. 유대인들이라고 어찌 다르길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이스라엘이 식민 지배로 얻는 이익은 대단히 크다. 그러니 진실을 부인하려는 마음의 장벽은 높을 수밖에 없고 이를 해체시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지 못하고 ‘유대인들은 왜 저럴까? 참 나쁜 놈들이야!’라고 비난만 퍼부어서는 아무런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오히려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유대인들의 반감까지 사서 분쟁을 악화시킬 뿐이다. 제3자인 우리가 당장 많은 일을 해내려고 욕심부리기보다는, 우선은 반식민주의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이라는 작은 한 걸음이라도 내디딜 수 있기를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1월 말부터 5개월 넘게 연재해 온 독서가이드(해제)가 이렇게 끝났습니다. 여는 글에서도 밝혔지만, 독서가이드는 <팔레스타인, 100년 분쟁의 원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시작했습니다. 아무래도 글이 길다 보니 뒷부분을 읽다 보면 앞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 수 있어 핵심 내용을 요약하고, 책에서 못다 한 설명을 덧붙이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글을 써 보니 기획의도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805쪽짜리 책이긴 하나 그 자체로 많은 내용을 축약한 요약본이다 보니, 이걸 다시 요약한다는 게 쉽지가 않더군요. 결국 여러 내용을 생략하다 보니 본질을 제대로 투영하지 못했고, 뒤로 갈수록 인과관계가 유기적으로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브런치로만 글을 접하신 분들은 역사적 사건을 머릿속에서 재구성하기 어려우셨을 듯합니다.


글 쓰는 중에 이미 이런 문제점을 인지했기 때문에 점점 요약 비중을 많이 늘렸습니다. 추가 설명은 줄였고요. 브런치 글 한 편에 10분 이상 분량을 적어놓을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긴 했으나, 이래서야 책을 안 읽어본 사람들을 위한 요약글이 돼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많이 아쉽지만, 그래도 브런치 독자는 책을 읽지 않으신 분들이 많은 듯하여 방향을 바꾼 게 적절했다는 생각도 듭니다.


뭐가 어찌 됐든, 끝내서 후련합니다. 중간에 바쁜 일들이 생겨서 연중도 고민했었는데 하루도 안 빠지고 연재일을 지켜서 뿌듯하고요. 링크까지 타고 와서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 분들이 있다 보니 멈추기가 죄송스럽더라고요. 언제나 하는 말이지만, 글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혹시 6/27일에 서울국제도서전 강연에서 뵙게 된다면 꼭 말씀해 주세요. 인사 나눠요. 출간할 <언론이 말하지 않는 가자지구 전쟁의 진실>도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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