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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Mar 06. 2024

해제| 2장 3절-이슬람의 폭력성이 분쟁을 일으켰다?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드디어 가장 독해가 힘든 2장 3절입니다. 총 63쪽으로, 다른 절보다 2배 이상의 분량이고 내용도 가장 지루합니다. 온갖 박해 사례가 계속 소개되니 읽다 보면 답답하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트릴 수 있는,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내용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알카에다(Al-Qaeda)나 IS(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또는 DAESH) 등의 테러 단체들이 창궐해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무슬림들이 기독교도를 학살한 사건이나 꾸란에 나오는 호전적인 경구들이 재조명되고, 이런 시각의 영향으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단순히 이슬람의 폭력성으로 야기된 현상이라는 괴담까지도 설파되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이슬람이 폭력적이라서 분쟁이 일어난 거 아니야?"라는 주장을 검증하는 것입니다. 이에 앞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습니다. 이슬람이 '폭력적인 종교'인지 여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슬람 하면 떠올리는 게 테러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주변에서 무슬림을 보기도 힘들고, 국민 관심사가 잘 사는 나라 위주로만 제한되어 있으니 상대적으로 빈국이 많은 무슬림에 대한 평범한 이야기는 미디어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게다가 이슬람을 적대시하는 일부 기독교도들에 의해서 부정적인 평판이 강화되고 있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무슬림은 폭력적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테러를 저지르고 있으니 폭력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기에 부족함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특별히 폭력적인지는 말하기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들도 예외없이 폭력적이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인류를 가장 많이 죽인 종교 집단은 무슬림이 아니라 기독교도입니다. 여기에는 논박의 여지가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기독교도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이 기독교라는 종교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는지는 답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무슬림 테러리즘도 그게 이슬람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의 무슬림 테러리즘은 20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고 그 배경에는 기독교 국가들의 식민 지배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을 위시한 기독교 국가들의 내정 간섭과 팔레스타인에서 저지르는 부정의는 많은 무슬림들의 반발을 사서 테러를 유발합니다. 9.11 테러 역시 그중 하나였고요. 만약 기독교 국가들이 이런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무슬림들이 테러를 할 이유가 없었으니 이슬람의 폭력성이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1천 4백년의 역사 속에서 무슬림들이 저지른 다양한 형태의 수많은 폭력 행위에는 종교가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슬람에 폭력성이라는 요소가 내재되었다고 전제하되, 그러한 종교적 폭력성이 팔레스타인에서 분쟁의 원인이 되었는지를 검증해보고자 합니다.


3.1.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대인 박해 비교


만약 이슬람의 폭력성이 분쟁의 원인이라면, 분쟁이 발생하기 이전부터 유대인에 대한 박해나 갈등이 있어야겠지요? 실제로 이슬람의 창시 직후부터 무슬림과 유대인 간의 충돌이 있었고, 무슬림 국가들은 1천 년 넘게 꾸준히 유대인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유대인을 박해했다는 사실만으로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습니다. 왜냐면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사회적 소수 집단은 박해를 겪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이슬람의 폭력성이 분쟁의 원인이 될 만큼 박해가 특별히 심각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좋은 비교대상이 있습니다.


분쟁이 발생하는 2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유대 인구는 기독교권인 유럽과 이슬람권인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거주했다. 만약 종교적 폭력성이 분쟁을 야기한 것이라면 전자보다 후자에서 박해가 더욱 심각했어야 할 것이다.


유대인 박해는 예로부터 많은 책들이 다뤄온 주제고, 지금 이 순간에도 교보문고 어느 구석에는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교양서적들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어떤 책은 무슬림이, 어떤 책은 기독교도가 더 많이 박해했다고 상반된 주장을 펼칩니다. 그럼 누구 말을 믿어야 하나요? 알 수가 없죠. 그래서 직접 연구했고, 알려진 대부분의 중요 박해 사례를 책에서 간략하게나마 설명했습니다.


제2장에서 유대인 박해 사례를 일일이 열거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만약 다른 책들처럼 ‘무슬림보다 기독교도들이 유대인을 더 많이 박해했습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몇 가지 예시만 들었다면 어땠을까? 이 주제를 한 번도 접해본 적 없는 독자라면 무비판적으로 수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 주장을 접해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의문을 품되 답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념이 충실한 기독교도라면? 부정부터 하고 나섰을 확률이 높다.


그러니 독자들을 온전히 설득하는 유일한 해결책은 가능한 많은 사례를 소개한다는 무지막지한 방법밖에 없었다. 다만, 이렇게 논쟁적인 주제마다 많은 사료를 담아내 설득력을 높이려다 보니 글이 지루해지고 분량이 늘어나 읽기 힘들어졌다는 문제가 있었다.


워낙 논쟁적이다 보니 박해 사례는 우선 소스북에서 수집하였습니다. 소스북을 우리말로 풀어서 설명하자면, 1차사료를 영어로 번역해놓은 자료집 정도가 되겠네요. 대부분의 중요 박해는 소스북에 다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서 빠진 마이너한 사례와 종합적인 분석은 학술서적에서 참고했고요.


그렇게 해서 양자의 사례를 체계적으로 분석해보았고 결과 무슬림의 판정승을 내렸습니다. 가장 심각한 유형의 박해인 학살과 강제개종, 추방 모두가 기독교권에서 압도적으로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전통적인 유대 역사관에서도, 그리고 카이로 게니자를 연구한 현대의 유대인 학자들의 견해와도 일치합니다.


피해자인 유대인들 스스로의 역사 인식은 어떨까? 중세 시대에 유대인들이 남긴 개인적인 기록 중에는 기독교권보다 이슬람권이 낫다는 글도 있고 반대도 있다. 하지만 늦어도 1492년의 스페인 박해 이후로는 유대인들에게 이슬람 지역이 기독교 지역보다 안전하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


특히 카이로 게니자를 연구한 저명한 유대 역사학자들의 평가는 주목할 만하다. 쉘로모 고이테인은 1964년에 『유대인과 아랍인들』에서 “아랍 무슬림 사회에서 유대인의 처지는 중세 유럽에서 보장된 것보다 상대적으로 나았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마크 코헨(Mark Cohen)은 더욱 적극적으로 같은 주장을 여러 번 펼쳤다. 가령 1991년에 『유대-아랍 역사의 새로운 개념의 낙루(Lachrymose)』에서는 “전체적으로 볼 때 유대인들은 기독교권에서보다 이슬람권에서 훨씬 나았으며, 이러한 상대적으로 보다 관용적인 분위기는 아랍의 주류문화에 유대인들이 완전히 빠져들 수 있도록 이바지했고 때때로 정말로 ‘황금(기)’라는 묘사를 받을 만했다.”라고 평했다.


역사학자 모세 길(Moshe Gil) 역시 1997년에 『중세시기 이슬람 지역에서의 유대인들』에서 “기독교 지역에서 팽배한 '예수살해자'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과 비교해 볼 때 이라크 유대인들과 페르시아 유대인들이 살았던 바그다드와 그 밖의 많은 지역의 분위기는 (유럽보다) 훨씬나았다.”고 말했다.


3.2. 팔레스타인 유대 공동체의 재건


이슬람의 폭력성이 분쟁의 원인이라는 주장이 성립하려면 분쟁이 발생하지 않은 기독교권에서보다 이슬람권에서 박해가 많았어야 할텐데 그렇지 않았죠? 심지어 이슬람권 내에서도 팔레스타인은 박해가 드물었습니다.


팔레스타인은 6세기부터 11세기까지 무슬림의 지배를 받다가 12-13세기에 십자군의 지배를 받습니다. 전자의 시기에 무슬림들이 대체로 관용적이었다는 것은 이전 글에서 설명했습니다. 십자군 시기에는 박해가 심해지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했습니다. 이후 살라딘의 아이유브 왕조가 십자군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을 정복고, 그 뒤를 맘루크 왕조가 이어갑니다. 맘루크는 팔레스타인에서 가장 유대인을 박해한 왕조로 손꼽힙니다.


맘루크 왕조에서 비무슬림의 지위는 팔레스타인을 지배한 이전의 어떤 다른 무슬림 왕조에서보다 열악해졌다. 역사학자 노르만 스틸만(Norman Stillman)은 무슬림 대중의 폭력이 유럽에서처럼 대량학살로 발전하지 않았다는 “중대한 차이”는 있지만 “맘루크 왕조에서 유대인들의 생활은 중세 기독교 유럽에서와 많은 측면에서 유사하다."고까지 본다.


하지만 적어도 동시대 유럽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팔레스타인의 동포들은 억압받고 있지 않았다. 1334년의 순례객 이삭 첼로(Issac Chelo)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행복하고 고요하게 살고 있다. 왕실이 정의롭고 위대한 덕분이다.”고 보았다. 그로부터 한 세기 후 1434년에 엘리자(Elijah)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은 이스마엘인들과 나란히 무역을 다니고, 내가 언급했던 다른 지역들에서와는 달리 양자 간의 질투도 없다.”라고 설명한다. 이들이 남긴 짤막한 기록에서는 어떠한 박해도 언급되지 않는다. ...


예루살렘에 정착한 이탈리아 출신의 랍비 이삭 메티프(Isaac Meir Latif)는 1470년에 “아랍인과 우리들의 관계는 좋다. 그들은 평소에 우리를 폭행하거나 경멸스럽게 대하지 않는다.”라고 기록했다. ...


1487년에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저명한 랍비 오바댜(Obadiah)는 현지 상황을 상세히 들려준다. 정착 이듬해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 지역에서는 아랍인들이 유대인을 박해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지역을 동서남북끝까지 여행 다니는 동안 누구도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낯선 이들에게 매우 친절했고, 특히 아랍어를 모르는 이들에게 더욱더 그러합니다. 유대인들 여럿이 무리 지어 있는 것을 보아도 불쾌해하지 않습니다.”고 설명했다.


맘루크 왕조가 멸망한 뒤에는 오스만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통치합니다. 오스만은 유대인에게 관대하기로 매우 유명한 국가였고, 많은 학자들이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를 내놓았습니다. 여기서는 한 가지 연구만 언급하고 끝내겠습니다.


16세기 예루살렘의 이슬람 법정 기록(sijill)을 연구한 [유대인] 역사학자 암논 코헨(Amnon Cohen)은 무슬림과의 사이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유대인들은 주저하지 않고 (이슬람) 법정에 소송을 제기했다.”고 설명한다. 이슬람 법정에 대한 신뢰는 종종 랍비들을 낙담시켰는데, 유대인끼리의 소송도 이슬람 법정에서 해결하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3.3. 세속주의와 평등권이 가져온 변화


이처럼 팔레스타인에서는 학살이나 강제개종이 매우 드물었고, 추방 사례는 아예 없었습니다. 유럽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고 다른 이슬람권과 비교해도 관용적인 편입니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팔레스타인은 고대 그리스의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서 일찍부터 다원주의적 의식이 강했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관용적이라고 보는 학자들을 여럿 보았습니다. 이런 건 학설이라고 말하기엔 근거가 부족해서 책에서 따로 언급은 안했습니다만, 어느 정도 일리 있는 추측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 이처럼 1천 년이 넘도록 팔레스타인은 다른 지역들보다 종교적 갈등이 약했으니, 이슬람의 폭력성이 분쟁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말이 안 되겠지요? 여기에 쐐기를 한 번 더 박자면, 분쟁이 발생한 20세기 초는 오스만 제국이 세속주의를 실시하고 종교간 평등권을 인정해 무슬림과 비무슬림 간의 사이가 돈독해진 뒤였습니다. 그러니 종교 운운하며 폭력성을 말하는 건 시대상을 모르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죠.


[19세기 중반부터 실시된] 개혁은 팔레스타인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왔을까? ... 개인에 대한 종교 공동체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관계는 더욱 수평적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에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던 여러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은 당시 무슬림과 유대인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다고 회고한다. 정치학자 메나헴 클레인(Menachem Klein)은 『공통의 삶 : 예루살렘과 야파(Jaffa), 헤브론에서의 아랍인과 유대인』에서 이러한 증언을 잘 정리해 놓았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 보겠다.


야콥 여호수아(Ya'akov Yehoshua)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인과 무슬림들은 집 뜰을 공유했다. 우리는 한 가족 같았고, 우리 모두가 친구였다.” ... “무슬림 여성들은 저녁에 우리 어머니들과 이야기하기 위해 위층에서 내려왔다.” ... “아이들은 함께 놀았고, 동네에서 다른 아이들이 우리를 괴롭히면 우리 뜰에 사는 무슬림 친구들이 보호하러 와주었다.”


요나 코헨(Yonah Cohen)은 자서전에서 심지어 “아랍 목동들도 유대인들과 친했고 모든 유대교 계율과 관습을 알았다.”고 적었다. (그의 아버지 랍비) 하캄 게르숀(Hakham Gershon)은 단칸방에서 유대 남자아이들을 가르치는 전통 소학당(heder)을 운영했다. (예루살렘의) 셰이크 자라(Sheikh Jarrah)에서 아들들을 입학시키러 (아랍) 부모들이 찾아오자 랍비는 깜짝 놀라며 아랍 소년들에게 유대 교육은 적절치 않다고 거부했다. 그러자 부모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랍비여, 그건 문제가 되지 않소. 아이는 당신으로부터 바람직한 행실을 배울겁니다. ... 아이가 크면 그때 우리네 학교에 보내면 됩니다.”


메이르 헤페츠(Meir Hefetz)는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디브 니메르(Dib Nimer)를 기억한다. 그는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에 (랍비) 하캄 엘라자르 미즈라히(Hakham Elazar Mizrahi)에게 할례를 받은 무슬림이다. 그가 태어나기 전에 형제들 여럿이 죽었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는 ... (유대 율법에 따라) 할례를 시켜 장수를 기원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는 자라면서 벤 시온(Ben Zion)이라는 이름을 받아 우리 유대인들 사이에서 사용했다.


이처럼 개혁 이후로 유대인들이 아랍인과 잘 어울려 지냈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에는 '아랍 유대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서 ‘아랍 유대인’이란 단순히 아랍 지역에서 사는 유대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랍 정체성을 가진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의 유대인은 종교적 정체성과 혈연적 정체성이 혼합된 개념이고, 아랍 정체성은 언어를 핵심으로 한 여러 문화적 특징을 공유하는 문화적 정체성입니다. 그러니 아랍 유대인이라는 복합적 정체성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중세부터 팔레스타인에서 쭈욱 살아온 유대인들은 당시에도 '아랍화된 유대인'이라고 불렸고요.


그러므로 다른 시기도 아닌 20세기 초에 이슬람에 내재한 종교적 폭력성으로 인해 유대인과 분쟁이 일어났다는 주장은 변화된 사회상과는 동떨어진 시대착오적인 괴담일 수밖에 없다.




자, 이제 글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좀 하고자 합니다.


책에서 종교의 폭력성을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를 자세히 설명습니다. 요약하면, 교리와 실제 행태가 다르고, 후자는 시기나 지역, 집권자 등마다 다양하고, 무엇보다도 어떤 게 종교가 원인이 되어 나타난 폭력인지를 알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어떤 폭력을 ‘종교적’ 폭력으로 정의할 것인지 판별하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예를 들어, 이교도를 대상으로 한 약탈은 종교가 원인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단지 안보가 취약한 집단을 노린 범죄였을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폭압적인 정부나 반란군이 신도나 이교도를 가리지 않고 모두 박해한 경우에는 종교와 무관한 듯해 보이지만, 전자보다 후자의 피해가 두드러지는 사례에서는 종교적 동기가 다소나마 개입되었을 여지가 생긴다.


제가 소스북으로 두 종교권의 박해 사례들을 쭈욱 보다 보니 종교적 박해로 분류되는 폭력의 대부분은 약탈이 가장 큰 동기였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실제로 약탈이 목적이었다는 관찰자의 기록이 있는 경우가 있고 많은 박해가 사회가 어지러울 때 생겼다는 점도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겠지요.


요즘 사람들 다들 먹고 살기 힘들다 힘들다 하지만 옛날에 비할 바는 못 되죠. 옛날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정말로 빈곤하게 살았고 추가적인 수입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범죄행위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구나 도덕심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니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해줄 구실이 필요했고, 그게 종교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면 이슬람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욕하는 사람들도 참 많습니다. 종교가 없는 사람의 대부분은 모든 종교를 나쁘게 보는 듯하고요. 그런데 종교는 - 신이 존재하건 아니건 관계없이 - 인간이 만들고 이용하는 사회적 도구입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행나쁜 짓은 - 심지어 좋은 행위도 - 종교가 없더라도 행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럼, 종교는 무의미한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도구'이기 때문에 인간이 어떤 의도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효과성에서 차이를 가져옵니다. 일반적으로 종교는 개인의 삶에 원동력이 되어 줄 수 있고, 구성원 간의 결속을 강화시켜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러니 종교가 올바른 길을 가도록 만드는 게 중요합니다.


재밌는 사실 하나 알려드릴까요? 유대인을 제외하고 팔레스타인을 맹목적으로 비판하는 가장 큰 집단을 꼽자면 단연코 기독교도입니다. 그런데 무슬림을 제외하고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가장 큰 집단 역시도 기독교도입니다. 심지어 실천적 영역에서는 무슬림보다 기독교도들이 팔레스타인더 적극적으로 니다. 같은 기독교도끼리 왜 이렇게 정반대의 행동을 할까요?


저는 이게 단순히 도덕성의 차이에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를 인식하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팔레스타인인들에게 고향에 살 자격이 없고 식민 지배를 인내하라고 말하는 이들은 '우리'의 범위가 '기독교 신자'로 제한적입니다. 반면, 팔레스타인인들이 겪는 불의에 공감하고 힘을 보태는 기독교도들에게 '우리'의 범위는 '인간'입니다.

* 후자가 보통 도덕적이라고 말해지긴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닙니다. 전자는 좁은 범위의 '우리' 안에서 구성원을 더 잘 보살필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우리'를 '국민'으로 제한하는 걸 생각해보면 감이 오실 겁니다.


종교적 박해가 예로부터 끊임없이 계속된 것은 바로 전자와 같은 행태 때문입니다. 종교가 하나의 사회 안에서 나와 남을 구분짓는 경계선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힘이 강한 집단이 약한 집단을 괴롭힐 수 있는 '정당한' 동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만약 고대나 중세의 종교가 '우리'의 범위를 '국민'이나 '인간'으로 확장할 수 있었다면 박해의 빌미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랍 유대인'이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함의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19세기 중순부터 시작된 오스만의 세속주의는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이 종교를 넘어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즉, 같은 아랍인)을 형성하는 발단이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유대인들 역시 아랍인들과 '우리'라는 인식을 공유했고 '아랍 유대인'이 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과 그 밖의 아랍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유대인들은 유대 국가를 원치 않고 오스만의 울타리 내에서 아랍-유대 연대의 길을 걸으려 했다. 양자의 공존을 강조하며 “아랍-히브리인”이라는 필명으로 기사를 쓰는 유대인도 있었고, 아랍어를 배워서 아랍인들과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도 있었다. 이런 생각이 문자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소수의 지식인들만 공유하던 생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가령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만든 신문 『하쯔비(ha-Zevi)』의 인터뷰에서 가자의 유대인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은 형제처럼 지낸다.”라고 응답했다. 역으로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도 언론이나 일기에서 유대인 이웃을 “토착민”, “동포”, “아랍 태생의 유대인”, “유대적인 아랍인”으로 부르며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의식했다.


그러므로 아랍인과 유대인은 극단적인 종교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종할 수 없는 숙명적 적이 아닙니다. 그저 세상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고, 심지어 하나의 공동체가 될 수도 있었을 만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그러니 영양가 없는 종교적 편견은 집어던지고 실제로 분쟁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래서 원인을 찾아내고 그 원인을 제거해야 분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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