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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환빈 Feb 28. 2024

해제| 2장 2절 - 유대인을 구원한 이스마엘 왕국

(파란색 글씨는 인용문입니다.)


유대인을 구원한 이스마엘 왕국... 제목부터 감이 잘 안 오시는 분들이 많지요?


이스마엘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입니다. 경에서 유대인의 계보는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그의 둘째 아들인 이삭으로 이어지는데,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첫째 아들이자 이삭의 형입니다. 그는 이삭을 놀리다 아브라함에게 쫓겨나 남쪽(아라비아반도)으로 내려갔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아랍인의 선조로 믿어집니다.


중세 기록을 찾아보면 유대인이나 기독교도들은 아랍인을 흔히 이스마엘이라고 칭합니다. 그리고 부정확하지만 드물게는 무슬림을 부르는 호칭으로도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마엘 왕국은 뭘까요? 바로 아랍인들이 세운 국가를 의미합니다. 태초의 아랍 국가는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로부터 시작되었으니 무슬림 국가이기도 합니다.


그럼 이제 제목이 이해되시지요? 유대인을 구원한 아랍 무슬림 국가. 얼토당토않게 들리는 이 말은 과연 사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이번 편부터는 요약을 대폭 줄이고 추가 설명을 늘리겠습니다.



2.1.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유대인들


기원전 1세기 중반부터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기원후 66-73년, 그리고 132-6년에 반란을 일으키지만 패하고 맙니다. 로마는 후환을 없애려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not 팔레스타인)에서 추방합니다. 그러나 이것 말고는 유대인을 특별히 나쁘게 대우하지는 않았는데, 4세기에 들어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부터는 박해하게 됩니다.


기독교가 왜 유대인을 박해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학계에서 연구가 한창입니다. 과거에는 유대인들이 '예수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에 박해가 시작되었다는 속설이 있었습니다만, 예수의 사망 직후의 초기 기독교도들은 유대인을 배척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먼저 개종시켜야 할 집단으로 간주했습니다. 그러나 한 세기 후 기독교가 독립적인 종교로 설립되면서부터 박해가 시작됩니다.


역사학자 가뱅 랭뮈어(Gavin Langmuir)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대교로부터 경쟁의식을 느끼는 “태생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공유하지만 예수의 신성성과 가르침을 부정한 유대인의 존재는 기독교의 정통성을 위협했다.


기독교 성직자들은 유대교를 비판하며 깎아내렸습니다. 그런데 이 와중에 평신도들은 유대교 시나고그를 방문하고 유대인의 풍습을 따라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했으나 과거의 습관을 버리지 않은 사람도 있었고, 다원주의적 전통의 영향으로 유대 풍습을 따라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았던지 설교를 하려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유대 명절에 날을 잡아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성직자들은 유대교에 강렬하게 반감을 품게 되었죠.


성직자들의 반유대주의(*)는 로마의 국법에 반영되었습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고 팔레스타인은 비잔틴 제국(=동로마)의 영토가 되었는데, 4세기 후반부터 유대교를 억압하는 각종 차별법이 제정되고 점차 강화합니다. 다만 이런 법들이 실제로 잘 적용되었던 것은 아니고, 유대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 역시 대동소이하게 차별을 겪었습니다.

*반유대주의는 근대 이전과 이후를 구분하여 전자를 '반유대교주의'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글에서는 구분 없이 사용하였습니다.


이렇게 차별이 강화되자 자연히 적지 않은 수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하게 됩니다. 일부는 강제개종 당했고요. 또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해 오는 기독교도들이 늘어나면서 팔레스타인의 종교별 인구 지형은 크게 변화합니다.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다 보니 학자들마다 의견이 매우 다르지만 대체로 6세기경에는 기독교도가 다수 인구거나 그에 준할 정도로 많아졌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렇게 팔레스타인에서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고 차별을 겪자 유대인들은 당연히 비잔틴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만의 힘으론 어쩌질 못하니 외부의 도움을 기다렸습니다. 때마침 7세기에 페르시아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때다 싶어서 페르시아 편을 들고 기독교도들에게 보복했는데, 몇 년 만에 비잔틴이 다시 팔레스타인을 수복합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의 처지는 굉장히 위태로워집니다. 비잔틴 전역에서 유대인을 강제개종시켜야 한다는 칙령까지 내려졌는데요, 바로 그때 나타난 게 '이스마엘 왕국'이었습니다.


2.2. 무슬림들이 되찾아준 반쪽짜리 성지


이슬람은 메카의 상인이었던 무함마드에 의해 창시되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인근 도시인 메디나에서 세력을 키유대인들과 여러 차례 싸워서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이후 비무슬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고 안전을 보장하는 관계를 정립합니다.


여기서 잠시 살펴봐야 할 점이 있습니다. 바로 아라비아반도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의 관계입니다. 우리 생각과 달리 양자의 구분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를 믿는 아랍인도 많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유대 공동체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아랍인이 꽤 있었다고 합니다. 6세기에는 예멘에서 힘야르(Himyar)의 국왕이 유대교로 개종했고요. 일부 학자들은 이때 대다수의 아랍 주민들이 함께 개종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이전 글에서 설명했듯이 이 시기의 유대인은 원칙적으로 유대교를 믿는 사람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랍인이 유대교로 개종하면 유대인이라 부를까요 아니면 아랍인이라 불러야 할까요? 이에 대해서 학자들도 명확히 알고 있는 바는 없는 듯합니다. 추측컨대, 1세대 정도는 아랍인이라 불리고 2-3세대부터는 유대인이라 불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마치 오늘날 이민자들처럼 말이지요.


무함마드가 창시한 이슬람은 양자의 모호한 관계에 큰 벽을 세우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2세기 정도 지나면 대다수의 아랍인이 이슬람을 믿게 되기 때문에 아랍인과 무슬림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될 정도가 되니까요. 그렇지만 여전히 양자의 관계에는 모호한 틈이 있었고, '아랍화된 유대인'이라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더 자세히 설명드리겠습니다.


무함마드의 영도 아래 무슬림들은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하고, 그의 후계자인 칼리파들이 팔레스타인을 정복합니다. 무슬림의 지배가 시작되자 유대인들에게는 한 가지 커다란 변화가  찾아옵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거주할 권리를 인정받은 겁니다.


70년 경 무렵에 로마가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추방한 이래로 근 600년 가까이 유대인들은 이곳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에서 특별한 장소입니다. 고대에 유대인들은 '성스러운 신전'(이하 성전으로 표기)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게 예루살렘의 동남쪽 둔턱에 있었습니다. 이곳을 성전산이라 부릅니다. 로마가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에 성전은 불타버렸고, 이후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지조차 못하니 성전산은 수세기 동안 폐허로 남아 있었습니다.


자연히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허락해 준 무슬림들을 환영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 기쁨은 오래지 않아 변질되는데요, 왜냐면 '성전산의 접근'은 금지당했기 때문입니다. 이슬람은 유대교와 기독교와 뿌리를 같이 하기 때문에 성전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고, 이곳에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인 알아크사 모스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비무슬림권에서는 알아크사 모스크가 특정한 모스크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알려졌습니다. 실제로는 성전산에 있는 여러 모스크와 기념비적인 건물 등을 총칭해서 하나의 거대한 모스크로 보고, 그게 바로 알아크사 모스크입니다.


아래 보이는 지도는 유대인들이 부르는 성전산의 범위를 나타낸 것이자 동시에 무슬림이 말하는 알아크사 모스크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이 부지를 하람알샤리프(고귀한 성역)라고도 부릅니다.

(출처 : Middle East Eye)


성전산 전체가 하나의 모스크가 되었으니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을 이곳에서 추방했습니다. 유대인들로서는 자신들의 성지를 빼앗겼다는 분노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앞서 말했듯이 유대인들은 6백 년간 예루살렘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어떤 게 더 낫다고 생각했을까요? 당연히 무슬림의 지배를 선호했을 겁니다. 10세기에 어느 카라이파 유대인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유대인들이 떠난 후 (성전산은) 5백 년 넘는 기간 동안 폐허가 되어 하이에나들이 서식했고, 어떤 이스라엘인도 올 수 없었다. 동쪽에서 온 유대인들은 티베리아스[원문은 Mazziah]에 와서, 서쪽에서는 가자로, 남쪽에서는 소알(Zoar)로 와서 기도를 드렸다. ... (5백 년 후) 신은 그의 백성에게 연민의 문을 여시고 그들을 성스러운 도시[예루살렘]로 데려와 정착시키니, 그들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항상 기도드릴 장소를 만들고 그곳에 매일 밤 파수를 세웠다.


2.3. 딤미가 된 유대인


이제는 성지의 문제를 넘어서 유대인들이 무슬림의 지배를 종합적으로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알아봅시다. 무슬림 국가에서 비무슬림은 흔히 '딤미'(=보호받는 자)라고 불렸습니다. 세금을 내면 종교의 자유와 안전 등을 보장받는다는 의미에서였습니다.


물론, 현실은 달랐습니다. 세월이 갈수록 딤미가 지켜야 할 차별적인 의무가 만들어지고 자유와 권리는 옥죄어졌습니다. 세금에 대한 부담도 커져서 개종의 유혹을 쉽게 느꼈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은 적어도 중세 초기까지는 박해가 심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러한 학설이 나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견된 중세 유대인들의 고문서입니다.


970년부터는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파조(Fatimid Caliphate/909-1171)가 팔레스타인을 정복해 약 한 세기 동안 통치한다. 이 시기의 유대인의 삶은 상세히 연구되었는데 카이로(Cairo) 인근의 푸스타트(Fustat)에 있는 시나고그와 묘지에서 발견된 약 30만 부의 고문서 덕분이다. 학자들은 이를 ‘카이로 게니자(Cairo Geniza)’ 또는 게니자 문서라고 부른다. 카이로 게니자의 상당수는 10-12세기 중반 사이에 쓰였으나 9세기 말이나 19세기까지의 문서들도 일부 있고, 이집트 지역 밖에서 작성되었거나 관련된 내용이 적힌 문서들도 많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중세 이슬람권 유대인의 생활상은 게니자 문서에 굉장히 많이 의존하고 있다.


카이로 게니자를 연구한 학자들은 무슬림 국가에서 비무슬림들이 크게 억압받아왔을 것이라는 서구사회의 통념과는 달리 유대인의 권리가 대체로 잘 보장되었다고 본다. 납세증명서만 있으면 어느 지역이든, 심지어 국경 너머로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었다. 직업의 선택도 자유로워서 유대인들은 농부나 상인, 염색업자, 무두장이, 대장장이, 세공사, 의사, 관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정부의 승인하에 유대 공동체만의 대표를 선출할 수 있었고 혼사나 유산, 구성원 간의 불화 등 공동체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대 법정이 공인되어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다. 또한, 유대 공동체의 의견은 관리의 임명이나 해임에도 영향을 끼칠 정도로 존중받았다. 유대 학교들은 정부로부터 보조금도 지원받았다.


종교적 자유도 굉장히 잘 인정받았습니다.


놀랍게도, 예루살렘에서 공통의 성지로 인한 종교적 갈등도 없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동편에 인접한 감람산(Mount of Olives)에서 자유롭게 종교의식을 치르고 기도를 드렸다. 성전산을 갈 수 없어서 차선으로 선택한 장소였겠지만, 예루살렘 출입을 금지당한 로마 시기부터 감람산을 찾아와 성전산을 내려다보며 기도하는 전통을 만들어 왔었고 탈무드에서 신의 임재(Shekinah)가 성전산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는 가르침이 있어 만족했던 듯하다. 감람산 다음으로는 성전산의 문들이 기도 장소로 빈번히 이용되었다. 때때로는 순례객들과 함께 성전산의 여러 문을 둘러싸고 기도를 드리는 행동까지도 허락되었다. 


여기서 마지막 두 문장을 주의해서 다시 봅시다. 성전산에는 여러 출입구(gates)가 있는데 무슬림들이 알아크사 모스크를 들어가기 위해 들락 나락 합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이런 출입구를 둘러싸고 유대교 의식을 치르는 걸 허락받았습니다.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느낌이 잘 안 오신다면, 커다란 교회 출입구에서 무슬림들이 이슬람 의식을 치르고 있는 걸 상상하면 됩니다. 이런 게 허용되는 사회는 과거에도 지금도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오늘날의 이슬람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그만큼 중세 초기에는 무슬림들이 종교적으로 관용적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하게 봐야 할 점은 팔레스타인/예루살렘으로의 이주입니다.


예루살렘으로의 이주도 자유로웠다. 랍비들은 이주를 권장하지 않았고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떠나더라도 개의치 않았으나, 게니자 문서에서는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해 온 것이 확인된다. 그들 중 상당수는 예루살렘으로의 이주가 메시아의 도래를 앞당길 수 있다며 이주를 장려한 카라이파 유대인들이었다. 카라이파는 포교 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랍비파로부터 이단으로 판정받았으나 무슬림 정부로부터는 탄압받지 않고 오히려 랍비파보다 우대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2장 1절에서 설명한 것처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밖에서 살았던 것이 자발적 선택이었다는 점을 명확히 해줍니다. 유대교나 이스라엘에서 가르치는 역사, 즉 유대인들이 강제로 추방당해 어쩔 수 없이 유럽에서 2천 년을 살았다는 주장은 허구라는 것이지요.


이러한 점들을 종합해서 볼 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이 기독교보다 무슬림의 지배를 '상대적'으로 선호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는 중세 초기가 끝나갈 무렵에 십자군이 벌인 만행으로 재확인됩니다. 십자군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대량학살해 가며 팔레스타인으로 쳐들어왔고, 예루살렘에서 또다시 학살을 자행하고 많은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들였습니다. 이후 십자군이 세운 라틴 예루살렘 왕국은 유대인의 예루살렘 거주를 다시금 금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은 한 세기 후 무슬림의 지배가 복원된 후였습니다.




요약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는데도 쉽지가 않네요. 뭐 하나를 빼놓으면 뒷 내용이 설명 안 되는 것들이 많아서... 일단 앞으로 글을 좀 더 써가며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오늘의 글을 정리해 볼까요. 기독교의 유대인 박해는 세계사를 조금이라도 들여다보신 분들은 다 아는 유명한 주제입니다. 무슬림의 박해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고 또 잘못 알려진 게 많습니다. 게니자 문서와 같은 명확한 증거를 연구한 책들이 20세기 중후반부터 나왔는데, 이런 책들이 국내에는 잘 소개가 안 되고 있습니다. 아마 너무 어려워서 번역할 엄두도 못 내는 거겠지요. 그렇지만 정말 흥미롭고 중요한 시사점들이 많은데 안타깝습니다.


국내에 출간된 수많은 교양서적들과 제가 읽은 서양 학자들의 학술서적을 비교하면, 전자는 박해가 심했고 후자는 약했다고 설명합니다. 기독교권이든 이슬람권이든 상관없이 말이지요. 이러한 차이는 오래 전의 학자들은 '차별법이 제정되면 그대로 실행되었을 것이다'라고 가정한 반면, 근래의 학자들은 '차별법이 제정되어도 실행되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게니자 문서는 정말로 큰 도움이 됩니다. 이슬람권에서의 악명 높은 차별법 중 하나는 비무슬림에게 열등한 지위를 나타내는 옷차림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종래의 학자들은 이게 유대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으나, 정작 게니자 문서에서는 중세 초기까지는 이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습니다. 이를 통해서 차별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서 게니자 문서가 가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시사점은 이를 연구한 학자들이 거의 모두가 유대인 학자라는 사실입니다. 친이스라엘계에서는 무슬림들이 옛날부터 유대인을 심하게 박해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정작 유대인 학자들은 이에 대한 반증을 내놓고 있으니, 참 아이러니하죠? 바로 이런 사실이 우리가 분쟁을 다룰 때 '이분법적 사고를 넘어서'(책의 부제)야 하는 이유입니다. 유대인 vs 아랍인 구도는 시온주의자들이 현대에 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고, 우리가 반드시 깨트려야 하는 잘못된 관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살펴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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