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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일 블루 Mar 16. 2024

순간의 영원(5)

소소하게 오래오래 가는 기억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는 어제처럼 반갑다. 최근 운동을 해서 모습이 좀 바뀐 걸 빼면 언제 봐도 편안한 친구랑은 18년도에 만났다. 그때는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서 숨을 쉬는 시절이었는데 3일을 일 때문에 꼬박 밤을 새기도 하고 어찌 되었건 혹독한 시기를 같이 보냈던 친구가 서울에 와서 살 것 같다는 말을 들었을 땐 반가움이 앞섰다. 그래서 잡은 약속, 열 두시의 봉천역. 


유명하다고 말만 들었던 로컬 중식당에 가서 웨이팅을 하는 내내 밀린 이야기를 하고, 한 시간 반 만에 만난 메뉴를 나눠 먹고 바삭하게 튀겨진 유린기와 적절하게 버무려진 간짜장을 함께 먹었다. 그러면서 했던 대화가 오래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돈 많으면 뭐 하냐고, 우리 되게 열심히 살았다 같은 의례적인 말들 속에 묻지 못한 아쉬움이라던가,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저렇게 했어야 하는 후회는 숨길 수는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돈 많이 번 친구들 얘기도 조금 하고. 이유도 없이 슬퍼지는 사람들의 근황으로 안부도 나누고.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사이로 그럼에도 이 나이 먹도록 철도 안 드는 게 자랑이라고 짜장면 하나 먹겠다고 전날 열 시간을 서서 일하던 다리로 한 시간 반을 기다리는 나나, 갑작스럽게 서울행 결정해서 네 시간 반이 넘게 올라와서 여기서 짜장면 하나 먹겠다고 있는 너나 둘 다 똑 닮았다는 마무리.


그래, 돈 많이 벌면 뭐 해. 

얘기들이 식탁 위로 떨어지는 순간들이 행복했다. 


내일이 오면 아마도 밀린 일정을 처리해야 할 것이고, 오랫동안 준비한 일들의 보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고, 산재한 일들은 보험처리도 되지 않는 채로 다리의 부종으로 쌓일 것이고.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기억이 내일을 잘 견디게 해 줄 것도 알고 있었다. 소소하게 오래오래 가는 것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다. 옛날일을 꺼내면서 옛날일에 지지 않는 사람들이 좋다. 오후 두 시의 볕을 받으며 입가에 짜장면 소스 닦아가면서 테이크 아웃 카페에서 커피 하나 물고 걷는 지하철 하나 분량의 이야기는 중요하지도 가치가 있지도 않았지만. 당장 통장에 천만 원쯤 찍히는 기분과 이 기분을 비교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 순간이 좋았다.


삶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종류의 것이고 지속이 된다는 건 소소한 것들이 쌓이며 이뤄가는 무언가가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사실 피곤하게 무너지는 침대 위에 다음 날이 오는 것을 알면서 견딜 수 있는 순간들은 스스로가 만드는 이야기들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혹은 스스로 언젠가 만들고 싶은 이야기, 마주하고 싶은 일들을 위해 견디는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오랫동안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지치고 그 일에서 튕겨져 나갔더라도 오랜만에 만나 짜장면 하나 먹자고 한 시간 반을 기다린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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