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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 써 보는 의사 Sep 22. 2024

퇴근 후 맥줏집, 그리고 삶과 죽음의 무게

삶이 가볍지 않도록, 죽음이 무겁지 않도록


창 너머 보이는 노란 간판 아이스크림 가게

가랑비에 교복 입은 학생들이 깔깔대며 뛰어간다

노력에 못 미치는 뜨겁던 하루를 처마 끝 빨간 차양이 가려주고

겁 많던 어린 시절 아버지 등짝 만한 테이블에 앉아

건빵 한 접시 달랑 내놓고 8도씨 벨기에 맥주를 마신다


맥주병에 맺힌 이슬은

나와 세상의 온도차

갈색 병은 겹겹이 서늘함을 입고 잔뜩 달아오른 손바닥을 위로한다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거칠 것 없는 목 넘김에

어느새 손바닥과 맥주병의 온도가 닮아간다


약간 올라온 취기에 조금 흐트러지면 또 어떠리

바삭바삭 건빵 한 조각도 최선을 다해 부서짐을


오늘이 고마운 이유는

이 비가 그치면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음에

잔뜩 힘이 들어갔던 어깨를 쓰다듬는

옆 테이블 손님들의 싸움인지 대화인지 왁자지껄 높은 목소리

내일이 나아짐은 그저 오늘의 아쉬운 노력에 있음을

독극물 한 방울의 교훈이 감사하다


이 손바닥 같은 공간과 찰나의 순간들 내일도 기억하리

잠깐 내리다 만 가랑비처럼 흘러내리는 액체 몇 줄기가

내 몸과 정신을 구원하던 시간을







삶이 가볍지 않은 만큼

죽음도 무겁지 않다



글을 쓰던 날 비가 내리고 있었고, 나는 치킨 겉껍질을 뜯고 있었다. 맥줏집 창 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치킨 겉껍질을 좋아한다. 아무 생각 없이 맛있게 먹고 나면, 나도 잘 튀긴 치킨 겉껍질 같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바삭하고 영양가 없는 느낌. 먹을 땐 맛있는데 먹고 나면 뱃속에는 몹쓸 기름 덩어리만 남을 뿐이다.


나는 죽음이 두렵다. 초등학교 때부터 꿈속에서 죽거나 죽임 당하기 일쑤이고, 심지어 때로는 남을 죽이는 꿈을 꿀 때도 있다. 꿈의 대가가 한 말이 기억난다. 꿈은 내용이 아니라 정서가 중요하다고.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꿈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정서, 그때 아팠던 심장, 숨 막히는 느낌, 그런 것들이 중요하다. 그것이 지금 나 자신의 진실과 깊게 닿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가? 아마도 꿈에서 누군가를 죽였던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


꿈에서 모니터로 화면을 전환해 이번에는 다큐를 본다. 철새 무리를 볼 때면 생각한다. 철새는 때에 따라 그 자리를 떠나고 돌아온다. 그렇다면 철새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인가? 현실에 대처하는 것인가?


여기 하나의 직선이 있다.





B에서 D까지 가는 것을 흔히 인생이라고 한다.

B에서 태어나 D에서 죽는다.


그러나 나는 이 직선을 구부려 B가 D에 닿게 하는 것을 인생이라고 말하고 싶다. 말하자면 B와 D가 만나 하나의 원이 되게 만드는 과정을 인생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제 시작과 끝이 만났으므로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모른다. 어디가 삶이고 어디가 죽음인가, 구분이 안 된다. 삶이 죽음이고 죽음이 삶이다. 삶은 언제나 죽음과 만나게 되고 그러므로 언제든 죽을 수 있는 삶이 된다. 인생이 원이 되면 그 곡선 상에서는 죽음과 삶이 공존하고 언제나 죽음을 마주한 삶이 되는 것이다.


현인들은 그렇게 살다 갔다. 

'나의 빛을 가리지 말라'고 외치던 디오게네소스. 몇몇 실존주의자들. 비트겐슈타인. 부처님. 예수님. 그리고 수많은 성인들도 그랬다. 

하이데거는 정말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비슷한 말은 했다. '죽음을 회피하지 말고 죽음으로 앞서 달려 나가 결단하여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을 실현하라. 죽음을 마주 보고 살라'고 했다. 죽음을 마주 보고 살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게 된다. 


살면서 죽음을 가깝게 의식할수록 인생은 원이 되어간다는 식의 격언들은 많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는 류의 말들. 죽음이 삶이 될 때,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끝과 끝이 맞닿아 동그랗게 완성된 고리가 된다. 원은 피타고라스 시절부터 완전체의 상징이었다. 삶과 죽음을 원 비스름한 형태로 비유하는 서술들도 많이 있다. 한 문장이 거의 한 페이지에 달하던 ‘죽음의 한 연구’라는 소설에서도 그런 비슷한 언급이 나왔던 것 같다.

앞서 철새 얘기를 했다. 죽음은 최후의 현실이다. 철새는 현실을 도피하는 것인가? 현실에 대처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나는 현실을 도피하고 있나? 마주 보고 대처하고 있나?



자, 그런데 여기서 누군가는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왜 저 직선의 양 끝을 B와 D로 칭했을까?  A와 B도 아니고.


눈치 빠른 분은 이미 알아챘겠지만, 한 철학자가 남긴 유명한 말 때문이다.

인생은 B와 D 사이에 C다.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 


선은 점으로 이뤄진다. 







위 그림의 B와 D를 이은 선은 무수한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점들이 Choice 이다. 무수한 선택의 점들이 삶과 죽음 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B와 D가 만나서 직선이 아닌 원이 되고 나면, 말했듯 B와 D 사이는 없다. B가 D고, D가 B인데, 무슨 B와 D 사이가 있겠는가? 그리고 B와 D 사이가 없다면, B와 D 사이의 C라는 말도 없다. 


이제 B = D = C 가 된다. 다시 말해, 내가 하는 모든 선택이 삶과 죽음과 함께 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내 모든 선택은 곧 삶이 되고 죽음이 된다. 매 순간 선택할 때마다 그 선택은 삶이 될 수도, 죽음이 될 수도 있다.


삶이 가볍지 않은 만큼 죽음도 무겁지 않다.


이 둘 사이의 무게를 맞추는 것이 선택이다. 우리 선택에 따라 삶이 더 무거우질 수도, 죽음이 더 무거워질 수도 있다. 혹은 삶이 너무 가벼워지거나, 죽음이 너무 가벼워질 수도 있다. 매 순간 선택의 점들을 찍어서 인생을 채워나가고, 삶과 죽음 사이에 균형을 맞추어 그저 원이 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한 번 죽을 뻔한 적이 있다. 그 사건은 죽음이 언제나 삶 속에 끼어들어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 같다.

국민학교(그때는 국민학교였다) 4, 5 학년쯤이었을 것이다. 전주 근처 어딘가로 물놀이를 갔다가 빠져 죽을 뻔했다. 그때의 풍경이 여전히 기억난다. 아직도 현실 같지 않지만, 물속에 잠길 때와 가까스로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 때 완전히 다른 그 풍경이 여전히 기억에 남는다. 

물속은 죽음과 패닉이었고, 물 밖은 정말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가로운 삶이었다. 다리 위에서 나를 보며 아무렇지 않은 듯 평화롭게 낚시하던 아저씨가 아직도 생각난다.  


물속 죽음과 수면 밖의 삶, 말 그대로 '삶과 죽음이 수면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나이가 좀 들고 집안 어른들이 떠나가기 시작하고 희소식보다 부고가 많아지면서, 사실 삶과 죽음은 생애 내내 계속 수면에서 만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저 내가 못 본 체하고 있었음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수영을 하려면 우리는 몸을 반쯤은 물속에 두고, 반쯤은 물밖에 내밀고 가야 숨을 쉴 수 있다. 너무 깊이 들어가면 죽음도 그만큼 무거워져 우리를 코끝가지 덮치기 시작하고, 너무 뜨면 삶이 마냥 가벼워져 스티로폼처럼 방정맞게 떠다니게 된다.


나는 여전히 수면 위에서 방정맞게 물장구치든지, 아니면 꼬르륵 자맥질 중이다. 그러다가 가끔씩 어떤 어르신들을 본다. 그 어르신들은 마치 물 위를 누워서 미끄러져 걷듯 헤엄친다. 혼자만 다른 세계를 유영하고 있는 느낌이다. 

가만 보니 그 어르신들이 여유롭게 힘을 빼고 천천히 수영을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때로는 철없는 다이빙으로 수영장 바닥에 머리를 박기도 하고, 때로는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듯 수면 밖으로 치솟아 오르기도 하고, 그렇게 절망과 희망, 수많은 희로애락을 거치며 비로소 몸에 새겨진 삶의 지혜와 굳건한 의지로 삶과 죽음을 수면에 딱 맞닥뜨린 채 전혀 힘들이지 않고 나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라앉지도 표표히 뜨지도 않고 딱 중간 깊이에서 그렇게 말이다.



나는 언제쯤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월요일을 준비하는 일요일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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