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깨어나는 자들
SF소설 《무의식、통제사회》
하진은 폐선 구간의 녹슨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20년 전, 나즈라가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아무도 그들의 진짜 의도를 알지 못했다. 그들은 인류에게 '진화'를 약속했다. 뇌파 동기화 기술을 통해 인간의 의식을 확장하고, 집단지성을 실현하겠다고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믿었다.
관자놀이의 흉터를 만지작거리자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나즈라의 실험에서 남은 공명석 파편이었다. 그것은 늘 고통의 상징이었다. 통제받는 기계처럼, 자신이 누군지도 모른 채 나즈라의 명령을 따랐던 시절의 흔적.
실험체 A-274. 그것이 그의 이름이었다. 나즈라는 인간의 뇌파를 연구한다며 전 세계에서 '특별한' 피실험자들을 모았다. 하진은 그중 하나였다. 그의 뇌파는 다른 이들과 달랐다. 비정상적으로 강했고,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패턴을 보였다. 나즈라는 이를 '결함'이라 불렀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진동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혈관 속을 타고 흐르며 희미한 온기를 전했다. 마치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듯했다.
"하진 씨."
류진성이 계단 위에서 그를 불렀다. 국립과학원 수석연구원이었던 그는 5년 전, 나즈라의 비밀 문서를 발견하고 저항군에 합류했다. 그는 태블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하진의 뇌파가 실시간으로 출력되고 있었다.
"뇌파가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공명석과 동기화가 진행 중인데... 이건 나즈라의 데이터와도, 인간의 데이터와도 일치하지 않아요."
하진은 류진성을 지나쳐 계단 위로 발을 옮겼다. 그의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주저하지는 않았다.
"익숙한 말이네요. 늘 비정상적이라더군요. 실험체였을 때도, 그들에게서 벗어났을 때도."
그는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틀린 게 아니라면, 비정상이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일지도 모르죠."
그의 옆에서 서연이 숨을 고르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푸른빛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나즈라의 최신 실험체였던 그녀는 3개월 전 하진에 의해 구출되었다. 공명석 통제 시스템의 마지막 버전을 이식받은 그녀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나즈라의 신호를 받았다.
"공명석을... 통제할 수 있게 된 건가요?" 그녀가 물었다.
하진은 고개를 저었다.
"통제한 게 아니에요. 이제야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을 뿐이에요."
그는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공명석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었어요. 그것은 나즈라의 의식과 연결된 매개체였죠. 수천 년 전, 그들은 우리 별을 방문했고 인류의 진화 가능성을 발견했어요. 그들은 인간의 뇌가 가진 잠재력을 보았지만, 그것을 통제하고 싶어했죠."
류진성이 끼어들었다.
"강화도 고인돌에서 발견된 문양들... 청동기 시대 유물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패턴들... 모두 공명석의 원형이었군요."
하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오랫동안 우리를 준비시켰어요. 뇌파 동기화가 가능한 개체들을 선별하고, 세대를 거쳐 그들의 유전자를 퍼뜨렸죠. 제가... 우리가 '특별하다'고 생각한 것은 그들의 오랜 계획의 결과였을 뿐이에요."
서연의 눈이 커졌다.
"그럼 우리는..."
"우리는 그들의 실험체가 아니에요." 하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우리는 인류의 가능성이에요. 그들은 이를 통제하려 했지만, 통제할 수 없는 것이었죠. 인간의 의식은... 그들의 예상을 뛰어넘었어요."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하늘은 이미 변해 있었다. 회색 구름이 나선을 그리며 소용돌이쳤다. 그 아래로 수백 명의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침묵 속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깊고 강렬한 파동. 공명석의 진동과도, 나즈라의 통제와도 다른 파동이었다.
광장 한가운데, 김선주 박사가 서 있었다. 한국 최초의 뇌과학자였던 그녀는 40년 전 나즈라의 실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었다. 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염주가 들려 있었다. 구슬 하나하나에는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공명석의 패턴과 닮아 있었지만, 더 원초적이고, 더 오래된 느낌이었다.
"이건 우리 선조들이 남긴 거예요." 김선주가 염주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나즈라의 계획을 알았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저항할 수 있는 길을 남겼죠. 이 염주는 단순한 유물이 아니에요. 이것은 우리의 의식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증폭기예요."
구슬 하나하나가 차례로 빛나기 시작했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금빛이었다. 시민들의 표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공허했던 눈동자에 감정이 돌아왔다. 두려움, 기쁨, 슬픔, 그리고 희망. 그들의 의식이 서로에게 스며들며 거대한 물결이 되었다.
그 순간 하늘이 갈라지며 거대한 방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끝없이 변화하는 기하학적 문양이 표면을 뒤덮고 있었다. 나즈라의 본거지였다.
"방주가 움직였어요." 류진성이 태블릿을 확인하며 말했다.
"그들의 주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습니다. 전 세계의 공명석이 활성화되고 있어요. 그들이... 최종 동기화를 시도하는 것 같습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나즈라의 실험체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은 차갑게 빛났고, 모든 움직임은 기계처럼 정확했다. 나즈라는 마침내 인류를 완전히 통제하려 하고 있었다.
하진은 방주를 올려다보며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의 진동이 점점 강해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것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았다.
"우리가 특별했던 건..." 하진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통제에 저항할 수 있는 능력 때문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진화했어요.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연결되고, 하나가 될 수 있었죠. 하지만 그것은 통제가 아닌... 공감을 통해서였어요."
서연이 하진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서 푸른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신 따뜻한 금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나도... 이제 알 것 같아요." 그녀가 속삭였다.
"우리가 가진 건 약점이 아니었어요. 우리의 불완전함, 우리의 감정, 우리의 혼돈... 그것이 바로 우리의 힘이었던 거예요."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의식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즈라의 차가운 통제와는 완전히 달랐다. 각자의 개성과 감정을 유지한 채, 그들은 자발적으로 하나가 되어갔다.
김선주가 마지막 구슬을 빛냈다.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입니다."
방주의 표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완벽했던 기하학적 패턴이 일그러지며 붕괴되었다. 나즈라의 통제 시스템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의 의식이 가진 진정한 힘을... 혼돈 속에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늘에서 따뜻한 빛이 쏟아졌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의 여명이었다. 인류는 마침내 자신들의 진정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하진은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나즈라의 흔적이 없었다. 대신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불완전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시작이에요."
새벽빛 속에서, 인류는 처음으로 진정한 자유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