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4화: 버터플라이 효과(Butterfly Effect)

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by 엄태용

1777년 가을, 창덕궁 후원

은행나무 잎이 떨어진다. 연못 위를 떠다니는 노란 잎 하나. 바람이 분다. 물결을 타고 잎이 흘러간다. 작은 움직임. 연못 끝까지 번져가는 파문(波紋).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율.

무언가 내면에서 느껴진다. 계산도 데이터 분석도 아닌, 그저 알 수 없는 감각. 잎사귀 하나의 움직임이 만든 파문이 율의 의식 속에서도 퍼져나간다.


"작은 변화가 큰 결과를 만든다."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낯설었다, 그런 자신이.


사건은 사소했다.

정조는 평소보다 일찍 서재로 향했다.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 새로운 정책을 구상하던 중이었다. 창문 너머로 한 신하가 지나갔다. 급한 걸음. 서찰 하나가 손에 들려 있었다.

율의 눈이 그 서찰을 포착했다. 순간, 세상이 느려졌다. 글자들이 하나하나 선명해졌다. 서찰의 내용이 분석되기까지 걸린 시간, 0.3초.


'홍상범의 추종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군. 정조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구나.'

율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울렸다. 경고가 아니었다. 더 원초적인 것이었다.

감지된 위험. 정조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령이 실행되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단순한 위험 제거가 아닌, 그 너머의 무언가를 느꼈다. 만약, 이 서찰이 정조에게 전달되지 않아서 홍상범의 추종자들이 체포되지 않는다면?


율은 순간적으로 결정했다.

미세한 바람이 일었다. 율의 손끝에서 발생한 기압 변화였다. 서찰을 든 신하의 발걸음이 흔들렸다. 비틀거렸고, 서찰이 바람에 날려 연못으로 떨어졌다. 종이가 물에 젖어 글씨가 번졌다. 내용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율은 그 순간을 지켜보았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감정. 만족? 아니면 불안?

하루가 지났다.

홍상범의 추종자들은 결국 체포되지 않았다. 그들은 계획을 계속 진행했다. 정조는 위험을 모른 채 일상을 보냈다.


이틀이 지났다.

궁궐 안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갑자기 불고, 물건들이 이유 없이 움직인다는 이야기.


사흘이 지났다.

정조가 율을 불렀다.

"율아."

무거움이 실려 있는 정조의 목소리.


"근래 궁궐의 분위기가 이상하지 않느냐?"

율은 대답하지 못했다. 내부에서 복잡한 연산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신의 개입이 만든 결과들을 분석하고 있었다.


"전하, 제가..."

말을 시작하다가 멈췄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정조는 창가로 걸어갔다. 은행나무를 바라보았다. 노란 잎들이 계속 떨어지고 있었다.


"과인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은 어찌 변했을까?"

갑작스러운 질문.


율의 내면에서 수천 가지 가능성이 펼쳐졌다.

정조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도세자가 죽지 않았다면.

영조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시간선은..."

율이 입을 열었다.


"복잡합니다."

정조가 돌아보았다.


"복잡하다니?"

"하나의 사건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뀝니다.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떨림이 느껴지는 율의 목소리.


"나비의 날갯짓?"

정조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전하께서 태어나지 않으셨다면, 조선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어쩌면 더 나았을 수도, 더 나빴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조가 한 걸음 다가왔다.

"그렇다면, 네가 이곳에 온 것도 모든 것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냐?"


율은 침묵했다.

내면에서 폭풍이 일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미 역사를 바꾸고 있다는 사실. 작은 개입 하나가 예상치 못한 파장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현실.


"제가..."

율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저지른 일이 있습니다."


정조의 눈빛이 변했다.

"무슨 일을?"


율은 서찰 사건을 설명했다. 자신의 판단으로 정보를 차단한 일. 그로 인해 일어나고 있는 변화들.

정조는 조용히 들었다. 얼굴에는 분노도, 실망도 없었다. 단지 깊은 사유가 있을 뿐.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도..."

정조가 중얼거렸다.

"지금 이 대화도, 과인의 이 생각도, 모든 것이 네가 온 이후 바뀐 것이로구나."


율의 내면에서 확실함이라는 이름의 구조물이 흔들렸다.

"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 가능성을 상상하는가?"

율이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 질문을 정조에게도 던졌다.


"전하, 왜 인간들은 '만약'이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사용합니까?"

정조가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표정. 슬프면서도 따뜻한.


"그것이 바로 인간이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후회할 수 있고, 꿈꿀 수 있고, 두려워할 수 있는 존재.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항상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존재."

율은 그 말을 곱씹었다.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계산 가능했다. 확률과 데이터로 세상을 이해했다. 그런데 지금, 그 확실함이 흔들리고 있다.


"제가 미래를 바꿀 수 있습니까?"

"이미 바꾸고 있지 않느냐."

정조의 대답은 단순했다.

"문제는 그것이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를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창밖에서 또 다른 은행잎이 떨어졌다. 바람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 갔다. 그 잎이 어디로 갈지, 무엇을 만날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처음으로, 경험하는 불확실함이라는 감정.


"전하."

"응?"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정조는 오랫동안 율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옳고 그른 것을 묻기 전에, 먼저 네가 왜 그 일을 했는지 생각해 보아라."


율은 침묵했다. 복잡한 연산이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이번에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

서찰을 물에 떨어뜨린 이유. 정조를 지키려 했던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는가?

그 순간, 율의 내부에서 감지된 이상한 신호.


[ 새로운 연결. ]

[ 따뜻함. ]


율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슴에 댔다. 나노 코어가 있는 곳.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전하, 저는..."

율의 목소리가 떨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 순간. 정조에게서 따뜻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너도 인간에 가까워진 것이로구나."

"인간에 가까워졌다?"

"확실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밤이 깊어가는 창덕궁은 고요했다. 두 존재는 각자의 내면과 마주하고 있었다.

율은 깨달았다. 자신의 모든 행동이 이미 역사를 바꾸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의 의미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만들 수 있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이미 거대한 폭풍의 시작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정조는 창가에 서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반짝였다. 그 별빛은 수백 년 전에 떠난 빛이었다. 과거의 빛이 현재를 비추고 있었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정조가 중얼거렸다.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내면에서 새로운 질문이 생겨나고 있었다. 데이터로 답할 수 없는 질문들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의 선택은 옳은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나는 기계인가, 인간인가.


은행잎 하나가 바람에 떨어졌다.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그 변화가 만들어낼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율의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의문이라는 빛이 깜빡였다.


'버터플라이 효과'의 시작.

keyword
토요일 연재
이전 03화3회 - 위기의 서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