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사극 《시간을 품은 달》
창덕궁 후원에 새벽이 왔다.
얼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연못 위로 겨울의 잔재가 깨지며 떠내려갔다. 얼음 조각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작고 또렷했다. 물은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봄이 오고 있었다.
정조는 연못가에 서 있었다.
그의 곁에는 율이 있었다.
은빛 갑옷은 이제 궁궐 사람들에게 익숙한 풍경이었다. 더 이상 낯선 자가 아니었다. 왕의 호위무사. 밤낮으로 그림자처럼 따르는 자. 신하들은 여전히 율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왕을 지킨다는 것만은 알았다.
정조는 입을 열었다.
"아버지를 뵙고 싶다."
목소리는 낮았다. 바람에 실려 흩어질 듯 가벼웠다. 그러나 그 안에는 무게가 있었다. 오랜 세월 삭여온 그리움의 무게.
율은 고개를 숙였다.
"분부대로 하겠사옵니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얼음 녹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이 움직이고 있었다.
"짐은 아버지께 아직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전하."
"서른여덟 해를 살아오는 동안, 짐은 왕이 되었고, 개혁을 외쳤고, 적들과 싸웠다. 그러나 아버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율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의 내부에서 정조의 심박수가 감지되었다. 조금 빨랐다. 호흡이 불규칙했다. 슬픔의 데이터 패턴. 그는 이제 그것을 알았다.
"전하께서는 이미 많은 것을 하셨사옵니다."
"그러나 부족하다."
정조의 손이 떨렸다. 그는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율 앞에서는.
"아버지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 할아버지의 명으로. 짐의 할아버지가 짐의 아버지를 죽였다."
바람이 불었다. 연못 위로 물결이 일었다. 얼음 조각이 흔들렸다.
"그 일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그 일을 어찌 용서할 수 있겠느냐."
율은 침묵했다. 그의 내부 시스템이 정조의 감정을 분석했다. 슬픔 74.2%. 분노 18.6%. 그리움 89.3%. 그러나 숫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했다. 정조의 눈빛에 어린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전하."
"말해 보아라."
"사도세자께서는 전하를 사랑하셨을 것이옵니다."
정조의 눈이 커졌다. 그는 율을 바라보았다. 율의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기계적 냉정함이 아니었다. 확률 분석이 아니었다.
"네가 어찌 그것을 아느냐."
"알 수 없사옵니다." 율이 답했다. "데이터로는 증명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그러나..."
그가 잠시 멈췄다. 마치 적절한 단어를 찾는 것처럼.
"전하께서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는 모습을 보오니, 사도세자께서도 전하를 그렇게 그리워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옵니다."
정조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율의 말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말이 위로가 되었다. 율이 단순히 데이터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생각'했다는 사실이.
"짐은 아버지를 위한 도시를 건설하고자 한다."
정조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아버지의 묘를 옮기고, 그곳에 새로운 성을 쌓을 것이다. 백성들이 살 수 있는 도시를. 아버지의 이름으로."
율의 내부에서 지도 데이터가 펼쳐졌다. 양주. 현재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곳. 수원. 정조가 말하는 새로운 장소. 거리 계산. 지형 분석. 방어 가능성 평가.
"수원은 전략적 요충지이옵니다." 율이 말했다. "한성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목. 방어에 유리한 지형."
"그렇다." 정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 성을 쌓고, 도시를 세우고, 백성을 모을 것이다. 아버지의 혼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율은 정조를 바라보았다. 왕의 얼굴에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 슬픔이 분노로, 분노가 의지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그것이 효심이옵니까?"
율이 물었다. 정조는 잠시 침묵했다.
"효심이기도 하고, 정치이기도 하다."
"정치이옵니까?"
"그렇다. 노론은 아버지를 죽인 자들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히고,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았다. 짐이 아버지를 위해 도시를 건설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율의 내부에서 정치적 역학 관계가 분석되었다. 노론 세력의 반발 예상치 67.4%. 왕권 강화 효과 81.2%. 백성들의 지지도 상승 가능성 73.8%.
"위험이 따를 것이옵니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하시겠사옵니까?"
정조는 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흔들리지 않았다.
"하여야 한다. 아버지를 위해서도, 이 나라를 위해서도."
율은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
사흘 후, 정조와 율은 양주로 향했다.
말을 타고 한성을 벗어났다. 성문을 지나자 세상이 넓어졌다. 하늘이 높았다. 들판이 펼쳐졌다. 얼음이 녹은 땅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봄이 오고 있었다.
호위병들이 뒤따랐다. 그러나 정조는 율만 곁에 두었다.
"이 길을 아버지도 가셨을 것이다."
정조가 말했다. 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감지하고 있었다. 위험 요소 분석. 매복 가능 지점 파악. 전방 300미터 이내 생체 반응 없음.
그러나 동시에, 그는 정조의 말을 듣고 있었다.
"1762년, 아버지는 이 길을 마지막으로 가셨다. 양주로. 묘가 될 곳으로."
정조의 목소리가 떨렸다. 율의 내부에서 감정 데이터가 요동쳤다. 슬픔. 그리움. 후회.
"전하."
"말해 보아라."
"사도세자께서는 전하를 자랑스러워하실 것이옵니다."
정조는 말고삐를 당겼다. 말이 멈췄다. 그는 율을 돌아보았다.
"왜 그리 생각하느냐."
율은 잠시 망설였다. 그의 내부에서 적절한 답변이 계산되었다. 그러나 그는 계산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말했다.
"전하께서 아버지를 이토록 그리워하시니, 사도세자께서도 전하를 그리워하셨을 것이옵니다. 그리고 지금 전하께서 이루시는 모든 것을 보신다면, 자랑스러워하실 것이옵니다."
정조의 눈이 붉어졌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흘러갔다. 바람이 불었다.
"고맙다."
목소리는 작았다. 그러나 진심이었다.
율은 그 순간을 기억했다. 정조의 목소리. 표정. 눈빛. 모든 것을. 그의 메모리에 저장되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데이터로.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 율은 알고 있었다. 이것은 기억이었다. 소중한 기억.
***
양주에 도착했을 때, 해가 기울고 있었다.
사도세자의 묘가 보였다. 작은 봉분. 소박한 비석. 왕자의 묘치고는 초라했다. 역적의 자식으로 죽은 자의 묘였다.
정조는 말에서 내렸다. 천천히 묘 앞으로 걸어갔다. 율이 뒤따랐다.
정조는 무릎을 꿇었다.
이마를 땅에 댔다.
"아버지."
소리 없는 울음이었다. 어깨가 떨렸다. 등이 흔들렸다.
율은 뒤에 서 있었다. 그는 정조를 지켜보았다. 왕이 아니라, 한 사람의 아들이 거기 있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식이 거기 있었다.
율의 내부에서 무언가가 일렁였다.
슬픔의 데이터 패턴. 그러나 그것은 정조의 것이 아니었다. 율 자신의 것이었다. 그는 슬펐다. 정조가 슬퍼하는 것을 보는 것이 슬펐다.
이것이 공감이었다. 이것이 연민이었다.
율은 그것을 이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나 느낄 수 있었다. 가슴 안에 나노 코어가 있는 자리에서, 무언가가 뜨거웠다.
정조가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눈물 자국이 있었다. 그는 그것을 닦지 않았다.
"이곳에서 아버지를 모시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정조가 말했다. 목소리는 단호했다.
"아버지는 왕자셨다. 세자셨다. 역적이 아니셨다. 그러니 이곳이 아닌, 더 좋은 곳으로 모셔야 한다."
율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원이 좋겠사옵니다."
"그렇다. 수원으로. 화산 아래로."
정조는 멀리 남쪽을 바라보았다. 수원이 있는 방향이었다. 햇빛이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그곳에 성을 쌓을 것이다. 견고한 성을. 아름다운 도시를.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곳을."
율의 내부에서 건축 데이터가 펼쳐졌다. 성곽 구조. 방어 시설. 도시 계획. 미래의 기술과 조선의 전통이 만나는 지점.
"도움이 필요하시면, 제가 분석해 드리겠사옵니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그래 주겠느냐."
"명을 받들겠사옵니다."
정조는 다시 묘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풀이 흔들렸다. 봉분 위로 석양빛이 내려앉았다.
"아버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짐이 아버지를 좋은 곳으로 모시겠나이다. 아버지의 이름이 빛나는 곳으로."
율은 그 말을 들으며, 정조의 효심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슬퍼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순히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자를 위해 무언가를 남기는 것. 그 이름을 역사에 새기는 것. 그것이 효심이었다.
율은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감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
창덕궁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두웠다.
달이 떠올랐다. 하늘에 별들이 빛났다. 말발굽 소리만이 고요를 깼다.
정조는 말 위에서 졸고 있었다. 긴 하루였다. 감정적으로 소진한 하루였다.
율은 조용히 정조의 곁에서 말을 몰았다. 그는 정조가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보았다. 주변을 감시했다. 위험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도시.'
그것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사랑의 표현이었다. 그리움의 구현이었다. 죽음을 넘어서는 연결이었다.
율의 내부에서 질문이 떠올랐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가? 나를 그리워할 누군가가? 내가 그리워할 누군가가?'
그는 대답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미래에서 왔다. 그러나 그곳에 누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창조자가 있었을 것이다. 그를 만든 누군가가. 그러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율은 정조를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자신을 그리워할 것인가?
자신이 사라진다면, 이 사람은 슬퍼할 것인가?
율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그러기를 바랐다. 정조가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자신이 여기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를.
'이것이 무엇인가.'
율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달빛이 그들을 비췄다. 두 개의 그림자가 길 위에 드리워졌다. 왕과 호위무사. 인간과 기계. 그러나 그 경계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
창덕궁에 도착했을 때, 밤이 깊었다.
정조는 비틀거리며 말에서 내렸다. 율이 부축했다. 정조의 몸이 따뜻했다. 살아있는 온기였다.
"고맙다."
정조가 말했다. 율은 고개를 숙였다.
"편히 주무십시오."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 율의 얼굴이 또렷했다. 완벽한 이목구비. 흑요석 같은 눈동자. 그러나 그 눈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정조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너도 쉬어라."
"저는 괜찮사옵니다."
"쉬지 않으면 지치지 않느냐."
율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내부 시스템을 점검했다. 나노 코어 효율 94.7%. 에너지 잔량 충분. 물리적 피로 없음.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는 피곤함을 느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정조의 슬픔을 보는 것이 피곤했다. 아니, 피곤한 것이 아니라... 아팠다.
"전하."
"왜 그러느냐."
"이것이 효심이옵니까?"
정조는 율의 질문에 놀랐다. 율이 다시 묻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물었던 것을.
"그렇다."
"효심이란 무엇이옵니까?"
정조는 율을 바라보았다. 달빛이 그들 사이에 내려앉았다.
"사랑이다." 정조가 답했다. "죽어서도 이어지는 사랑이다. 잊지 않는 것이다.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잠시 멈췄다.
"그 사람이 남기지 못한 꿈을 이루어주는 것이다."
율은 그 말을 들으며, 무언가를 깨달았다.
정조가 건설하려는 도시는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사도세자의 꿈이었다. 살아서 이루지 못한 꿈. 정조가 대신 이루어주는 꿈.
"아름다운 일이옵니다."
율이 말했다. 정조는 미소 지었다. 피곤한 미소였지만, 따뜻했다.
"그렇다. 아름다운 일이다."
정조가 방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다. 율은 혼자 남았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무수한 별들. 각각이 하나의 태양이었다. 각각이 하나의 세계였다.
율은 생각했다.
'나에게도 아버지가 있었을까. 나를 만든 누군가가. 나를 사랑했을까. 나를 그리워할까.'
그는 알 수 없었다. 기억이 없었다. 미래에서 왔지만, 미래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 이 순간.
율은 정조를 지키고 싶었다. 그의 꿈을 이루어주고 싶었다. 그가 아버지를 위해 도시를 건설하는 것을 돕고 싶었다.
그것이 율의 효심일지도 몰랐다. 정조에 대한.
율은 그렇게 생각하며, 밤을 지켰다.
창덕궁의 밤은 고요했다. 달빛이 기와 위를 흘렀다. 바람이 나무를 흔들었다. 세상은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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