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의 자손, 가랑이를 지켜라”

by 손샤인

다음 날, 우리는 새벽같이 일어나 해변가에서 일출을 보며 셔플을 추기로 했다.

‘독도는 우리 땅’ 노래에 맞춰서 일출을 배경 삼아 멋지게 추는 것이 목표였지만…

현실은 언제나 시트콤.

수십 번을 반복하며 줄 맞추고, 스텝 맞추고,

누구 하나 한 동작이라도 틀리면 다시 처음부터!

왜들 그리 욕심이 많은지…

해가 중천에 떠도 끝나지 않는 셔플지옥.

하지만 , 오늘은 3.1절.

이렇게라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기리는 건 참 멋지고 의미 있는 일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애국심 뿜뿜,

결코 잊지 못할 추억의 한 조각을 만들었다.

셔플이 끝나자마자 비가 내렸고,

우리는 황급히 숙소로 들어갔다.

다들 다음 춤을 위해 잠시 휴식 모드로 들어갔지만,

나는 나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비 오는 해변가로 뛰쳐나갔다.

3년 전부터 매년 3월 1일, 3.1km를 뛴다.

올해도 어김없이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민도 없이 비 내리는 해변을 달렸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주 건방진(?) 생각 하나를 했다.

“내 몸속엔 독립군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아…

아니, 흘러. 난 독립군의 자손이야. 대한독립 만세!!!”

유관순이 된 냥 의기양양해서

숙소로 돌아오니 다들 충전 완료된 에너자이저처럼

눈빛에 셔플 열정이 불타고 있었다.

다음 스케줄은 쉘 위셔플 제주지부 방문!

지부 회원들에게 직접 인사도 드리고,

함께 셔플도 추는 뜻깊은 자리였다.

마침 대장님 다연선생님도 오셔서 좋은 이야기도 듣고,

새로운 셔플 동작도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제주는 어디서 춤을 춰도 풍경이 예술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든 말든,

우리는 또다시 “백만 스물하나, 백만 스물둘! “

에너자이저처럼 춤을 췄다.

나는… 내 소중한 가랑이 보호를 위해 간간이 쉬어가며 분위기를 즐겼다.

살아야… 또 춘다.

여기 모인 이 중년의 사람들,

그간 반백년을 넘게 살면서 저런 끼를 도대체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이곳에선 ‘엄마’, ‘아빠’, ‘선생님’, ‘할머니’, ‘할아버지’…

그 모든 명함을 잠시 내려놓고,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에 괜히 가슴 한편이 아릿해진다.

그리고 문득 깨닫는다. 나도… 그들 중 하나라는 걸.

저녁엔 숙소에 모여 셔플 여행의 마지막 밤을 불태웠다.

너나 할 것 없이 저녁을 순식간에 해치우고는

셔플연구소로 달려가, 각자의 셔플 숙제에

진심을 다하고 있었다.

곧 있을 전문가반 수료와 시험을 앞두고, 모두가 각자의 부족한 부분을 반복 연습하며 진지했다.

우리 나이쯤 되면, 뭔가를 배우기 시작하면 끝을 본다.

물론 중간에 ‘나가리’ 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열정적으로 끝까지 가본다.

본인이 만족할 때까지.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가끔은… 정말 무섭다.

3일째 되는 날, 동기들과 작별하고 육지에서 오는 새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첫날은 ‘효림 톱밥 찜질방’에 가서 묵은 독소를 빼고 족욕도 하며, 말 그대로 신선놀음을 즐겼다.

언니들과 나는 셔플로 생긴 근육통을 치료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고, 오빠와 형부도 예상보다 잘 따라주었다. 낯선 경험도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우리의 ‘날씨요정’은 갑자기 ‘날씨요괴’로 변신해서, 가는 곳마다 비가 내렸다.

실외에서 더 이상 춤을 출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호텔방에만 있을 리가 있나?

검색 끝에 찾은 실내 공간, ‘여미지 식물원’으로 향했다.

마감 5분 전까지 전망대에서

우리의 마지막 릴스를 찍으며

비 오는 제주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오빠와 형부는 각자의 시간을 보내며 가끔 우리를 슬쩍슬쩍 구경하러 오곤 했다. 궁금했던 건지?

길바닥에서 춤춘다고 창피했던 건지…………

날씨 탓에 못 간 곳도 많았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우린 이미 충분히 행복했다.

제주의 날씨는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는 날, 마치 아쉬움을 달래듯 해님이 슬며시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날씨요괴였나?

괜히 미안한 마음에 웃음이 났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오빠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아 조금 걱정이 됐지만, 혹시 내가 면세점에서 정신없이 쇼핑할까 봐 미리 긴장한 건가? 하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오빠가 조심스레 말했다.

“어금니가 많이 흔들려서… 집에 가자마자 치과 가야 할 것 같아.”

요즘 오빠는 십 년 전에 심었던 임플란트 문제로 치과를 계속 다니고 있었다. 여러 개의 임플란트를 발치하고, 잇몸 치료까지 받으며 고생 중이었다. 그래서 여행 내내 음식을 잘 먹지 못했던 거구나.

그동안 말도 못 하고, 아픈 걸 참고 있었던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 신기하게도 내 안에 있던 쇼핑 욕구가 마법처럼 사라져 버렸다.

지금 중요한 건, 오늘 당장 치과에 가는 일이다.

이가 아픈 사람에게는 바다도, 맛집도, 면세점도 의미가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오빠, 미안해.. 우리 얼른 집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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