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딸이 베란다 화분에 상추 씨앗을 심었다. 상추쌈을 좋아하는 나는 저 씨앗을 언제 키워서 밥상에 올리나 차라리 마트에서 사먹고 말지 생각했다. 하지만 딸이 정성으로 키우는 화분이니 군말 없이 지켜보고 있는데 이틀 만에 조그맣게 싹이 났다. 따뜻한 날씨 때문인지 파릇파릇 제법 상추 모양으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시작이 어렵지 시간이 지나면 뭐든 보상으로 돌아온다.
주말 가족과 벚꽃 길을 걸었다. 아름답게 핀 꽃이 지기 전에 챌린지에 동참한다는 느낌으로 나선 길이다. 끝없이 이어진 벚나무를 보면서 타인을 위해 한 그루씩 나무 길을 조성한 분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한 그루의 나무가 많은 이들의 마음에 온기를 불러일으킬 것을 알고 심었을까 아니면 하나의 일과로 고된 노동으로 일을 끝냈을까. 누군가에게는 보기 좋은 것도 누군가에게는 고된 노동이 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심은 나무가 꽃을 피우고 저렇듯 환하게 불 밝히듯 핀다면 노동의 대가로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일상에서 내가 행한 일의 열매는 더디 오지만 보람을 가져오는 일이 많다.
딸은 취업준비로 분주하다. 몸도 분주하지만 마음도 분주하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도 마음이 분주하기는 마찬가지다. 서류를 낸 곳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 때문이다. 최근 서류에 합격하고 4차 면접까지 무난히 통과하자 우리 집은 잔치 분위기였다. 주변 사람들을 만나 자랑하고 나니 내 마음속에 만개한 벚나무가 자라는 듯 했다. 그러나 면접은 4차에서 끝나지 않고 5차 면접까지 있었다. 그동안 서울로 오가는 기차 비용만도 컸는데 5차에서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실망한 딸과 함께 전망이 좋은 카페로 갔다. 봄은 해마다 약속이나 한 듯 찾아온다. 딸에게도 희망처럼 봄이 찾아올 것이라고 위로해주었다.
머나먼 벚꽃 길을 걷자니 힘이 들어서 목표점을 정해놓고 돌아오자고 마음을 모았다. 멀리 보이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목표점이다. 그런데 보기에 그리 멀지 않아 보이는데 걸어도 나무가 가까워지지 않았다. 눈으로 보는 거랑 실제 거리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미 정한 길, 되돌리기 싫어서 힘든 다리를 억지로 끌고 나무 앞까지 갔다. 그 큰 나무에 까치가 집을 지었는데 둥지 세 개가 나란히 걸려있었다. 하나가 아니라 셋이어서 외롭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가족도 힘든 일이 있을 때 이렇게 같이 걸어주면 힘든 일도 반으로 줄어든다.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최근 출간한 책들이 여러 곳에 선정되는 바람에 온라인서점 상단에 이름이 올라 다른 출판사 편집자의 눈에 띈 모양이다. 성인출판물만 주로 출간하던 출판사가 아동책을 출간하고자 출간제안이 들어왔다. 계약조건도 나쁘지 않아서 들뜬 마음에 당장 작품을 메일로 보냈다. 그런데 한 달 안에 소식을 준다던 출판사에서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설익은 글을 보내놓고 바로 책 출간을 기대했던 내 조급함이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기회가 오면 무조건 잡아야 한다는 것은 이와는 반대다. 충분히 준비가 되었을 때 그 기회에 손을 내밀어야 탈이 없다.
모든 일은 한 걸음부터 시작한다. 그 걸음이 모여서 길이 되는데 그 끝이 아름다운 열매가 아닐 수도 있다. 삶은 그렇게 쉽게 길을 열어주지 않는다. 결국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는 사람에게 그 길이 열리는 것이다. 열매를 따려면 준비가 필요하다. 그 준비를 채우는데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그 길이 즐거우면 그 노력도 충분히 감당할 이유가 된다.